오피니언

구약성서의 인간 이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김이곤 칼럼]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만이 영혼을 가진 피조물인가?(창 2:7,8-25; 창 1:20-28)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철학분야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분야가 다 그 궁극에서는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이라면, 신학은 그 어느 분야보다 더 인간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신학의 궁극목표는 “인간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르게 대답하기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구약성서의 인간학에 관한 고전적인 성구인 창세기 2:7,8-25와 창세기 1:20-28에 대한 심도 있는 주석(註釋)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러한 대답이 성서 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도 적합한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의 대답과는 정면충돌하는 반(反) 성서적 견해를 오히려 가장 성서적인 대답인양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미리 말해두고 싶습니다.

1. 첫째로는,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우선 첫째로 자신이 창조자가 아니라, 즉 신(神)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창조주께서 만드신 “그분의 피조물(被造物)”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우선 지적되어야 합니다.(시 100편 3절,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 ) 즉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을 “신”(神)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는 점과 동시에 그 “인간”을 철저히 일관되게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그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90:5가 말한 바와 같이, 즉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가시면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새번역」本)라고 한 것같이, 인간은 전적으로 유한하고 허무한 존재일 뿐이므로(창 6:3),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것은 인간을 “실족”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창 3:5)이요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엄히 금(禁)하신 일(창 3:22)이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입장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는, 태초의 우주창조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허무하고 유한한 ‘흙’(=먼지, 티끌, 창 2:7, 기원 전 10세기경의 글)” 또는 “말씀”(창 1:20-28, 기원 전 6세기경의 글)으로 만드셨다는 증언(證言)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흙(또는 말씀)으로 만드신 그 인간을 가리켜 히브리어 원어(原語)는 “네페쉬 하야”(창 2:7, nephesh hayah=살아있는 생명체)라고만 말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창 1:20의 “창공을 나는 날짐승”과 창 1:21의 “물에 사는 물고기” 그리고 창 1:24의 “가축, 기는 것(길짐승) 그리고 땅의 짐승(들짐승)”들을 모두! 다! 창 2:7의 “인간”과 똑 같이(!) “네페쉬 하야”라고만 한 점은 그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이라는 사실입니다(적어도 여기까지는! 사람=동물이라는 이 Hebraism의 인간이해를 주목하십시오)!

그런데, 우리의 문제 그 중심에 서 있는 이 “네페쉬 하야”라는 말의 그 정확한 의미는 단지! “생물”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단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이러한 “여러 생물(네페쉬)들 중의 하나!”로 창조되었을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그 무슨 “영혼을 유일하게 가진 영적이고도 신적인(神과 비슷한) 존재”라고는 성서가 결코 말하지 않았고 또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인간 편중적 세계/자연 이해는 비성서적입니다. 인간영혼만이 사는 來世는 식물도 동물도 흙도 없는 유령들만 있는 세계일 테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점이 생겨난 것은 바로 여기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즉 단순히 “생물”(숨을 쉬는 몸)만을 의미하는 그 “네페쉬”라는 히브리말을 비(非)히브리 언어로 (그리스어, 영어, 독어, 한국어 등등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이 외국인[=非 이스라엘인] 번역자들은 전혀 엉뚱하게도 “영혼” 또는 “영” 즉 영어의 “soul”(spirit)이라는 말로 번역함으로 인하여 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그 점입니다. 즉 단순히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시적으로(주로 시편에서 많이) 묘사할 때나 사용하는 그 개념을 너무 확대해서(!) 그리스어의 “영혼”(soul) 개념, 이른 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그리스 사상(헬레니즘)이 가르친 바, “불멸의 영혼 또는 불사의 영혼”(immortal Spirit or immortal soul)을 가리키는 것으로 왜곡, 오해하도록 만든 그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신약의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바, ①몸[소마또는 육살크스]과 ②혼[푸쉬케] 그리고 ③영[프뉴마]이라는 삼분법으로, 또는 ①몸[소마]과 ②혼[푸쉬케] 또는 ①육[살크스]과 ②영[프뉴마]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그 본 의도도! 대부분의 신약성서 주석가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총체성을 강조하는 히브리적인 인간이해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성”을 즉 인간의 사유와 의지 및 행동 전부를 모두! 성화[聖化]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役事]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말한 것으로서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이곳 한 곳[살전 5:23]에서만 언급되고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매우 복잡한 해석학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다음 회[3회; “유전적 원죄론은 가능한가?”]에서 다루게 될 본문 중 고린도 전서 15:45의 말씀, 특히,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라는 번역문의 그 원어인 그리스어 본문[70인 역본에 대한 신약의 인용 해석]이 <첫 사람 아담은 “푸쉬케 조산”이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은 “프뉴마 조오포이운”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하는데, “푸쉬케 조산”과 “프뉴마 조오포이운” 사이의[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질적 차이는!! 결코 모호하게 처리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올릴 제3회의 글에서 분명하게 언급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가리키는 저 “네페쉬 하야”라는 말은 본래의 히브리 본(本)에서 의도한 바(Hebraism)와는 다르게(!) 외국 번역본(한국어나 영어 번역 등등)에서는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Hellenism)으로 급전이(急轉移)하게 되고, 동시에, 몸은 죽지만 그 몸속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로! 급등둔갑(急騰遁甲)하게 된 것입니다[그러나 이 견해에 철퇴를 가한 예수님의 말씀을 참조하십시오. 마태 10:28].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오해 때문에(!) 갖게 된 그 신앙적인 오류(또 이러한 잘못된 인간이해) 때문에 기독교신앙이 기독교 초기부터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라는 이단사설의 마법에 걸려서 인간을 “신”(神또는 “반신”[半神, semi-divine])으로 믿는, 이른 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 죽음”과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최악의 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갈 3:1).

3. 셋째로는, 이상의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창세기 기자는(창 1:26-28)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된 존재”(=“아담=창 1:26,27=창 2:7)라고 결론지어 강조하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새”(창 1:20)와 “바다의 물고기”(창 1:21) 그리고 “땅의 짐승”(창 1:24), 즉 모든 다른 “생물”(“네페쉬 하야”)들과는 구별되는, 이른 바, 그들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들을 “다스리는”(통치하는) 위임 통치자(surrogate)로 삼으셨다는 점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에 의하여 부각시켰다는 그 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는 대표적 성서본문인 창 1:26-28에 의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 것은, 그 무슨 다른 생물(네페쉬 하야)들에게는 없는 “영혼” 또는 “영”을 유일하게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한 말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의 본문(창 1:26-28)은 단지, 다음 두 가지만을 다른 “생물”(창 1:26-28)들과는 구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관련해서 인간에게 “특별히” 부여(賦與)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그 하나는 이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생물”(창 1:26-28, 네페쉬)들을 “다스리라”고 하는 특별한 과제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그 점입니다. 즉 이 본문 안에서는(그리고 구약과 신약 성서 그 어디에서도) 결단코 “영” 또는 “영혼”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창 2:7에서는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코에 하나님께서 “생기”(生氣: “네샤마”)를 불어넣으셨다는 “의인법적(擬人法的, anthropomorphic) 표현”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해서 만든 그 인간조차도! 단지! “네페쉬 하야”(생물:生物)라고만 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창 1:20(날짐승), 창 1:21(물고기) 그리고 창 1:24(가축과 길짐승 그리고 들짐승)에서 저들 생물들도 모두 “인간”과 꼭 같이 “네페쉬 하야”(생물: living being, cf. [New]RSV, [New]KJV,, 그러나 NEV에선 a living creature라고 번역)라고만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詩的 애칭으로는] 비록 “영적” 존재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시편 도처에서 발견) 그러나 그 인간이 곧 그리스(희랍) 성현들처럼 “불멸(不滅), 불사(不死)의 영 또는 영혼”이라고는 성서 어디서도 결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가리켜서 “영혼”이라고 부르는 경우(例: “내 영혼이 은총 입어 …” 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하는가?” 등등)에서라도 우리는 그 “영혼”을 가리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과, 그리고 저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異端)이 생각하듯이 그런 “불멸의 영혼”(immortal soul)으로 이해하여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을 신(神), 반신(半神, semi-God) 또는 창조주로 보는 신성모독적인 신화론(神話論)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일 뿐,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다른 ”생물“(네페쉬 하야)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위임통치의 과제를 부여받은 존재일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창 1:26,28에서 말하는 이런 “인간의 위임통치권”을 이보다 4세기만큼이나 일찍이 쓰인 문서인 창 2:7-25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였는지를 추적해보면, 우리는 곧 쉽게, 창 2:15에서도 그 고대 성서기자가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것(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고대의 문서(창 2:15)도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런 발전된 교의적(敎義的) 신학용어는 구사(驅使)하지 않았다고는 하여도 창 1:26,28이 말하는 이 세상에 대한 통치와 관리 과제를, 좀 소박한 표현법으로, 땅을 “경작하며 지키는” 사명이라고 말함으로서, 그도 이미 오래전에, 이 특별한 인간과제(=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과제)를 뚜렷하게 인지(認知)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경작(耕作)하고;” “지키는 것”(창 2:15)과, 동시에,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과제”(창 1:26,28)를 부여받은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표징으로서 설명되었을 뿐, 그 무슨 “영혼”을 홀로 부여받은 것에서 그런 표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약성서 전체의 문맥에서도 “인간”을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인간”은 철저히 “죽는 존재”이지 “불멸의 존재”이거나 몸 안에 “불멸성”을 지닌 영적 존재라고는 결코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영적(靈的)인 존재요 신적(神的)인 존재라는 주장은 “인간들”이 생각해낸 인본주의적 발상이요 소크라테스-플라톤 같은 그리스(Greek) 성현들이 특히 그렇게 강조하였던 철학적 사유(思惟)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흔히들, 독배를 받아 마시며 웃음 짓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운명하신 예수의 죽음 사이를 엄격히 대비(對比)키도 합니다. 실로,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몸의 부활”을 믿으셨습니다(사도신경의 결론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다고 하였지, 인간영혼의 불멸과 영생을 믿는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절 때마다 많은 교인들은 “부활”을 찬송하면서도 그들의 속생각은 “영혼 불멸”을 믿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러한 우리들은 과연 예수의 제자입니까 소크라테스의 제자입니까?

(2)“하나님의 형상”의 두 번째 과제는 창 1:27이 말하듯이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조화” 즉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로서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창 2:18의 기록자도 오래 전에(4세기나 먼저) 이미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나쁘다, 악하다]”라는 말씀으로 인간의 사회성(sociality)을 강조하였었음은 놀랍습니다. 물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공존성(co-existence/co-humanity)과 사회성(sociality)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이 <영생을 얻는 절대적인 지름길>(눅 10:27-28)임이 확실합니다(눅 10:37). 인간은 야훼의 토라(눅 10:27)와 예수의 명령(눅 10:28)을 수용 실천함으로 비로소 그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만 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창 1:26이 또한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극명하게 설명해줍니다. 즉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즉 복수(複數; plural)로 창조하신 의미를 설명할 때, 특별히(다른 “생물들”도 암-수의 복수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경우에만은 특별히!) 창 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複數 自願 形, cohortative tense 사용!!)에서는 “유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라는 “복수”(複數: plural)로서 표현하시기까지 하셨다고 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analogy: 類比)를 이렇게 복수(複數) 상응관계(相應關係)로 표현하는 것의 그 신학적 의의(意義)는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이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 Martin Buber의 불후의 저서, I and Thou가 이해를 돕는 데 좋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 창 1:26의 의미를, 흔히들 잘못 생각하듯,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시킨다든가,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남성 복수라는 사실과 관련시킨다든가, 아니면, 인간창조 만은 하나님도 힘겨워서 천사들을 동원하였다든가 하는 형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그 ”특권“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서기자(창 1:26)가 하나님을 복수(複數; plural)로 표현하는 표현방식(anthropomorphism)으로 신-인(神-人) 사이를 유비(類比)시켰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가장 이상적 인간(imago Dei)은 원만한 공존(co-humanity)의 사회적 존재(complete social being=image of God)라고 증언하였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장 근접하게 닮아지는 길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복수의 조화”(전지전능의 이룩함)를 가지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인간”도 또한 그 “나-너”의 복수관계(複數關係)가 “[부부/이웃]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기를 바라시는(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그 “사회성”(sociality)-요구에 인간이 바르게 응답하는 길, 바로 그것이라고 창 1:26의 성서기자는 보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인간의 희망은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그것”(부활시키시는 것과 재창조해 주시는 것, 갈 6:15)에만 있는 것이라는 것이 성서(구약-신약 모두)의 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우리“인간”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기간의 한 짧은 생을 사는 유한한 존재”(창 3:19)일 뿐이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로 하여금 그의 지상요구인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갈 6:15)해 주실[=몸으로 부활 시키셔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실] 그의 “긍휼의 은혜”만을 희망하여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말씀(신의 약속)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시 25:6].”(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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