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재순 칼럼] 나는 생각한다

생각, 나는 생각, 하는 생각, 이성과 영성의 통합

생각하는 인간 homo sapiens: 생각과 실천의 통합

가을은 생각하는 계절이다. 화려하고 무성한 잎새들과 꽃잎들과 열매들이 떨어지고, 텅 빈 하늘이 높아지면 있다가 없어진 것,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있는 것들이 있다가 없어지면 없어진 것,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감각되고 지각되니까 알 수 있다. 있다가 없어진 것, 이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 눈과 귀로 알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화려한 동영상이 넘쳐나니까 보고 듣는 것은 익숙해지는데 생각하는 것은 낯설고 멀어진다. 더욱이 돈이 지배하고 서로 경쟁을 강요하는 시장경제 체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오랜 생명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보고 듣는 존재에서 생각하는 존재로 진화했는데 과학기술의 발달로 울긋불긋하고 번쩍번쩍하는 것에 홀려서, 돈의 위력에 눌려서 인류는 다시 보고 듣는 존재로 돌아갔다. 현대인은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보고 듣는 존재이다. homo sapiens가 아니라 homo videns, homo audiens이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약해지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위기이며, 문명적 위기이다. 모든 문명의 기초는 정신이다. 정신이 무너지면 아무리 강력하고 거대한 국가와 문명도 무너진다. 물질문명이 화려하고 기계기술문명이 찬란할수록 생각과 영성이 깊어져야 한다. 그래야 문명이 지탱된다. 신과학자이며 문명비평가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감각적인 물질문명이 황혼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은 화려해보이지만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도 생각을 깊이 파야 한다. 인류평화의 새 문명을 지으려면 정신과 생각이 깊어져야 한다.

생각의 근원; 생각은 사랑에서 나온 것

물질문명에 취한 현대인들은 정신과 생각에 대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동안 물질과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인간과 역사를 이해하였다. 흔히 사회과학자들이 “먹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를 알 수 있고 사회적 존재를 알면 그 사람의 정신과 의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도 말한다. 가난한 자와 부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의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자가 정의와 평등을 생각하기 어렵고 가난한 자가 법과 질서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을 알면 사람을 알 수 있다. 생각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고 존재가 결정된다. 평상시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존재가 결정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고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 생각과 존재가 일치한다.

본래 생각은 삶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정신적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고 의식하는 주체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라는 점에서 낮은 단계의 지향(의지)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개나 소도 감정을 가지고 반응한다. 생각은 생명체의 이러한 주체적 의식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homo sapiens)라 하여 다른 동물과 구별한다. 생각은 구체적인 사물과 대상에 대한 지각과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의식과는 구별된다. 다른 동물들의 의식과 지능은 본능적 욕망과 그 대상에 매여 있다. 구체적인 상황, 물질과 대상에 직접 즉자적으로 대응한다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심리적 본능, 물질적 대상, 기계는 주어진 법칙과 틀을 따라 움직인다. 생각은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모르는 것, 새로운 것을 알려고 헤아리며 애쓰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자기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가능해진다. 본능적 욕망에 매이면 꾀(지능)는 늘어도 생각은 할 수 없다. 다른 동물들도 생존본능에 봉사하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지능은 생각함으로써 발달했지만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다. 생각은 자기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물질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이성적 생각은 본능과 영성 사이에 있다.

기계가 발달하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지능을 갖게 될 것이다. 계산능력이나 추리능력에서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영혼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예배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기계는 아무리 해도 자동적인 것이지 자발적 헌신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가? 왜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함석헌은 신의 사랑이 생명진화와 역사 창조의 동인이라고 보았다. 포유류가 생명체를 몸 안에 품고 오래 지내면서 생명체를 먹이고 돌보는 과정에서 지성과 감성이 생겨났다고 한다.

인류학자들과 진화학자들도 인간이 다른 인간을 치유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남을 헤아리는 데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자기만 살려고 할 경우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기의 생존을 위한 필요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생존을 위한 필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리고 생각해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로 생각하고 서로 자기를 표현하는데서 인간의 본질이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눈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흰자위가 있다. 흰자위는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드러내기 때문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사람은 서로 자신을 드러내는 눈을 보면서 서로 교감하고 사귀며 연대함으로써 생존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흰자위가 생긴 것은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살리고 돌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 믿음이 인류를 낳았다.

생각의 근원은 사랑이다. 중세 이전의 한국어에서는 ‘사랑하다’가 생각하다를 뜻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긴 병을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사랑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고 본다.

마음이 수 천 만년, 수 억 년 빚어낸 몸의 기관들과 세포들, 창자, 자궁, 간, 허파, 염통, 혈관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마음이 담겨진 몸의 이런 기관들에서 생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모든 언어들에서 히브리어, 한국어에서도 몸의 기관들이 생각과 감정의 자리였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애를 끊는다. 애간장이 녹는다.” 그리스어에서 스프랑크니조마이는 “연민을 느끼다.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느끼다.”는 뜻인데 어원은 자궁, 창자를 뜻한다.

원시시대에는 몸과 몸의 각 기관들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리이고 주체였다. 창자와 자궁이 아픔과 사랑을 느끼고 생각하는 자리이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몸으로도 생각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굶주린 창자가 지식인의 머리보다 더 예민하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손으로 일할 때 손도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있다고 본다. 책을 통해서만 배울 것이 아니라 일하는 손을 통해서 삶과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예수는 손으로 일하면서 생각하고 많이 배웠을 것이다. 사랑으로 섬기는 손과 발에서 삶의 지혜가 나온다.

니체도 ‘육체의 대이성’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머릿속의 이성보다 몸의 이성이 더 근원적이고 크다는 것이다. 몸은 우주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 오늘날 몸의 생각과 인식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지성에 의해 본능적 욕망이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러움을 잃었다. 인간의 식욕이나 성욕은 몸의 필요를 벗어나 크게 과장되어 있다. 또 지성은 생각을 관념화시킴으로써 사랑과 삶에서 생각을 분리시켰다. 몸의 대 이성이 회복되고 완성되려면 이성과 영성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지성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된 본능적 물질적 욕구에서 이성이 벗어나 영성과 통합이 될 때 몸과 이성과 영성의 대통합에 이를 것이다.

함석헌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대 병원에 계실 때 내게 말씀하셨다. “큰 공부를 하시오. 사람에게 본능과 이성과 영성이 있는데 본능과 이성을 넘어서 영성을 아우르는 공부가 큰 공부입니다.” 영성과 통합된 사유, 생각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사유이며, 생각과 실천이 결합된 사유이다. 오늘날 학문이 개념과 논리에 충실한 논문을 쓰는 것에 머물러 있고 실천과 유리되어 추상적 난해함과 관념적 유희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본래 동양에서는 학문과 삶, 실천이 통합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경우에도 지행합일, 사유와 실천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근대과학철학과 함께 사유와 실천이 분리되고 학문이 관념과 논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오늘 인문학의 위기는 사유와 실천의 분리에서 왔다. 오늘의 학문에서 생각과 실천, 생각과 삶이 유리되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유리되고 외면당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사유와 실천이 통합되고 영성적 사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귀감이 된다. 최근에 김 상봉 교수가 남미에서 “함석헌의 인간관”에 대해서 발표를 했는데 오스트리아 철학교수가 “어떻게 이런 사람의 글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함석헌을 “20세기의 소크라테스”라면서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유와 실천이 통합되었고, 표현이 소박하면서 깊이가 있고, 정해진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도전적인 질문을 통해서 삶의 결단과 실천을 통해 진실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함석헌과 소크라테스가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노예제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에게 대화와 토론을 통해 철학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으로서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철학과 실천을 추구했으며, 동서정신문화를 통합하는 사상과 철학을 형성했다.

본래 몸의 진화와 의식의 진화가 함께 갔을 것이다. 의식의 진화가 몸의 진화를 이끌어 갔을 것이다. 의식의 진화와 몸의 진화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진행되다가 생각하는 인간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고운 꽃과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데 사람이 보는 것과 벌레나 곤충이 보는 것이 다르고 개나 소가 보는 것이 다르다. 벌레나 다른 짐승은 사람처럼 섬세하고 고운 빛깔의 꽃 모습을 못 본다. 마음, 의식이 발달한 만큼 눈의 감각기관이 섬세하게 발달해서 예쁜 꽃을 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더 발달하면 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의 의식이 눈의 감각기관을 빚어내고 눈이 꽃을 보는 것이라면 고운 꽃은 마음이 빚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없음과 빔에 대한 발견

사랑과 생각은 자기의 물질적 본능을 초월하여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다. 사랑과 생각은 물질적 욕망을 넘어서 자기를 초월하여 보편적 일치, 하나 됨에 이른다는 점에서 통한다. 사랑은 우주적 보편적 하나 됨의 실재에 대한 인격적 추구이고 생각은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이성적 탐구이다.

생각은 대상이나 주체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보편적인 사유와 정신세계를 열어준다. 구체적인 물질이나 물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가 열린다. 인간의식이 무(無)와 공(空)을 발견함으로써 생각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하학이나 수학의 세계는 물질세계에서 독립해서 존재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은 무와 공의 평면이다. 물질세계에서 벗어난, 물질이 들어갈 수 없는 텅 빈 세계이다. 무와 공을 알게 됨으로써 초월, 절대, 자유, 전체 하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과학도, 종교도 철학도 가능해졌다.

이성적 생각은 물질적 유한성을 넘어서 초월과 절대, 무한의 차원에 이르렀다. 없음과 빔을 알게 되었다. 없음과 빔에서 인간다운 사랑, 연민이 생겨난다. 우리말 ‘가엽다’는 ‘가이 없다’, ‘갓이 없다’에서 왔다. 갓이 없는, 테두리가 없는 무한에서 가여움 연민이 나온 것이다. 없음과 빔을 알게 된 것이 철학과 종교의 근거이다. 절대, 무한의 초월자, 절대자인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이고 무한과 존재의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타자와 사물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객관화, 대상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질적 욕망과 제약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로소 하늘과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모시게 된 것이다.

인간은 무한과 절대의 하나님, 보편적 우주적 진리를 추구할 수도 있고 자기 자아를 절대화하고 세상에 대한 독점의식에 빠질 수도 있다. 전체 생명에서 분리되어 개체 욕망을 절대화하는 것이 원죄이다.

다른 동물들도 지능이 있으나 본능과 욕망의 족쇄에 매여 있다. 동물들의 지능은 본능의 도구이며 동물들은 본능적 생명의 조화 속에 산다. 인간의 지성은 본능에서 벗어나서 절대, 초월과 무한의 세계에 이르렀으나 본능과 영성 사이에 헤매고 있다. 본능의 심부름꾼이기도 하고 영성의 심부름꾼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 이성은 사유의 주체이나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 휘둘리고 흔들리는 존재이다. 이성은 간교한 생존의 꾀이기도 하고 보편성, 객관성, 떳떳함, 도리(道理),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은 동양에서 인의(仁義)와 통한다.

나는 없다

서양에서 이성, 로고스는 논리, 말, 법칙, 원리를 뜻한다. 인간, 우주, 역사가 논리, 원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헤겔은 이성=경험=존재의 일치를 말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했다. 근대철학의 기본 원리이다. 생각은 이성의 인식행위이고 작용일 뿐 존재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 내 존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서구근대철학에서 이성은 인식론적 기능을 할 뿐이다. 대상에 대한 지식, 관념, 정보, 원리와 법칙을 알려 줄 뿐 생각하는 주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 서구 계몽주의에서 성숙은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 바르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을 사용하는 주체에 대한 물음을 묻지 않았다.

서구철학에서 인간이성의 존재론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우주와 역사, 사회의 본질이 이성적 원리와 법칙으로 파악되었다. 근대철학에서는 존재(실체)와 사유(관념, 정신)가 이원적으로 분리되었다. 사유와 실천이 분리되었다. 서구 근대철학이 논리적 사변과 관념적 유희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삶, 역사와 유리됨으로써 대중과 유리되었다.

서구 근대철학은 이성의 철학이면서 개인 주체의 철학이다. 개인 주체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였다. 개인의 권리가 법으로 파악되었다. 권리라는 말과 법이라는 말이 일치하였다. 이성은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확인할 뿐 개인의 주체, ‘나’에 대한 반성과 문제제기가 없었다. 개인의 인격과 이성의 주체로서의 ‘나’를 자명하게 전제하였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자아(ego)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인간 자아의 성격이 유아기에 확정된다고 함으로써 고정된 성격을 지닌 자아를 인정하였다.

요새 나온 책『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들녘)에서는 인간의 고정된 자아, ‘나’라는 게 도대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 심리학, 문화학, 철학의 성과에 근거한 결론인데 진정한 나라는 것은 없고 사회 속에서 기능하는 나만 있다는 것이다. ‘나’라고 생각한 것은 조작된 허구라는 것이다. 참 나에 대한 탐구는 잘못된 것이며 “‘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라고만 말하는 것은 타락이며, 스스로를 해체하는 행위다. ‘나’는 ‘우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참 나는 없다는 주장은 나에 대한 개념이 개인주의적 실체론적 관점에 매여 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고정된 개체의 자아가 ‘참 나’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에 매인 ‘나’는 죽고 예수와 더불어 새로 태어난 나가 참 나이다. 자기에게 매인 나는 ‘거짓 나’이고 ‘예수와 공동체적으로 하나로 된 나’가 참 나이다. 자아가 깨져서 죽고 새로운 나, 공동체적인 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새로 난 나가 참 나이다. 이렇게 영적으로 다시 난 나는 심리학이나 과학의 대상이 되는 나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없고 예수만 있는 것이 참 나”일 수 있다. 바울이 “나는 죽고 없어지고 예수만 내 속에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 것도 이런 진리를 말해 준다.

어쨌든 서구사회에서는 내가 없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른다. 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나’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당황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뿐 아니라 동양의 종교들에서는 “내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숭산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세계에 선불교의 꽃을 활짝 핀 사람이다. 그가 미국과 유럽에서 5만명의 제자를 얻었다고 한다. 숭산 스님이 처음에 미국에 가서 철학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 앞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없다.”고 주장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로고스 철학에 빠져 살던 서구인들에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고 “내가 없다.”는 말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사유체계 속에 없는 주장이기 때문에 정곡을 찔려서 불교에 귀의하고 머리 깎고 스님이 된 이들이 많이 나왔다.

이성적인 생각이 관념이 삶과 실재를 왜곡한다. 행동을 가로 막는다. 깨달음을 가로 막는다.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실재, 삶 자체, 진리에 이르고 내가 없음으로써 전체 속에서 자유와 해탈, 구원에 이른다. 기독교에서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속에서 살아나심으로써 전체 생명 속에 해방되고 구원된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생각하는 곳에 신이 있다

유영모는 “생각하는 곳에 신(하나님)이 있다.”(念在神在)고 했다. 생각은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은 것이다. “생각한다, 고로 신이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생각과 나를 직결시켰으나 유영모는 생각과 하나님을 직결시켰다.

유영모도 생각하는 주체를 인정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는 것이 없다. 생각하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사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행위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다석은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내가 존재하는 것, 존재행위라고 하였다.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를 세상의 일부로서 이해했으나 다석은 영적 정신적 존재로 이해하였다.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리,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다석은 생명과 정신의 주체인 나와 성령을 추구했다.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도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는 생각으로 내가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부자유친(父子有親)하는 것이다. 하나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얼굴이 이 세상에는 없고 “(아버지를) 부르는 내 맘에, 아무것도 없는 내 속에 있다.”(103) 하나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나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잊으면 그 틈으로 못된 생각이 들어온다. (104) “맨 으뜸으로 진리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인간성이다. 그것이 사람의 참뜻이다. 그런데 이 뜻은 꼭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의(誠意)다.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그립고 그리워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록 20~1 얼숨을 쉬어야 영혼이 산다. 하나님이 깊은 생각을 내속에 들게 하면 이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97) 생각에서 말씀이 나오고 말씀에서 하나님을 안다. (98)

생각하여 하나이신 하나님께 가면 그른 것이 바로 잡히고 모순된 것, 못된 것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가운데’로 돌아간다. 하나를 생각하면 내 속의 아버지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하나님이 우주 전체 생명의 하나, 중심이 내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103)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생존을 염려하는 근심과 걱정으로서의 생각이 있고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생각이 있다. 영혼을 힘 있게 하고 살리는 생각과 영혼을 나약하게 하고 죽이는 생각이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땅에 떨어지고 생명이 시들어가고 황폐해지는 경우가 있고 생각할수록 영혼이 솟아올라서 힘이 나는 경우가 있다. 욕심과 미움 속에서 하는 생각은 떨어지는 생각이고 사랑과 믿음 속에서 하는 생각은 올라가는 생각일 것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나고 힘이 솟는다.

생각에는 고개를 숙으러 뜨리는 생각(근심, 걱정, 의심)과 고개를 하늘로 들고 오르게 하는 생각(철학, 믿음)이 있는데 앞의 생각은 썩은 졸개가 되게 하고 뒤의 생각은 얼이 크고 뚜렷한 이가 되게 한다.

유영모; “참을 찾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고,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가슴 속에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은 성령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성령과의 연락에서 성령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이다...나(我)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오신다.(念在神在)...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진다1, 297~8
유영모는 하나님과 얼로 통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로 사람을 판단했다. 진다 1, 53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 나이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다기보다 말씀이 곧 존재이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근원은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운데이다. 말씀이 사람의 정신내용을 살린다. 진다1, 57

생각의 집을 지어야 한다. “우리의 몸생명은 목숨인데 얼생명인 말숨(말씀)과 바꾸어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생각과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숨(말씀) 속에 번데기가 되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는 삶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다 뽑고는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미련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각의 실, 말씀의 실을 뽑아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가서 있을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생각하여 말씀의 실을 뽑아 누에가 고치집을 짓듯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어록 21

이성과 영성의 통합, 사유와 영감의 통전, 하는 생각, 나는 생각

함석헌은 “생각을 하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추리하는 과학적 이성적 생각과 영감으로서의 생각을 통합한 것이다. 믿음과 생각, 이성과 영성이 통합된다. 다석도 추리하다 보면 신통하고 신통하면 변화를 알게 되고 하나에 이른다. 이것이 궁신지화이다. 학문이 기도이고 기도가 학문이다. 믿음은 “밀고(推理) 올라가서 밑이 터져 우(하나님)로 올라가는 것이다.”고 했다.(다석강의 112)

다석은 생각이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은 신과 통하는 것 신통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추리가 영성적 신통에 이른다. 생각하면 신통하게 되고 세상의 변화를 알게 된다. 神以知來, 窮神知化 신이 오면 앎이 오고 신을 탐구하여 사물과 세상의 변화를 알면 자기 욕심을 알게 되어, 자기가 억지 쓰는 것을 알게 되어 자유와 평등에 이른다. (다석강의 248, 264) 근본의 하나에 이르기 위해 우는 것이 기도이고 궁신지화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 생성시키는 것이다. 생각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신의 말씀, 영,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에서 생각이 불타오른다고 했다. 생각은 하나님께 자신을 불태워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라고 했다.

생각은 이기적 자아의 존재를 불사르는 존재의 끝을 불태우는 향기로운 제사이다. 본능적 이기적 자아가 영적, 신적 자아, 신의 자녀로 변화하는 과정이며 불꽃이다. 생각함으로써 신의 자녀, 영적인 나가 생겨난다.

생각은 단순히 이성의 인식작용이 아니라 욕망(탐진치), 지식(관념),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영적 자유, 어른 성숙에 이르는 것, 자기정화이다. 생각은 말씀을 닦는 것이고 말씀을 닦는 것은 정신을 닦는 것이다. 어록 22

생각은 라디오 방송처럼 우주와 세상에 전파된다. 생각만으로도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생각의 파장, 영의 파장이 있다고 보았다.

개인뿐 아니라 전체가 생각의 주체이다. 생각도 함께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 위대한 영성을 지닌 사상가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그 시대 전체가 함께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영모와 함석헌도 함께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된다.” “하는 생각, 나는 생각”
생각함으로써 씨알이 알이 든다. 생각함으로써 나의 생명이 본성이 완성된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 생각이 죽음을 넘는 일이다.

함석헌은 감정보다 이성을 큰 것으로 보았다. 감정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지만 이성은 전체적이고 항구적이다. 이성은 영성과 결합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
생각은 생명의 씨알을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는 일이다. 생명의 씨앗, 얼의 씨앗, 하나님의 씨앗이 사람의 속에 있다. 이 씨앗이 싹트고 자라면 새 소리, 제소리가 나온다.(다석)

예수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낚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낚아야 한다. 함석헌은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깊은 명상의 바다에서 생명의 바다에서 생각을 낚았다. 寂然不動, 感而遂通 싱싱한 펄떡거리는 생선과 같은 생각을 낚으면 그것이 ‘참 나’라고 했다. ‘나’를 낚으면 참 기쁘다고 한다. 생각으로 생각을 낚는 것이다. 이렇게 낚은 나는 민족의 생명의 바다, 민중의 생명의 바다, 인류정신의 깊은 바다, 우주의 생명바다에서 영원히 사는 나이다. 고정된 실체도 가면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 영혼이며 하나님과 하나로 통한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이다. 이런 생각을 낚으면 몸과 맘이 살아난다.

영성과 통한 생각은 뚫린 생각이다. 도통, 감이수통이다. 하늘과 땅, 몸과 정신, 동서고금,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뚫린다. 사람은 뚫려야 한다

사람의 몸은 식도로부터 항문까지 뚫려 있다. 그 중간 어디가 막히면 몸에 이상이 생겨 신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각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확 뚫려 있어야 한다. 어디가 막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꼭 막힌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속이 확 뚫린 사람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퉁소 같은 사람이다.(함석헌의 강연에서)

몸이 두루 뚫리고 통하듯이 마음과 생각도 두루 뚫리고 통해야 한다. 함석헌은 생각과 실천, 정신과 몸이 하나로 뚫리는 삶을 추구했다. 동서고금의 사상과 정신이 하나로 뚫리고 나와 너와 그가 하나로 통하며, 우리와 원수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자리에 이르려 했다. 하나로 뚫리고 통하면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세계화 시대에 세계평화, 비폭력 평화의 새 시대가 온다. 기존의 국가문명은 돈과 칼, 물질의 지배를 받고 이성은 물질의 지배에 종속되었다. 이제 이성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성이 해방되어 제 구실을 하려면 영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이성은 본래 객관적 보편적 우주적 진리를 탐구하자는 것인데 돈과 칼, 물욕에 종속되어 제 구실을 못했다. 이성이 제 구실을 다 하고 영성에 봉사하면 비폭력 평화의 시대를 당겨 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하는 정신 쪽으로 방향을 크고 힘차게 틀어야 한다.
 
 
글: 박재순 목사(씨알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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