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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동물권에 대한 신학적 소견

출처 : 새길이야기 2009년 겨울호
글 : 이정배(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인간만을 신의 형상(imago die)으로 보고 여타 피조물을 신의 ‘흔적’으로 달리 보았던 기독교의 입장에서 동물권에 대한 논거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성서의 인간중심주의적 입장은 소위 ‘인간 원리’(anthropic principle)라는 진화론적 시각과 맞물리며 서구 기독교 문명을 주도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2천 년 역사는 권리 개념의 확장사라 해도 틀리지 않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헌장으로부터 노예해방선언(1863년), 여성참정권(1920년), 노동권(1928년), 흑인 권리헌장(1957년)을 거쳐 급기야 1973년에는 인간 이외의 ‘자연권’에 대한 헌장이 발표되었다. 자연권은 종의 멸종이 가시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인류 및 생태계의 미래를 위해서 거듭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오늘의 주제인 동물권 역시 자연권에 대한 논의 선상에서 다뤄져야 할 사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유전자)공학의 발전은 종차(種差)를 허무는 과정에서 동물권을 급속히 인간에게 종속시키고 있다. 도룡농의 생존을 인간의 편리에 견줄 수 없었던 것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동물권에 대한 신학적 견해를 주로 원(原)역사라 불리는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정리하고, 이를 현대 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볼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종래 신학이 동•식물 그리고 인간에게 붙여준 생혼(生魂), 각혼(覺魂), 그리고 영혼(靈魂)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가 도출될 수 있을 듯하다.

1.

일반적으로 전통 기독교 신학은 창세기 1장 28절에 등장하는 ‘땅의 지배권’(dominium terrae)을 신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해 왔다.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을 동물과 인간이 주종관계를 맺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생태학적 성서해석에 의하면 이에 대한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본래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생명 공간을 만드셨고 각각의 생명 공간에 한 부류의 생명체들이 살도록 하셨다. 하늘에는 새를, 바다에는 물고기를 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땅에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생명체, 즉 짐승과 사람이 함께 살도록 하셨다. 동일 공간 내에 두 생명체가 사는 것은 갈등과 혼란을 야기한다. 이에 하느님은 먹이를 얻는 방식을 각기 달리 하도록 하였다. 짐승은 저절로 나는 풀을 먹을 것이며 인간은 씨를 뿌려 경작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땅을 지배하라는 것은 본래 경작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생태신학자들은 추론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동물들의 생존 자체를 처음부터 염려하였다는 사실이다. ‘땅’이라는 동일 공간에서 살되 먹이를 달리하면 싸움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 시 동물은 결코 인간의 도구나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은 경작을 통해 동물의 고유한 삶 자체를 지켜주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창세기 5-6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홍수 사건을 통해서도 동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생태신학자들은 홍수사건에서 기독교 창조신앙의 본질을 읽으려 한다. 인간의 잘못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음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아의 방주다. 노아는 시대의 징조에 대한 위기의식과 우환의식에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방주를 짓되 그 속에 온갖 생명체를 들여 놓았다. 방주란 다양성의 자리였고 필요/불필요의 가치를 넘어선 공간이었다. 필요한 것만을 선하게 보는 풍토에서, 방주는 존재하는 것 일체가 선하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엑카르트의 말대로 ‘있음’을 결여할 만큼 무가치한 존재는 없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모든 것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느 피조물에게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인정한 것이다. 존재하는 일체 생명을 ‘필요’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는 것이 동물권을 말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일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더불어 하느님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처음 창조 때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것이니 다음의 약속은 꼭 지키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것(창세기 9장 1-7절)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 간의 관계에서 정의의 감각을 잃지 말라는 것이고, 후자는 동물, 나아가서 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특히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동물권에 대한 성서적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생명이 인간에게 달려있기는 하지만 동물의 생명(본성) 전체를 망가트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십 마리의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동물의 본성을 조작하는 생명(유전)공학의 작업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말이 사치일 정도로 함부로 다뤄지는 실험실 내 동물들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육류 제공을 목적으로 부조리하게 사육되는 동물들, 도살 및 운송과정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비인도적 처사들, 인간들의 필요 유무에 의해 버려진 유기견들 또한 피 채로 먹혀진 것으로서, 약속 파괴의 실상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위 두 약속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하나가 지켜지지 않으면 다른 것 역시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결국 동물권은 인간 간의 정의의 감각과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안임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물권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서의 생각인 것이다.

2.

이외에도 인간과 짐승들 간의 평화에 대한 성서적 논거는 적지 않다. 성서는 사자와 양 그리고 어린아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을 염원하고 있다. 성서는 자연이 인간을 토해내고 인간과 짐승이 반목하는 현실을 죄의 결과로 본다. 동물권을 논의해야 할 만큼 열악해진 짐승의 실상을 성서는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고 있다. 종종 그래왔듯 인간중심주의 시각에서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권의 확보와 인간의 구원이 무관치 않다는 것이 성서의 한 관점인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생태신학자 G. 프리드리히는 예수의 고독한 40일 광야생활에서 그와 교감을 나눈 유일한 존재가 짐승이었음을 환기시켰다. 영국의 생물학자 R. 쉘드레이크는 동물들이 가진 특이한 능력을 찾는 연구에 몰두해 왔다. 이들은 동물 역시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정서적, 정신적 차원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본 장에서 생혼(生魂), 각혼(覺魂), 그리고 영혼(靈魂)으로 이해된 동물과 인간의 전통적 구별을 장(場, field)의 이론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중세 이래 서양에서는 식물에게는 성장/소멸을 지배하는 생혼만이, 짐승들에게는 생혼에 더하여 아픔과 배고픔을 느끼는 각혼이, 그리고 인간은 이 둘에다 결코 소멸치 않는 영혼이 함께 깃들어 있다고 이해했다. 생혼과 각혼은 죽으면 소멸하지만 영혼만큼은 불변하기에 인간은 여타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된 것이다. 영혼은 여기서 초월적 속성과 등가적이었다. 지금껏 기독교는 인간의 초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재성의 중요성을 간과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초월성은 우주 공동체의 포괄적 관계성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이점에서 토마스 베리 신부는 상술한 세 종류의 차별적 혼(魂) 대신에 만물에게서 발견되는 자생성, 곧 야성(野性)의 의미를 강조했다. 생혼과 각혼은 지금껏 인간에 의해서 통제되고 판별되는 대상이었으나 자생성(自生性)으로의 야성은 결코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베리 신부는 야성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우주라는 한 실재의 두 차원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생성 자체가 신성한 것, 영적인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생명체가 먹이를 찾고 은신처를 만들며 새끼를 낳아 키우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한, 그것은 우주의 야성, 창조적 신성의 표현들이다.

이런 야생 속에 우주를 질서지우는 법도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인간은 충분히 포착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균형과 법도를 어기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뿐이란 점이다. 생태학적 시편으로 불리는 시편 104편은 이런 인간을 악당이라 하며 하느님의 정원에서 내쫓고 있다. 불교에서 삼라만상이 부처인데 인간만이 유독 부처가 되지 못함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야성이 곧 신성과 다르지 않는 한 생혼, 각혼, 영혼의 전통적인 분류법은 무의미하다. 동물 역시도 인간에 의해 포착할 수 없는 자기 목적적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생명현상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자연 자체인 동물들이 가진 특이한 능력에 귀 기울일 때 우주의 신비는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예컨대 주인의 귀가 시간을 정확히 인지하는 개, 자신의 둥지를 정확히 찾아오는 비둘기, 흰개미 사회의 신비, 그리고 형태공명 이론에 근거한 동물들의 학습능력에 대한 발견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이점에서 셀드레이크는 신학자 메튜 폭스와의 대화에서 혼을 장(場, field) 이론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 과거 인간 내부에 있다고 믿어지던 혼을 과학의 이름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몸) 속에 혼이 있지 않고 혼(場) 속에 몸이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혼이 몸보다 크다는 이런 생각은 중세 신비가들의 발상이었고 현대 과학의 발견이기도 하다. 이로써 혼은 속성의 차원이 아니라 일체 존재를 견인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삼라만상의 존재가 혼(場) 속에 있음으로 어떤 것도 개체로 머물 수 없고 상호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로는 같은 공간을 점유할 수 없으나 혼으로는 더불어 있다는 말이다. 앞서 우리가 말한 야성도 혼의 장에서 발생하는 상호 교감능력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결국 인간과 동물, 곧 자연 생명체는 유기적(관계적) 방식으로밖에는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3.

인간과 동물을 하나의 장(場) 속에서 피차 교감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영’의 진화의 틀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홀아키(holarchy)적 세계관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아우르는 하느님 영의 활동 구조를 잘 보여준다. 홀아키 개념에 따르면, 실재(Reality)는 자족적인 실체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항시 부분과 전체로 구성된 전일적 질서를 뜻한다. 예컨대 물질, 생명, 마음, 영혼, 그리고 나아가서 정신(spirit) 역시 이러한 홀아키적 존재라는 것이다. 생명은 물질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며 마음 또한 생명을 초월하면서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정신과 영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상위 계층들은 하위 계층에서 발견되지 않는 기능, 능력, 구조 등을 갖고 있기에 하향적으로 불가역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위 계층 없이는 상위 계층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하위 계층 역시 무시될 수 없는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이 물질로부터 영혼에 이르는 전 과정(진화) 속에 편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홀아키적 존재 질서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영의 초월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 외적 영역의 탈신 성화는 가속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말하는 홀아키적 우주론에 근거해서 인간과 자연의 무차별적 동일성을 말하는 시각과 일정부분 거리를 둘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의 기저적 가치는 홀아키적 질서에서 하위 계층이 더 크지만, 존재의 깊이 즉 내면적 가치에 있어서는 상위 계층이 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저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홀아키론은 이전의 신학과는 달리 ‘약한’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할 수밖에 없다. 약한 인간중심주의란 홀아키적 존재들 사이의 계층적 차이를 인정하나 가치서열적인 절대적 차이는 부정하는 입장이다. 인간과 인간의 외적 영역, 특히 동물과의 관계가 유기적임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동물 층을 포괄하면서도 넘어서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홀아키적 세계관과 성서적 입장이 무리 없이 만날 수 있다. 성서를 생태학적 시각에서 읽는다 해도,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외적 영역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위 계층을 포함하면서 넘어서는 홀아키적 질서의 창발성과 하느님의 영의 진화는 물리학은 물론이고 생물학, 동물학 나아가서 심리학의 전 영역 사이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진화의 영으로서의 하느님은 온 우주(Kosmos)를 사랑한다는 것이 홀아키적 세계관의 본질이다. 생물의 다양성이 보존되고 동물권이 회복되며 인간의 무의식이 치유되는 과정 없이 기독교의 구원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끝으로 동물과 관계된 필자의 경험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이 경험은 동물권을 논하는 이 자리에 필자를 세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 시골에서 ‘진진’으로 불리는 진도견을 키운 지 6년이 되었다. 2달 때부터 키웠으니 깊은 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지난해 여름 묶여진 끈이 풀려져 거의 2주일 간 진진은 집을 떠나 있었다. 사방을 찾아 헤맸으나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마음을 접을 무렵 마을 사람으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발에 큰 족쇄를 채운 채 쩔룩거리며 다니는 진진을 보았다는 것이다. 현장으로 달려가던 중 필자는 집으로 오는 진진을 만날 수 있었다. 들은 대로 뒤 발목에 멧돼지 덫이 걸려 있었고 몸은 한없이 말라 있었다. 상황을 판단해보니 산을 헤매다 멧돼지 덫에 걸렸고 2주간을 사투하다가 간신히 줄을 끊고 덫을 매단 채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덫에 걸린 발목은 이미 썩어 검게 변했고 구더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발목에 드러난 흰 뼈가 눈으로도 확인되었다. 그런 상태로 집을 향하던 진진이 우리를 보고 반갑다고 꼬리를 쳤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의연하게 반가운 감정을 표현하는 진진을 보며 우리는 그와 모든 것을 교감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미물이 아니었다. 누가 ‘개 같은’ 사람이라고 감히 욕할 수 있는가? 진진은 우리 사람을 여러 면에서 능가, 압도하고 있었다. 참을성, 의연함, 절제, 그리고 주인에 대한 헌신 등, 지금도 눈에 선한 진진의 모습들이다.

진진을 껴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덫을 풀려 하였으나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한 밤을 진진과 함께 고통을 느끼며 지새우다가 다음날 진진의 발은 원주 가축병원에서 수술로 잘려졌따. 그 발이 아무는 2-3개월 동안에도 진진은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우리 품에 안겨 깊은 숨, 안도의 호흡을 하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다. 희로애락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진진은 더 이상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도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중세의 한 화가가 그린 천국 그림에는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하늘나라에 동물이 없다면 그곳은 진정 천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만큼이나 동물 역시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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