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51)

마틴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3)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최근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5. 독일민족의 영웅 루터

루터가 95항의 항의서를 교회당 대문에 써 붙이고 로마 교황에게 대항하고 나온 때는 그의 나이 33세. 아직 젊고 이름도 없는 수도승이며 젊은 한 대학교수였던 그가 전 독일과 가톨릭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그의 사상과 운동에 동조한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져 갔다. 교황의 교서까지 불태워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고, 교회의 일대 혁신을 독촉하고, 교황청의 세력을 독일에서 축출하여 독일 국민의 권익을 회복할 것과 가난한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교황청과 교회의 온갖 폐습을 철폐할 것을 목숨을 걸고 외치는 루터가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제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맞선 데서 더 나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게 되었다. 교황이 루터를 처치할 수 없게 되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5세더러 루터를 처치하라고 압력을 넣어서 황제는 루터를 웜즈(Worms) 국회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 황제는 루터의 먼 여행을 위한 마차와 여비와 함께 생명의 안전을 약속하였다. 체코 슬로바키아의 개혁자 죤 후스가 콘스탄스 회의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당시 황제가 그의 신변의 보호를 약속하였으나 회의장 바깥에서 화형을 받고 죽게 된 일이 있었던 것을 루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겁내지 않고 지붕에 원수가 기왓장 같이 많아도 겁나지 않는다면서 웜즈를 향해 떠났다.

루터는 그의 개혁운동의 동지이며 인문주의 학자로서 신학을 가르치던 멜랑히톤(Melanchthon)과 한 법률고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다. 먼 길 육로의 곳곳에는 으슥하며 위험한 곳도 많았지만 안전하게 1521년 4월에 웜즈에 도착했다. 웜즈에서는 독일 각지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루터가 시내로 들어오던 길가에서 루터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보였고, 노동자들이 싣는 목이 긴 신발을 그린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루터는 독일 민족을 위하여 신성로마제국과 싸우는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당시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의 본토가 되어 황제가 주둔하면서 독일 국민을 여러가지로 착취하였는데 그 황제는 스페인 왕실의 사람이었다. 독일 국민은 독일인 황제를 원했으나 로마 교황청은 스페인 왕실에 호의를 가지고 독일 국민의 청을 무시하였다. 루터를 지지한 삭소니 주의 군주 프레데릭도 선후왕(選侯王)으로서 황제를 선출하거나 황제에 선출될 자격이 있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루터는 준비된 숙소에 들었는데 거리의 그 군중들의 함성은 늦게까지 들렸다. 루터의 선투를 빌며 루터를 해치려는 세력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루터가 황제와 가톨릭 교황의 사절과 그 밖의 교회 고관들과 심문자들 앞에서 굽히지 않고 싸워줄 것을 기대하였다.

국회는 칼 5세가 친히 자리를 잡은 가운데 개회됐다. 루터는 불려 나와서 좌중에 서서 먼저 인적 사항을 질문 받았다. 그 자리에 루터가 그동안 쓴 책과 논문이 쌓여 있었는데 그 모든 글이 자신의 것인지 일일이 일문 받자 루터는 그 밖에도 더 있다고 대답했다. 심문자가 루터에게 이 모든 글을 포기하고 교회에 순종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루터는 거절하였다. 심문자는 다시 생각해보고 다음 날 다시 회의장에 나오라고 권고하고 정회하였다.

다음 날 국회는 다시 열렸고 심문자는 루터가 그동안 주장한 것들을 열거하면서 그의 소신을 확인하였다. 루터는 한 가지도 빠짐 없이 자기가 말한 것을 옳다고 주장하였다. 심문자는 마지막으로 어찌하여 너만이 옳다고 우기느냐고 하면서 루터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으나, 루터는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입장이며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Here I stand, I can not do otherwise)라고 하며 성서와 양심에 어긋나게 말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고만 되풀이하면서 심문자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황제 앞에서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그 국회가 폐회한 이틀 후에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이제 루터의 생명은 보장받을 길이 없게 되었다.

국회가 끝나고 루터는 숙소로 돌아와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미명에 아무도 모르게 일행과 같이 웜즈를 빠져 나와서 귀로에 올랐다. 신변의 위험을 느끼면서 산길을 타고 한참 달렸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군인 수명이 나타나서 루터만 납치해 갔고 동행자들은 루터를 잃어버린 채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루터가 돌아오지 않자 틀림없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를 납치한 군인들은 선후왕 프레데릭이 보낸 사람들이어서 와트버그(Wartburg) 산성에 루터를 안전하게 피신시켰던 것이다. 아무도 모른 가운데 루터는 이 산성에 은신하면서 독일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하였고 다른 책도 썼다. 그가 이 산성에서 익명의 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지내다가, 1522년 6월에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6. 루터의 개혁운동의 노선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인도해가야만 했다. 그의 개혁운동을 환영하고 동조하고 협력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그 당시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문예부흥운동을 이끌어가던 학자들과 정치인들과 민중운동가들 가운데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루터의 복음주의 교회개혁운동과 발을 같이 묶고 달릴 수 있는 동지들은 아니었고 이념이나 실천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루터의 운동과 그들의 운동의 성격과 방향이 달라져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이제 그러한 운동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급진파

루터의 종교개혁 의지와 주요 개혁사항들이 확고하게 서있었으나 로마가톨릭교회의 신부이며 신학교수로서 그의 행동은 과격하지 않았다. 그가 와트버그에 있다가 그의 개혁운동의 거점이었던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의 동지들이 교회 신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던 것을 보았다. 수도사이며 그곳 대학의 교수로서 루터의 개혁운동 동료였던 칼스타트(Carlstadt)가 만인사제론을 실천하는 뜻으로 농민의 옷차림을 하고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성당에서의 성만찬예식을 평복을 입고 집행하면서 떡과 포도주잔 두 가지를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평신도들은 과거에 자기들의 손으로 떡을 집어먹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사람은 두려운 생각에 손을 떨다가 떡을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하였고 더욱이 잔을 받기를 주저하였다. 신도들이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때였다.

칼스타트와 그의 추종자들이 성당의 제단을 뒤엎어버리고 벽에 걸린 성자들의 성화와 조각들을 교회 밖으로 들고 나와 버리려 하자 그것을 만류하던 교인들과 몸싸움이 벌어져 성상이 바닥에 떨어지고 성당 안이 수라장으로 변했다. 칼스타트는 루터의 연배가 되는 노교수였다. 그는 교회당 안의 모든 성상을 일소하고 다만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청교도였다. 그는 루터보다 개혁사상이 과격하여 가톨릭 교회의 흔적을 말살하려고 교회당의 모든 음악기구도 없애버렸다. 칼스타트와 과격파 설교자인 쯔빅카우(Zwickau)의 니클라우스 스퇴크(Störch)는 루터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② 토마스 뮤엔체의 민중운동과 분열

토마스 뮤엔체(Thomas Müntzer) 신부는 루터보다 독일 농민들과 서민 등 편에 더 가까이 서서 종교개혁과 함께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한 좌파 종교개혁운동가였다. 그는 죤 후스의 민족운동을 본받아 그의 교훈을 따라 독일에서 농민운동에 가담하여 농민봉기를 지도하였고 토지개혁을 부르짖으며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옛 이스라엘 민족처럼 독일의 땅과 독일인의 혈통을 자랑한 독일 시온주의자였다. 그가 한때 루터를 열렬히 지지했던 까닭은 루터도 농민들의 호소가 관철되기를 바라서 농민운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루터가 공부하였던 에르푸르트 시에서 농민들과 직공들이 시 행정에 항의하여 시장 켈베르(Kelver)를 죽이고 대학의 주요 건물을 불질러 태우고 도서관을 파괴한 일이 있었다. 루터는 그 후에도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과격한 시위와 파괴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악마라고 정죄하였고, 토마스 뮤엔체의 운동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나갔다. 뮤엔체는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떨어져 나갔다.

③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운동과 분열

어거스틴 수도원의 한 수도사였고 당대의 가장 저명한 인문주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환영하였는데 자기의 개혁사상과 상통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루터도 그를 존경하였다. 특히 루터는 그가 발행한 희랍어 신약성경을 잃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 희랍어 단어 ‘metanoita’의 어원적 의미는 형(penance)이 아니고 회심(repent)이라는 것을 밝혀서 라틴어 성서가 틀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글을 읽고 동의하고 칭찬한 것도 루터는 알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오갔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떠날 생각 없이 다만 교황과 추기경과 감독과 수도원 등 교계 일반의 부도덕과 비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그가 루터와 자유의지 문제로 심각한 신학논쟁을 벌였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도덕적 판단력을 가지고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힘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인문주의 학파의 사람들이 에라스무스에게 루터의 자유의지론을 비판하도록 권고했으나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옛날 어거스틴에게 대항하여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본성적인 선한 성품을 옹호하였던 펠라기우스에 비하는 것을 보고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을 출판하고 자기가 독일에 가면 루터의 추종자들의 돌에 맞을지 모른다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에게 준 편지에서 말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을 믿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찾아서 행복한 인간세상을 만들어낸다는 낙관을 루터가 거짓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루터의 복음적인 종교개혁운동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 문예부흥운동이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후자는 인간의 도덕적 힘을 믿는 길로 나갔다. 에라스무스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거나 경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하여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 없이 인간의 행동에 책임을 돌릴 많은 경우를 열거하고 인간이 잘못할 때 하나님이 벌하시고 잘할 때 기뻐하셨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말하기를 자유의지는 마치 짐승, 말과 같아서 그 위에 하나님이 타시면 그가 가자는 곳으로 가고 만일 악마가 타면 악마가 가자는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루터는 신학적 원리를 말했고 에라스무스는 도덕적 경험을 말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자기를 무신론자라고 말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루터가 성급하고 반역적이어서 온 세상을 무장시켰다고 말하고 1535년 3월에 삭소니 주지사에게 루터가 자기를 무신론자라고 단죄한 데 대하여 법률상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영국인 친구 토마스 모어(‘유토피아’의 저자)는 에라스무스의 편을 들어 루터가 사람의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결국 어거스틴의 은혜론이 루터를 사로잡았고 희랍고전의 이성관이 에라스무스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④ 자유교회 운동과 분열

종교개혁운동의 급진파의 하나는 칼 스타트와 같은 사람들이 규합한 자유교회(free church) 운동파였다. 네덜란드, 즉 홀랜드와 스위스 지방에서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재세례를 요구한 메노 시몬(Menno Simons)이 이끈 재세례파 교회가 생겼다. 그는 라틴어와 희랍어에 능통한 신부였다. 그가 신부가 되자마자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집례하면서 미사의 효과를 의심하고, 신약성서를 철저하게 연구하면서 유아세례를 주는 가톨릭 교회와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의 신학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또 호프만(Hoffman)을 따르는 재세례파 신도들이 자기방어를 위하여 총칼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의 인연을 끊고 재세례파 교회의 목사가 되어 재세례파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홀랜드로 들어가서 지하에서 선교하였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으나 덴마크의 한 귀족의 영지에 은신처를 얻고 그의 재세례파 교회를 홀랜드와 독일에서 전파시켰다.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하여 견고한 신자공동체를 만들어서 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갔다.

재세례파는 초대교회와 같은 단순한 교회제도를 지향하여 예배 형식은 아주 간단하였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한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동일한 싸움과 십자가의 시련을 거쳐 마지막에는 동일한 영광을 누리는 소망의 공동체를 만들고,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하여 모든 것을 공용하매 모든 신도가 평등하여 어떤 파별도 없는 교회가 되어갔다. 이러한 교회를 이단으로 치고 박해한 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아니고 루터교회와 칼빈의 개혁교회였다. 그들은 화형을 받기도 하였고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찬양하였다. 이들은 정교의 완전한 분리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이 재세례파 교회도 몇 가지 분파가 생겨서 다른 여러 지방으로 뻗어갔는데 칼빈의 개혁교회가 홀랜드에 퍼지기 전에는 메노의 재세례파 교회가 다수였고 독일과 체코 여러 지방에도 많았다. 신앙 양심의 자유를 얻고 초대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개혁운동을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주류 교회들이 메노파와 다른 재세례파 교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형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16세기 종교적 상황이었다.

7. 루터교회의 확립

종교개혁운동에 뜻을 두었던 사람들 중에는 루터만큼 담대하게 로마가톨릭교회와 대항하여 싸운 사람은 없었으나 개혁사상이 루터와 공통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앞에서 진술한대로 루터의 운동과의 관계와 협력을 끊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루터는 우선 독일 안에서 가톨릭 교회 교권과 그것을 지지하는 정치세력들과 대결해야만 했다. 대체로 독일 북부지방에서는 삭소니 주의 군주 프레데릭 선후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들이 루터를 지지하였고 독일 남방의 군주들은 로마를 지지하게 되었다.

1526년 스파이에르(Speier) 국회에서는 루터를 지지하는 군주들이 자기들의 행정지역에서 자기들의 소신대로 종교 문제를 다루도록 하였다. 1529년의 스파이에르 국회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군주들의 영지에서 루터교회 교인들의 예배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때 가톨릭을 지지한 군주들의 참석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루터를 지지한 군주들의 영지에서는 가톨릭 교인들의 예배가 자유롭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불공평한 결정이었다. 이때 루터파 대표들이 항의하자 가톨릭 측 대표들이 루터파를 ‘protestant’라고 불렀다. 그 후로 프로테스탄트란 말이 신교도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황제 칼 5세는 루터의 주장이 로마가톨릭교회와 특별히 다른 것과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비난거리가 무엇인지를 가려서 제출하게 한 보고서를 읽고는 그 보고서를 가지고 양편이 토론해서 합의점을 찾아서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양편의 신학자들이 합의를 못 보았을 때 황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1531년까지 굴복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 후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황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1547년 루터를 지지하던 헷세(Hesse) 주의 군주 필립(Philip)과 선후왕 프레데릭의 조카인 요한 프레데릭의 군대가 황제의 군대에게 패배를 당해서 루터교회는 약세에 몰렸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1552년에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찰스 황제 군대를 패배시키고 황제가 체포될 뻔했다. 이렇게 되어 아우크스부르크 국회가 1555년에 열려서 양편의 타협안이 만들어졌는데 그 타협안을 ‘지역종교제도’(territorialism)이라고 부른다. 이것의 원리는 독일의 350여 주에서 ‘군주의 종교가 각 주의 종교가 된다’는 것이었다. 가톨릭 측 군주가 다스리는 지역에서는 그의 종교가 그 지역의 공인종교가 되고, 프로테스탄트 측 군주의 영지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군주의 종교가 공인종교가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루터교회가 공인된 지역에서는 다른 어떤 신교 교파도 선교할 수 없게 하였다. 이 조건 때문에 독일 루터교회 교구가 된 지역에 칼빈의 개혁교회가 들어왔다가 박해를 받고 떠난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 국내에서는 양편이 지역적으로 갈라져 있으면서 평화가 유지되었다. 루터교회가 이러한 주립교회가 되었다가 나주에는 독일국가종교가 될 것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평화를 누리기 9년 전, 1546년 2월에 사망하였다. 루터의 사망 후 그의 신학적 동료였던 멜랑히톤이 루터교회의 신학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루터가 개혁한 교회가 독일국가교회가 되었다. 루터가 로마가톨릭교회와 싸우는 것은 그 교회를 지지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정권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개혁운동을 지지해준 독일 북부지방 군주들의 힘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 군주들이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으로부터 자유하도록 편지를 쓰고 독려하였다. 자기를 지지한 독일의 군주들은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어있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것은 동시에 그들이 로마가톨릭교회를 떠나는 일이었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와 싸우는 과정에서 교회의 운영을 군주들의 정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독일 농민폭동과 전쟁을 치른 후 루터는 교회의 운영을 신도들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관리와 재정, 행정 등의 업무를 관리들이 맡아보게 되었고 목사들은 교회의 예배와 신학 문제와 예전의 집행과 교인들의 신앙교육에 전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총회와 종교법원과 지역노회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종교법원이 교회의 모든 행정과 관리를 책임졌다. 교구 안의 신자들의 후생과 복지와 일반교육은 종교법원이 관장했다. 그리고 순방자(巡訪者)가 있어서 교회를 순시하면서 교회의 운영과 모든 활동을 조사하고 감찰하였다. 교인들은 정부에 종교세를 내고 정부는 그 돈으로 교회 운영의 모든 비용을 충당해갔다. 지역종교제도 아래서 독일의 교회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지역의 군주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되었고, 루터교회도 주립 또는 국가 교회제도가 되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16세기 칼뱅은 충분히 진화론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이오갑 강서대 명예교수(조직신학)가 「신학논단」 제117집(2024 가을호)에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 의미 밝혀

정태기 영성치유집단을 중심으로 집단리더가 구조화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통해 영성치유집단이 가진 독특한 구조와 치유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학철 교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 부정하는 이유는..."

연새대 김학철 교수(신학과)가 상당수 기독교 신앙인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소위 '창조과학'을 따르는 이유로 "(진화론이)자기 신앙의 이념 혹은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원효의 체상용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원효의 체상용의 불교철학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이 발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손호현 교수(연세대 신과대학)는 얼마 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