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레위기 19:1-4/로마서 12:1-2
설교문
2010년 1월 14일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울렸습니다. 의사였던 그는 2001년 신부가 되어 지구촌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의 하나인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마을을 찾아 봉사활동을 시작합니다. 수단은 오랜 내전으로 오직 증오, 분노, 가난, 질병만이 남은 곳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버린 곳, 아이들의 손에 총이 들려지는 곳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합니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총을 들던 아이들 손에 악기를 들려 브라스밴드를 형성합니다. 톤즈 마을에 음악과 웃음과 즐거움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는 귀국하였다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결국 수단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그들, 가족이 죽었어도 울지 않던 톤즈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 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가 지난 9월에 개봉되어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워낭소리”이후 가장 많은 관객이 관람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었을까? 성당을 먼저 지었을까?” 질문하면서 학교를 지은 신부의 묵상 글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입니다.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린 아들의 죽음에 어머니는 “아들을 밀알로 쓰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에게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상과 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는 달랐습니다. 거룩했습니다. 또한 톤즈 마을 사람들은 거룩한 신부에게서 거룩을 체험했습니다. “울지마 톤즈”를 관람한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훔쳤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산 거룩한 삶을 통해 거룩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포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포로기란 고난의 시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역경에 처하게 되면, 신에게 질문합니다. “왜? 이 고난의 의미는?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처음에는 원망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요, 여기서부터 회개 운동과 함께 회복을 위한 노력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고, “거룩법전”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신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무력으로 지배하며, 생명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바벨론의 우상과 하나님은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우상이 세상의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거룩하다.”한 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구별된 신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르게 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구별된 삶이어야 합니다. 레위기는 철저하게 바벨론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을 배경에 깔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2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 합니다. 새번역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은 본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세상이 본이 아니라, 우리가 본이어야 합니다. 이때 무엇을 본 보여야 합니까? “거룩”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생활이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좁은 길”을 걷는 것이 거룩입니다. 젯밥에 마음 두지 않고 제사에 정성을 드리는 것이 거룩입니다. 먼저와 나중을 분별하여 먼저를 바르게 행하며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힘쓰는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거룩입니다.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다.”라 했습니다. “거룩은 영성과 도덕성이라는 두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어느 하나만 없어지면 반드시 무너진다.”고 경고했습니다. 거룩은 세상의 풍조를 본받을 때 소멸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본받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을 본받아 세상이 된 교회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음도 불문가지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거룩이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오늘의 교회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든다고 하실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우리가 거룩한지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본인 우리가 거룩해야 세상이 우릴 배워 거룩해집니다. 우리는 세상의 본이 되어 감동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