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최근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2장 쯔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운동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쯔리히(Zurich)의 한 신부였는데 희랍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인문주의자였다. 스위스는 6~7개 주로 나뉘어져 자치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농경지대가 많고 알프스산맥의 계곡지대도 많은 대체로 빈곤한 나라였고, 쯔리히와 바젤(Basel)과 베른(Bern)과 같은 작은 도시들은 자유도시로서 시위회가 다스렸다. 스위스는 작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각 주와 각 시가 독립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한 연방이었지만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는 민족정신이 강하였다.
쯔빙글리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시청의 말단직원이었고 삼촌은 신부였고 다른 한 삼촌은 수도원장이었다. 쯔빙글리는 두뇌가 명철해서 학생 시절에 희랍어와 라틴어 성적이 우수하였고, 고전을 애독하면서 어거스틴의 저서를 많이 읽고 받은 감화가 컸다. 당대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서를 비롯한 저서를 애독하며 인문주의 학문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청소년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면서 특별한 죄책감 없이 살았으나 그 당시 신부나 수도승들의 세계도 부도덕한 것이어서 쯔빙글리도 신부가 된 후 성직자로서의 순결한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가 신부직을 얻기 위해서 은화 100개를 지불했다고 하니 교회 자체도 타락해 있었다. 그가 한동안 돈 받고 봉사하는 용병으로 이태리로 끌려가던 스위스 청년들의 군목으로 동행하였다. 스위스 청년들이 유럽에서 충성심과 전투정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로마 교황청의 용병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교황청이 벌인 전쟁에 나가서 많이 죽고 시체들이 스위스로 돌아오면 그들의 젊은 과부들이 통곡하는 것을 본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용병제도로 돈을 벌고 있던 쯔리히 정부와 상인들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는 당시 자본가들이 평균 50% 이상의 높은 이자를 받고 이자놀이 하는 것을 단죄하고 빈민들에게 기본식량을 제공할 것을 주장하고 가톨릭 교회가 자본가들과 짝이 되어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쯔빙글리는 교구와는 관계가 없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이라는 유명한 순례지의 민간목회자가 되어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독일에서 루터가 95개 조항의 항의서를 발표하고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기 한 해 전인 1516년이었다. 그의 설교는 종교개혁 설교여서 대중의 환영을 받고 큰 도시 쯔리히의 민간설교자가 되었다. 이때 쯔리히는 비교적 부유한 도시였고 정치적 영향력도 컸다. 그는 이 도시에서 스위스 국민의 훌륭한 독립정신을 살려서 마치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처럼 자기의 개혁사상을 담대하게 설교했다. 그는 루터의 초기 책과 논문들을 읽고 동감하고 기뻐하여 그 책과 글들을 자기 지역에 보급했다. 그리고 교황청이 모든 신부들에게 주던 연금을 반납했다.
쯔빙글리는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모든 종래의 종교적인 의식과 행사와 교훈을 금하였다. 1520년 사순절 때 쯔빙글리는 사순절 행사를 묵인하였는데 쯔리히 시 당국에서 그 행사를 폐지해서 쯔리히가 속한 콘스탄스(Constance) 교구의 감독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이 되었다. 쯔빙글리는 1522년에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고 신부의 독신생활 제도를 철폐하고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 당시 신부들 대부분은 몰래 여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 또한 과거에 관계를 가졌던 한 과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성체성사가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서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반대하고 그리스도는 단 한번만 희생제물이 되었음을 가르쳤다. 1525년 부활절 절기 때 교회당에 있던 성자들의 형상과 유물을 다 철거하고 교회당의 오르간도 없앴는데, 찬송을 악기 소리의 지장 없이 부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설교가 중심이 되는 단순한 예배를 드리고, 수도원들이 가진 시설과 재산을 회수하여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게 하였다.
쯔빙글리의 개혁사상과 신학이 루터의 신학과 거의 모든 점에서 일치한 것은 두 사람이 다 신약성서를 읽고 성서가 가르친 대로 개혁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었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중세 말기 이 두 개혁자들이 아직 어렸을 때 영국의 위클리프와 체코 슬로바키아의 후스와 같은 개혁운동가들의 사상과도 같이 초대교회 시대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쯔빙글리는 루터가 독일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강력한 교권에 대항하여 고투를 벌이고 있어서 자기의 운동과 동맹을 맺고 공동 투쟁할 것을 루터에게 제의하였다. 그 전에 두 사람 사이에는 교신이 있었고 두 사람이 쓴 책과 논문을 서로 읽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루터가 쯔빙글리의 개혁사상이 자신과 대동소이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성만찬 신학에서 차이가 있었다.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피가 같이 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는 루터의 소위 공체설을 쯔빙글리는 반대하고 성찬식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예수가 떡을 쥐고 “이것은 내 몸이다” 또는 잔을 들고 “이것은 내 피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이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쯔빙글리는 예수가 “이것을(이 의식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쯔리히에 있던 재세례파 신도들이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이 더 과격한 자유교회 운동이 되기를 바랐으나 쯔빙글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부쳐(Bucer)가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쯔빙글리의 동료 불링거(Bullinger)도 중간 역할을 시도하였다.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두 사람의 공조(共助)를 바라서 1529년 9월 5일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 시의 산성의 큰 회의실에 두 사람이 각각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회동하였다. 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루터의 동료 멜랑히톤과 부쳐와 쯔빙글리의 동료 불링거가 사전에 만나서 이 회담에서 논의할 중요한 개혁신학 15항목을 설정한 것을 두 개혁자 앞에 내놓았다. 두 개혁자는 한 조항씩 검토하고 14개 항목에는 이의가 없어서 합의하였다. 그런데 한 항목 성례전 신학에서 두 사람은 의견이 달라서 합의를 얻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가 로마가톨릭교회와 투쟁하는 마당에서 연합전선을 펴지 못하고 각각 따로 고투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불링거와 그 밖의 동지들이 합세해서 스위스에서 다른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교세가 우세한 주들이 연맹을 만들어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쯔리히는 작은 한 독립 자유도시여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을 지원할 만한 강력한 군대력을 갖지 못하였다. 가톨릭 연합군이 쯔리히를 공격하였을 때 양편 군인이 전쟁터에서 맞섰다. 작은 스위스 나라에서 양편 군인들 중에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었고 친면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크게는 같은 스위스 민족이어서 총칼을 들고 싸울 수 없어서 양편이 갖고 있던 빵과 우유를 서로 나눠 먹고 헤어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1531년에 수가 많은 연맹군이 갑자기 쯔리히를 급습해서 소수의 쯔리히 군대가 다 카펠(Capel)에서 응전했으나 패전하고 이때 전쟁터에 군인들과 같이 나갔던 쯔빙글리는 체포되어서 그 자리에서 화형을 받고 그의 시체는 재가 되어 강물에 뿌려졌다. 루터가 이 소식을 듣고 쯔빙글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성직자가 친히 검을 쥐고 전쟁에 나갔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라고 말했다.
쯔빙글리가 개혁한 쯔리히 교회는 그의 사후 헨리 불링거(Bullinger, 1504~1575)가 지도해가다가 칼빈과의 합의를 통해 제네바 교회와 연합해서 스위스의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되었다. 쯔빙글리가 자기의 개혁사상을 여러가지 저서로 발표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에 관하여」(1522), 「67개 논조」(1523),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해석」(1525) 등이 있었다.
그는 루터보다 3년 먼저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끝냈다. 쯔리히는 스위스 서쪽에 위치해 있어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제네바는 반대쪽에 있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학교교육을 강조하고 학교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하여 사회의 윤리적 변혁을 추진하였다. 이 점에서 쯔빙글리는 루터와 달랐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설은 세속정치지도자들이 교권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한 이론이 되었지만 교회 성직자들이 정치사회에 참여하도록 하는 이론이 아니었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목회자들이 다양한 학문을 배워서 질적으로 향상되도록 지도하였다.
쯔빙글리의 죽음을 루터가 비평했지만 쯔빙글리는 “나는 신학적 근거와 민주적 근거에서 칼을 들었고, 모든 교회는 복음에 상반되게 행동해서는 안 되며 상실된 복음의 회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여기서 상기시키는 것은 교회의 전쟁윤리 곧 ‘정당전쟁론’이다. 그것은 방위를 위한 전쟁을 정당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당방위 전쟁일지라도 성직자가 칼을 들어야 하냐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다.
쯔빙글리가 독일의 루터에게 종교개혁운동을 연합해서 전개하자고 제안한 것이 신학적 몇 가지 차이 때문에 실패했지만 쯔리히의 에큐메니칼 또는 연합정신이 잘 나타났다. 독일의 부쳐와 멜랑히톤과 그 밖의 지도자들이 두 개혁자의 연합을 원했지만 성만찬 신학의 차이를 이유로 분열되었는데 칼빈은 두 사람의 이론을 절충한 이론을 제시한 것 같다. 아무튼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사후에 그의 후계자들이 칼빈과 하나가 되었는데 개혁교회의 앞날에도 최초의 개혁교회의 본을 받아야 개혁교회의 에큐메니칼 일치가 성사될 것이다.
쯔빙글리가 죽은 후 불링거 등 동지들의 노력으로 스위스 교회가 개혁되어가서 1536년에 ‘제 1 스위스신앙고백’ 28개 항목이 작성되었다. 이 신조는 바젤, 쯔리히, 베른 등의 개혁운동의 결실이었다. 이 신앙고백은 쯔빙글리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성찬식 때의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육체로 변해서 그 자리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임재의 거룩한 표징 또는 상징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는 다르다.
이 고백에서 제일 먼저 성서에 관하여 고백하는데 성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고 성서는 성서 자체가 해석하여준다고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은 신앙의 문제들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칼빈이 제네바에 오기 조금 전에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