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4:7~11
설교문
죤 비비어 목사의 [은혜]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도시에 큰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온 사방이 폐허가 되었고 전기가 끊어졌고 식수도 다 끊겼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식수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찾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군대를 동원해서 대형 탱크차로 물을 가득 실어 와 시민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군 당국은 얼마든지 받아갈 수 있도록 빈 통을 가져오라고 시민들에게 말했습니다. 군 당국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갖가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풍 전에 근처 편의점에서 샀던 큰 음료수 컵을 들고 탱크차에 왔습니다. 받아간 물은 겨우 1리터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빈 우유통을 가져와 4리터의 물을 받아갔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40리터나 들어가는 양동이를 들고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픽업 트럭에 욕조를 싣고 와 160리터의 식수를 받아 갔습니다.
욕조를 싣고 갔던 사람이 집에 돌아왔는데 하필이면 그 옆집에 음료수 컵에 물을 받아온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컵을 들고 갔던 남자는 옆집에서 물을 160배나 받아온 것을 알고는 화를 내고 시당국에 항의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물을 이것 밖에 주지 않습니까? 왜 내 옆집은 그렇게 많이 줍니까?”
그러자 식수 공급에 책임 진 장교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민들이 받아 갈 수 있는 만큼 능히 물을 줄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왜 더 큰 통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3:20)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느냐가 곧 우리가 가진 통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우리의 실제 믿음의 분량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크고 방대하든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도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만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체험은 하되 그분의 모습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하나님을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어 안타까워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볼 사람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따르고 있던 예수의 제자 빌립이 예수와 함께 3년이나 동고동락해 놓고도 예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들도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다면 전도는 얼마나 쉽겠습니까? 빈기독교 세력을 제압하고 전 세계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보일 수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빌립에게 영적인 말씀으로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서 여기 참석한 온 성도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당신을 동일시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의 대답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9절). 예수님과 하나님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 생활을 하다가 시골 선지자로 나왔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동일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그의 가르침이 권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종교학자들과 제사장들, 서기관, 바리새인들 중에는 위대하고 존경받는 스승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한낱 목수인 예수가 그런 참담한 말을 하니 예수를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스스로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그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사이비 교주들 가운데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거나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 거짓입니다. 혹세무민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과 물질을 도적질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이비 교주, 이단의 교주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이 분에 대해서는 그가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예언되었고 그분의 말씀은 모두가 진리로서 지난 2천년 동안 증거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산 사람이나 민족은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읽으면서 들으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말씀을 통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의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당신의 행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1절).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나면서 보이지 않는 맹인, 앉은뱅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 38년 된 병자 등을 일으켰습니다. 한번은 여리고성 어귀에 사는 한센병자 10명을 말씀 한마디로 다 고치셨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이러날 수 있습니까? 지금도 한센병을 치료할 수 없는데 이런 병이 어찌 한마디 말에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되십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예수께 상당히 실망한 듯합니다. 그는 예수에게 세례를 주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러 올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하였고,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하였습니다. 이미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례 요한은 짐작했습니다. 그 짐작을 확인시키듯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음성을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런데 그가 의로운 일을 하고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두 제자들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7:19)고 묻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메시야임을 증명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치의 병을 고쳐 주신 것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절망과 슬픔에 잠긴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고 참 평안과 쉼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바람과 비라도 꾸짖어 잔잔케 하셨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이분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야 말로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입니까?
3.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물주 창조주이십니다. 이런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지상에 내려오셨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잘 것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질문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살리는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분이라고 하면 이해합니다. 인간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배반하는 인간을 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징계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무력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죄와 허물과 실수 때문에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거우면 하나님이 대신 죽음을 택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단한 희생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를 믿는 자들은 십자가로 모든 죄와 허물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의롭다’는 말씀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허물을 용서받아 우리는 흰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 공사는 몇 단계 공정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리를 절반 쯤 공사 하는 동안 사고로 근로자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안전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공사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전하게 공사를 진행하자는 여론이 일어 당시로서는 매우 큰 비용인 10만 달러를 투자하여 대형 그물받이를 설치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절반 공사에서 불과 근로자 10명이 공사 중 추락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물받이 덕분에 생명을 건졌다고 합니다.
후반 공사가 훨씬 더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전반기 공사보다 더 적은 인원이 추락사한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험이 축적 되어서 근로자들이 작업에 더 능숙해서가 아니라 다리 아래 그물받이가 설치되었다는 안정감(sense of security)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인생의 영원한 그물받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가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를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본받아 허리를 숙이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생명을 구원 받았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여 그 생명의 복음을 세상에 전력을 다하여 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