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오늘 교회의 “우선과제(優先課題)”

시편 121:1-2와 사도행전 17:22-25를 중심하여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시편 121: 1-2는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던지는 “질문”과 이에 대한 교회의 “답변”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표적 성서본문입니다: “내가 산(山)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만 온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그 물음에 대하여, “나의 도움은 산(山)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온다.” 라고 응답하고 있는 이 명쾌한 물음과 대답의 관계는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성(宗敎性)의 본질을 총 집약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교는 바로 이러한 물음, 즉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행 17:22)라고 칭찬한 그 아테네 시민들에게 사력을 다해 전파한 그 메시지(행 17:22b-31)도 또한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하여 해야 할 그 <우선과제>를 위의 시편 시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설파했습니다. 즉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니라.”(행 17:24-25)라고 한 바울의 이 메시지는 부활신앙을 거부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운집(雲集)하고 있는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행한 전도설교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과연 “종교”는 그리고 오늘의 교회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이 세상 의 물음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느 신학대학의 한 교수님은 <과학과 신학>이라는 과목의 강의 도중에 돌연 분위기를 바꾸어 격앙된 어조로 ‘종교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물은 다음, 곧 이어서 그 교수님은 ‘과학’만이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무신론”이야 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인간의 자기고백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산(山)을 향해 눈을 들고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묻는 물음에 대하여 그 교수님은 “나의 도움은 <종교>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으로부터 온다.”라고 대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오늘의 기독교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어느 일간신문의 종교 란에는 외형으로는 서로 대조되는 것 같이 보이는 두 개의 기사(記事)가 나란히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7만 명 교인을 자랑하는 강남 소망교회의 전 현직 목사 계파 사이의 내분사태를 소개하고 있는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진보신학의 세계적 프론티어로 잘 알려진 뉴욕 유니언(Union) 신학교의 폴 니터 교수를 초빙한 '종교 간 대화'를 주제로 한 토론회 장면을 소개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기사가 모두 인간의 궁극적인 물음인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산(山)을 향하여 묻는 인간들의 고뇌에 찬 그 실존적 물음에 대하여 위의 두 성서본문이 대답해주는 것과 같은 그런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기사의 경우는 이러했습니다. 소망교회라는 그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나아가야할 그 본래적 사명인, <하나님 증언>이라는 본원적 사명(우선과제의 실행)에는 실패하였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범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사는 오늘의 교회들이 <하나님 증언>에 대한 확신을 잃고 도리어 교회선교의 최대원수인 교회물량주의를, 마치 적(敵)과 함께 동침하듯, 그 교회물량주의라는 악(惡)을 교회의 본질적 과제로 잘못 확신하고! 그쪽으로만!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거기에는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악한 ‘교회주의’ 라는 이데올로기가 오늘 교회의 세계에서는 절대적 대세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두 번째 기사도 첫 번째의 것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폴 니터 교수를 초빙한 “종교 간의 대화” 문제에 관한 토론회는 분명 외부 포장도 그럴듯하고 그 내용도 또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이와 관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 간의 협력>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망교회 문제와는 그 격(格)이 전혀 다른 매우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는 일은 비록 의미 있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이젠 거의 해묵은 낡은 과제에 불과할 뿐입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좀 더 본원적인 문제를 파고들면서, 니체, 러셀, 도킨스, 호킹 등등이 이끄는 <무신론 선교운동>과 같은 사조(思潮)와의 대결을 통해 <하나님 증언>의 근본문제를 본격화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간에 그들 모두가 우리 신앙의 진정성을 증언하는 일보다는 모두들 그 본질과는 무관하게 그저 외곽을 <현학적으로만> 겉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자기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종교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구나 하는 자괴지심(自愧之心)마저 듭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도 또한 불교가 아니며 이슬람도 역시 그러해서, 모두가 다! 자기 본질을 잃고 그저 외곽을 형식적으로 겉돌기만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왜 종교가 따로 존재해야 하고 또 필요한가? 라는 질문까지 생기에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 한 복판에 서있는 한 교회의 간판에는 <예수교회>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바로 옆 자리에 또 다른 교회건축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새로 짓는 교회간판은 놀랍게도 <참 예수교회!>라는 이름으로 내걸렸습니다. 참으로 “저질의 희가극”을 연출한 셈입니다.

교회건물들은 이렇게 수퍼마켓 늘어나듯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지만 이 시대를 향하여 그 <존재이유>를 분명하게 증언하는 진정한 교회는 거의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나?”라고 하면서 교회를 찾아가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그들 중 십중팔구는 그 곳이 처음엔 교회인줄만 알았다가 얼마 후엔 모두가 그 본질에서 떠나,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모순은 아무리 극복하려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사람들은 그만 저 사악한 <교회기업화 현실>에 안주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일에는 교회 스스로도 전혀 나서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듯이, 이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도 또한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는 형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대답은 오직 하나! 오늘 교회들이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시편 본문이 말하는 “나의 도움”이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성서가 반복적으로 설명한 바에 의하면, 그 말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즉 이 시인은 여기서 “인간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그 대답을 얻으려고 ‘산’(山)들을 신(神)인양 우러러 쳐다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산(山)에서부터 혹 나의 구원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은 너무 높고, 인간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쉽게 잡히지 않아서 사람들은 “구원”(救援)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없는 오늘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이 지구상의 종교들이 그 <본질에서 이탈하여!> 비(非)본질로 떨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그 분명한 증거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등등이 하나같이 범해 온 ‘경전이탈’!이라는 현상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40년 전 제가 대구 성락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팔만대장경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불교 학자인 경북대 교수 한 분을 초청하여 특강을 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내린 결론은 “오늘의 한국 불교는 경전불교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독교도 또한 “경전기독교”가 아니라는데 근본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들이 비록 사경회도 자주 하고 또 최근에는 교회마다 갖가지 형태의 성경공부 프로그램도 개발, 도입하고는 있지만, 진짜로 우리의 경전인 ‘성서’를 공부하고 해석하고 연구하여 그것에서부터 <구원의 길과 생명의 길(눅 10: 25b)을 찾아내려는 각고의 노력을 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그 점이 문제입니다. 유대교의 그 “실패한!!” 망국적 <쉐마교육>(소리 내어 읽고 또 열심히 듣고 암기하는 주입식 교육)의 메커니즘만을 흉내 내면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애절하게 “율법조문(문자[文字])은 죽이는 것”(고후 3:6)이라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경구절을 조문 외우듯 암기만 하고 또 성서 문자를 부적처럼 가슴에 붙이기만 하면 축복이 자동으로 축적되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어서 오늘 교회는 분명 <나의 구원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보다 근본적인 진리는 정작 바르게 증언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라고 교회를 향해 애타게 묻지만 교회는 끝내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신학계도 종교계도 아닌, 영화계가 불쑥 나서서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몰이를 한 저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고전 영화를 통해서, 그것도 엉거주춤하게 주인공 마리아의 입을 빌려서, 정말 바보인양, 수도원 주변의 산들을! 쳐다보며 그리고 정말로! 그 산들에게서 “나의 도움”을 요청하고는, 그리고는 정말로! 산들을 향한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얻어서 독일 나치 헌병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각색하여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주인공 마리아가 스위스의 알프스 푸른 산 능선들을 타고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니며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산들을 드높여서! 찬양하는 뮤직 드라마를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고전적인 뮤직 드라마는 그만 허망하게 불경스러운 희가극으로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산”들이 실제로 주인공 마리아의 구원기도를 들어 준 것은 결단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의 증언은, 비록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잘못된 각색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허구(虛構)”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J.F.D. Creach, "Psalm 121" Interpretation, Jan. 1996, vol. 50, No. 1, 47-51). 급기야 그 영화는 상영되자마자 미국 신학계로부터 빗발치듯 비난을 받아 급기야는 서둘러 주인공 마리아의 기도내용 중에서 시편 121:1을 삭제하는 소동까지 벌였던 것입니다. 성서의 진의(眞意)는 결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대답은 단지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도움은 산들로부터가 아니라 산과 들, 그 모두를 지으신, 즉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이미 <성서>로부터 구원의 길을 찾아내는 일을 버렸기 때문에 이 대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서 속에 깊이 매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인 그 금광맥을 지상의 그 어느 교회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캐내려고 <땀 흘려 갱도를 힘들게 파고 있지는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장의 대선배이신 김재준 목사께서는 1953년 예장-기장의 분열 직후인 어느 날, 아직도 한국교회가 예장-기장의 간판 사이를 우왕좌왕하든 그 무렵, 전남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장로교회였던 광주 양림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실 때, 참으로 개척자적이게도, 평신도들과 감히 <질의응답>형식으로! 성서 공부를 진행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날까지도 <질의응답>의 토론형식을 통한 비평적 성경공부를 진행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볼 때, 김재준 목사의 이러한 사경회 방식은 놀라운 혁신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사경회에서 어느 평신도 한 분이 용감하게 김재준 목사께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 동정녀가 임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김재준 목사는 “거룩한 교회에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합니까?”라고 권위주의적으로 제지하거나 또는 어느 연예인 교회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처럼 유머 담긴 대답으로, 즉 “남편인 요셉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야단이야?”라는 폭소 짓게 하는 그런 임기응변의 기지(機智)로 그 난해한 대답을 회피하거나 하지 않고! 조용한! 말로, “그것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깊이 주석해보니 창조주 신앙 안에서는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라고 조용, 조용! 대답하셨고 그 대답은 너무나 “권위 있게”(마태 7:28-29) 들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김재준 목사의 증언은 우리의 신약 본문 사도행전 17:22-25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 17:23)나 매달려 있었던 저 그리스의 철학자들 앞에서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게 하신 분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인신 그 하나님이심”(행 17:24)을 자신 있게 증언한 사도 바울의 그 용기 있는 증언을 연상케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그 산(山)>이 만일, 시편 주석가들의 설명처럼, 물질주의와 섹스관능주의를 표방하는 가나안 바알종교의 신전 여인(神殿 女人=“커데샤”=聖娼)들이 엑스타시(ecstasy) 속에서 예배자들과 더불어 거룩한 성관계(性關係)를 하는 성소들(sex-cults)이 있는 수풀 욱어진 그 음란한 산언덕들(hill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테네의 그리스 철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그 산(山)>은 아마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 17:23)라고 하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이교 예배제단>, 즉 예수님께서 <저들 이방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들”>(요한 4:22)이라고 지적하신 바, 저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무신론자들이 때로는 “신”(神)이라고 부르는 그 <관념적 이데올로기> 또는 <불확정의 신 관념>, 이른 바, <신에 관한 그리스 철학의 궤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관념적인 신은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계시(自己啓示)를 통해서 체험된 하나님>만을 증언하여왔고 또 지금도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분 하나님은 홀로 천지를 지으셨고 홀로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김재준 목사의 그 소박하면서도 명료한 답변은 분명 <나의 구원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시편 시인과 사도행전 기록자의 증언이 진실이며 진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므로! 그러므로 <나[우리]의 구원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라는 이 증언(시 121:2)을 오늘 교회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아니, 니체나 버트란트 러셀이나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 등등과 같은 무신론의 전도사들에게까지도 <기독교 경전인 성서의 말씀으로!!> 자신 있게 그리고 권위 있게 해석하여 증언하는 그 일을 오늘 교회의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아직도 우리가 이 성서의 대답을 바르게 증언하는 일에 자신과 확신이 없다면, 그래서 만일 우리가 <구원선포의 길>보다는 여전히 <교회주의>만을 추구한다면, 확신하건대, 우리는 분명 참된 교회는 아닙니다.

 
―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여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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