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일간지에 실린 기사 한편을 읽고 마음이 무척 심란했습니다. <신자들이 견제 감시 역할해야>라는 제목의 기사인데 교회홈피에 어느 분이 기사를 퍼다 올리신 덕분에 보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를 포함한 주요교단들이 종교인의 범죄를 처벌하는 나름의 제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하고 교단의 신뢰하락을 걱정한 나머지 대부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는 신자들이 나서서 종교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기사를 읽는 동안 목사인 제게 두 가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움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기사에서 말하는 ‘종교인’은 다름 아닌 ‘목회자’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계종은 중앙행정기관인 총무원에 ‘호법부’를 두고 승려 감찰 역할을 맡기고 있다> <천주교도 추기경-주교-신부로 이어지는 엄격한 체계 내에서 교회법에 따라 신부 등을 처벌한다> <개신교는 장로교, 감리교 등 교단별로 윤리위원회를 두고 목회자 범죄를 처벌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결국 신자들이 나서서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종교인’의 범죄란 곧 승려, 신부, 목사, 즉 ‘목회자’의 범죄를 가리킵니다. 최근 하루가 멀게 터져 나오는 유명교회 목회자들의 성추문, 공금횡령, 사기, 폭행, 금권선거추문 등이 교회와 목회자들 전체의 신뢰와 위상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때 교회가 자정(自淨)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에 사회로부터 이런 낯 뜨거운 주문마저 받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목사로서 몹시 부끄럽고 깊은 자괴감을 느낍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두 번째로 제 마음에 찾아든 것은 깊은 모욕감입니다. 기사의 제목 <신자들이 견제 감시 역할해야>가 말해주듯이 목회자는 이제 신자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잠재적인 범죄자’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는 현실이 부끄럽고 서글픈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제 기분을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주문이 교회 안에서조차 바람직한 교회개혁의 방향으로 여겨지고 신자를 계몽하는 가르침으로 당당하게 주장되는 현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게 최선입니까?’
교회법은 목사를 포함한 신자의 범죄를 책벌할 수 있는 치리와 재판권을 당회와 노회, 총회에 주었습니다. 당회의 구성은 목사와 교인(신자)의 대표인 장로로 구성됩니다. 대부분의 조직교회의 경우 당회는 목사 1인과 다수의 장로로 구성됩니다. 목사를 포함한 교인의 범죄를 감시하고 예방하며 유사시 처벌하는 교회안의 제도와 기구에 신자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사실은 교인(신자)의 대표인 장로가 수적으로 우세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회의 경우는 당회가 구성된 조직교회와 그렇지 못한 미조직교회가 있기 때문에 총대 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총회의 경우는 목사와 신자의 대표인 장로 총대가 절대 동수(同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마치 목회자의 범죄를 견제하고 감시할 권한과 역할이 목회자들에게만 주어져 있어서 제식구 감싸느라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황을 인식하는 것은 최소한 개신교회의 현실과는 다릅니다. <처벌받는 쪽과 처벌하는 쪽이 모두 같은 교단 동료이다 보니 엄정한 처벌이 불가능하다> <윤리위원회도 평신자를 포함시키면 종교인 범죄에 대한 자정 효과가 훨씬 커질 것>이라는 기사의 주장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미 교회는 재판국이든 윤리위원회든 ‘종교인’의 범죄에 대해 신자들에게 감시, 견제뿐만 아니라 심의, 재판, 처벌하는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회자들의 범죄행위가 신자들의 감시와 견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양 신자들더러 목회자의 범죄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에 나서라고 주문하는 것은 최근 목회자에 대한 신뢰의 실추와 사회적인 비난에 편승한 주장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주문이 신자에 대한 계몽의 옷을 입고 바람직한 교회개혁의 목소리로 주장되는 현실에 저는 깊은 모욕감을 느낍니다. 목회자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법과 제도, 역할이 부재(不在)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양심적이고 정직하게 법과 제도, 주어진 역할을 운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법위에 정치가 있다는 말이 잘 보여주듯이 교회법조차도 교회정치에 의해 너무 쉽게 무력화되는 현실이 바로 잡아야 할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같은 사람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얀네와 얌브레는 바로의 사주를 받고 모세가 행한 이적과 똑같은 이적을 행해 보였던 이집트의 마술사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적을 행한 반면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이적을 행했습니다. 같은 이적을 행했지만 동기와 목적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진리를 대적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며 입만 열면 예수, 성령, 교회, 부흥, 열방, 땅끝선교를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 실상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딤후3:5) 누구입니까? ‘돈을 사랑하며’, 오늘 교회를 금권선거, 횡령, 사기의 추문으로 물들이는 장본인들, 오늘의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자랑하며 교만하며’, 정치로 법을 무력화시키는 교권주의자들, 오늘의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사나우며’, 폭력도 서슴지 않는 교회지도자들, 오늘의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오늘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자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교회만 키우면 영웅대접해온 한국교회의 풍토가 지금의 목회자의 타락과 범죄의 온상입니다. 오늘 신자들은 목회자 일반을 부릅뜬 감시의 눈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문제의 ‘범죄자’들을 종교적 영웅으로 바라보아 온 눈길부터 거두어야 합니다.
글: 김성 목사(예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