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53)

칼빈의 스위스 종교개혁운동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최근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3장 칼빈의 스위스 종교개혁운동

1. 칼빈의 회심의 여정

요한 칼빈(Jean Calvin)은 1509년 8월에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칼빈은 항게스트(Hangest) 귀족가문의 가족과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살았는데 항게스트 가족은 프랑스의 종교적 및 사회적 개혁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그들이 토론하던 문제에 흥미를 갖기도 했다.

칼빈이 처음에 들어간 마르슈(Marche) 대학에서는 인문주의적 현대식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중세 말기의 ‘현대 경건’(devotion moderna) 운동과 인문주의 학풍에 따른 성서연구와 고전연구의 훈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대한 배움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대학에서 불과 수 개월 동안 배운 것이 그 후 그가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는 좋은 준비가 되었다.

칼빈은 1523년 말에 파리에 있는 몬태그(Montaigu) 대학에 입학하여 앞으로 4년 동안 공부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갔던 바로 그 달에 수도승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이단자로 단죄를 받고 산 채로 화형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루터의 저서와 소책자들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태우라는 정부의 명령이 내려졌다. 프랑스에서는 1519년경부터 루터의 저서들이 파리의 대학가에 나돌았고 인문주의 학자들이 그 책들을 읽고 있었다.

루터와 에크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논쟁한 문서가 1520년 파리대학에 입수되었는데 대학 당국이 그 문서에 대하여 15개월이나 견해를 밝히지 않았던 것은 유럽 전역에 신학적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521년 1월 3일에 루터가 파문교서를 받고 교황청이 그를 정죄한 후 석 달이 지나 파리대학 당국이 루터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파리대학의 인문주의 학파의 교수들은 여전히 루터의 서적을 읽고 연구하였고 파리대학 당국은 가톨릭 교회 정통주의를 견지하였다.

1523년 스위스 바젤(Basel)에서 루터의 ‘Betbüchlein’이란 책이 프랑스 말로 번역되었고 그 밖의 그의 복음적인 글들이 프랑스에 속속 들어와서 널리 읽혔다. 그리고 그 해 프랑스의 몇 명의 수도승들이 독일의 루터의 고장 비텐베르크 대학을 방문하였다. 프랑스의 대학가와 수도원에도 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어 갔으나 프랑스 정부와 교회는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으로 위협하였다.

칼빈이 몬태그 대학에 입학한 것은 그의 부친 제라르(Gerard)가 칼빈이 신부를 되기를 바라서 신학공부를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12세 때 이미 삭발을 했고 신부후보생에 등록하여 학비 보조를 받았다. 이 학교는 신학대학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대학이 ‘현대적 경건’을 표방한 ‘공동생활의 형제단’ 수도원의 경건훈련의 정신과 방법을 모방하여 신부 교육을 실시했으므로 칼빈도 그 학풍으로 훈련 받았다. 칼빈은 가난한 학생층에 속했으므로 ‘가난한 기숙사’에 입소하여 수업료와 기숙사비와 식비를 면제받았고 회색 교복을 입었다. 돈 있는 학생이 들어가는 ‘부유 기숙사’와 ‘가난한 기숙사’에 입소한 학생들은 엄격하게 구별되어 서로 왕래하거나 어울릴 수 없었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 「그리스도의 모범」이 가르치는 가난과 명상과 독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는 진지한 내면적, 영적 훈련과 엄격한 도덕생활로 단련 받았고, 반면에 중세적인 외면적 경건행위를 멀리하였다.

이 대학의 인문주의 학풍을 따른 교수들이 성서의 원본의 낱말들의 어원을 밝히면서 과학적으로 주석하여 가르쳤고,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모르고는 성서를 바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대학의 교수들은 당국으로부터 이단시되지 않았으나 루터파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자신이 프로테스탄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설교는 로마가톨릭적인 것을 반대한 것이 없지 않았다.

솔본 대학에서는 대학 당국과 개혁운동 교수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1524년 루터의 저서의 번역이 금지되었다. 1525년 10월에는 파리에서 종교개혁운동가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여 교수들이 독일로 피신했다. 1526년 5월에는 몇몇 교수가 화형을 받기도 했다.

칼빈은 1528년부터 1531년까지 오를레앙(Orleans) 대학과 부르주(Bourges)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부친 제라르가 교구 신부와 충돌이 생겨 칼빈이 신학공부를 그만두고 법률 공부를 하도록 권하여서 대학을 옮긴 것이었다. 칼빈도 부친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신학보다는 철학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이때 종교개혁 문제로 신학대학이 어지러웠다. 칼빈은 가톨릭교회의 미신적인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대학에서 그의 친척이며 노용의 동향인으로서 친근한 사이였던 올리베탄(Olibetan)이 얼마 동안 칼빈과 함께 이 대학에서 지냈다. 올리베탄은 종교개혁 과격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칼빈과 함께 이 대학에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1535년에 성서를 프랑스 말로 번역했는데, 그 책의 서문을 칼빈이 라틴어로 써주었다. 서문에서 칼빈은 올리베탄이 자기의 친척이며 오랫동안 친근한 친구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올리베탄이 자기에게 복음적인 사상을 말해준 일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다. 올리베탄은 박해를 피해 나중에 독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파리에서는 계속 교계와 대학이 시끄러웠으나 오를레앙 대학가는 조용하고 자유로워서 칼빈이 공부하기에 좋았다. 그런데 이 대학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자들이 와서 루터의 개혁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칼빈도 그들과 만나본 적이 있었고, 또 파리대학에서 피신하여 이 대학에 온 볼마(Wolmar) 교수가 인문주의 학문과 개혁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볼마 교수는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태어나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희랍어 교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볼마 교수가 칼빈이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하게 만든 공로자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에게서 희랍어와 다른 인문주의 학문을 착실하게 배웠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1529년 봄까지 공부하다가 부르주 대학으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이때 이 대학에 이태리에서 온 유명한 법학교수 안드레아 알키아티(Alciati)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학 역사의 대가였다. 칼빈은 그의 강의를 청강하였다. 알키아티 교수도 칼빈의 회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알 길이 없다.

칼빈은 1531년 3월에 파리 대학으로 돌아와서 신학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자기에게 법률 공부를 권했던 부친이 사망하였다. 칼빈은 여기서도 희랍어와 히브리어와 고전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 두 어학은 고전연구에 필요하였다. 그런데 1530년 즉 칼빈이 파리 대학으로 돌아오기 한 해 전에 솔본 대학 당국이 ‘교수 결의서’를 발행하여 이 대학 안의 인문주의 교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이때 신설된 로얄(Royal) 대학부의 인문주의 교수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대학부의 학장 니콜라스 콥(Nicholas Cope)은 에루스무스의 한 친구의 아들로서 인문주의 학자였다. 이들은 성서의 원문을 어휘의 어원적 의미를 밝히면서 문서비평학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에서 성서의 교훈과 다른 것들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루터주의자들로 의심받았다.

칼빈은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1532년 4월, 그가 23세였을 때 로마의 세네카의 저서 「관용론」을 주석하여 희랍-로마 고전학에 대한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는 것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책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을 인용하면서 세네카의 고상한 스토익 철학을 칭찬하였다. 이 책에는 복음적인 내용은 없고 당시의 논쟁거리였던 국가권력의 신적 기원과 왕정론과 사회질서 문제를 다루었다. 에라스무스도 세네카의 이 책을 주석하여 쓴 책이 있었다.

칼빈은 니콜라스 콥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돈이 필요해서 콥과 다른 친구들에게서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칼빈은 법률 공부를 끝내고 학위를 받으려고 1532년 오를레앙 대학에 잠시 갔었다. 이 무렵 칼빈은 소책자를 여럿 출판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세네카의 책, 호머, 키케로, 플루타크, 버질, 호래이스, 에라스무스 및 그레고리 1세 교황에 관한 소책자들이었다. 1533년에는 영혼불멸에 대한 연구로 「Psychopannychia」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그의 놀랄 만한 성서지식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칼빈은 이 책에서 재세례파 사람들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잠자는 상태에 들어간다고 믿는 것을 반박하고, 바로 하나님에게로 간다고 주장하였다.

1533년 11월 1일, 칼빈의 친구 콥이 대학의 연례 교수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대학 당국이 이단이라고 단정하고 콥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신학자가 아니었던 콥의 강연 내용을 칼빈이 써주었다고 잘못 알려져서 이때 칼빈도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 강연의 제목은 ‘그리스도교 철학’이었는데 예수의 산상수훈의 설교의 내용이었다. 칼빈은 파리를 떠나서 생통쥬(Saintonge)란 곳의 젊은 신부 친구 루이 듀 띨레(Louis du Tillet)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편안하게 지냈다. 띨레 신부에게 칼빈은 희랍어를 가르쳐주었다. 띨레는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유족하여 칼빈에게 경제적 도움도 주었다. 칼빈과 띨레는 신변의 안전이 우려되어서 1535년 1월에 두 사람이 같이 스위스 바젤로 가서 이때 칼빈이 탈고해 가지고 있던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때 칼빈의 나이 25세였다. 칼빈은 잠시 파리로 돌아가서 동생 앙뜨앙느(Antoine)와 여동생 마리(Marie)를 바젤로 데리고 왔다.

칼빈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회심을 가졌는지 밝히지 않은 채 그의 시편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회심이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자신은 부친의 뜻에 따라 법률공부를 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숨은 섭리를 통하여 내 코스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 그리고 “교황청의 미신”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것으로부터 “갑작스런 회심을 통하여 풀려났다.” 그리하여 참된 경건을 맛보게 되어 다른 공부에 매진하고자 하는 큰 욕망이 생겼는데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옛날 자신이 젊은 견습승이었을 때 순수한 교리를 지키고자 원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와서 배우게 해주었다. “나는 이 계획을 가지고 내 조국을 떠나서 독일의 어느 한적한 데 가서 내가 오랫동안 못 가졌던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칼빈의 회심에 도움이 된 사람이 그의 말대로 많았지만 칼빈의 제자이며 후계자가 된 베자(Beza)가 쓴 「칼빈의 생애」에서는 누구보다도 올리베탄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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