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칼빈의 제네바 정착
칼빈이 제네바를 거쳐 독일 스트라스버그로 가려고 1536년 6월 24일 제네바에 왔다가 그를 환영한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를 받아들여서 여기서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제네바 자유시는 칼빈이 오기 전부터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1534년 10월에 제네바는 가톨릭교회 감독의 정치적 세력을 꺾고 제네바의 정치적 자주를 쟁취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길을 텄다. 이때 종교개혁 설교자는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었는데 그는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하고 1532년 10월에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왔다. 그는 가톨릭의 미사제를 폐지하고 성당의 모든 형상을 철거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고 제네바 시도 그를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두 주 전에 제네바 시의 소위회 20인회가 정식으로 종교개혁운동을 상정해서 200인회인 총회의 승인을 얻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오기 전에 이미 그의 명성이 파렐을 비롯하여 스위스의 여러 종교개혁 동지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가 발행한 「기독교 강요」도 이미 시판되어 독자들이 많았다. 제네바에 있던 칼빈의 친구들이 그가 제네바에 도착한 날 그를 환영한 자리에서 앞으로 제네바에서 같이 일하자고 간곡하게 권했을 때 그가 완강하게 거부했다가 자기보다 20세 연상인 파렐의 경고를 받고 순응했다. 파렐이 칼빈에게 만일 당신이 우리의 간절한 요청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칼빈은 그의 말이 신탁으로 들렸던 것이다.
1536년 12월 말 칼빈은 제네바 시로부터 정식 교회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칼빈은 가톨릭교회 신부가 되기 위해 어렸을 때 삭발하고 신부지망자로 등록된 일이 있었으나 신부로 안수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제네바 시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정식 신부안수식도 없이 설교자로 임명했다. 칼빈은 학자로서 성경공부교사를 하며 지내기를 원하여 그것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 제네바 시의 종교개혁 의지는 확고하여 칼빈이 설교자가 되기 5개월 전에 개혁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유형을 받아 제네바 시로부터 축출된 사람도 있었다.
칼빈은 1536년 8월에 바젤에 잠시 갔다 온 후 바울 서신을 읽고 연구하는 성경공부반을 조직했는데 참석자 수가 의외로 많아 놀랐다. 파렐과 다른 동지들이 칼빈의 성서지식을 보고 경탄하여 1536년 11월에 새로 조직된 ‘목회자 회합’의 회원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칼빈은 종교개혁의 신학과 교회의 조직 및 지도에 관한 토론회에 자주 참석하여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게 되었다. 10월 5일 로잔(Lausanne)에서 열린 교리 문제 토론회에서 성만찬신학과 교회의 본성 문제와 믿음으로 받는 의인(義認) 문제 등을 토론하면서 그의 풍부한 성서지식과 정연한 이론 전개가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성찬식 때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강조하여 루터와 쯔빙글리와도 다른 의견을 발표하였다. 즉 루터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설과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다른 것이었다. 이 토론회에 참석한 독일의 개혁자 마틴 부쳐가 칼빈의 이론을 격찬하였다. 그는 칼빈보다 14세 연상이었다.
로잔 토론회 때 베른(Bern)에서 온 신부들이 칼빈의 신학이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칼빈의 삼위일체 이론을 거론했다. 루터와 파렐과 같이 칼빈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자기의 「기독교 강요」와 「신앙고백」에서 쓰지 않았다. 루터는 그 말을 설명하기 어렵다면서 다른 더 좋은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칼빈도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이 교리의 이해와 설명이 달라서 이단논쟁이 생겨 교계가 어지러웠던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칼빈은 가톨릭 측 신학자들과의 신학토론을 많이 갖게 되었고 제네바 시와 교회는 그를 따랐다.
칼빈은 제네바에 와있던 재세례파 신학자들과도 논쟁하였다. 당시 제네바는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홀랜드 등 여러 나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란해 온 사람이 많아서 신학사상의 자유도시처럼 되어 있었다. 재세례파 중에 메노(meno)파는 스위스에서 성하였다. 1538년 5월에 네덜란드에서 온 재세례파를 제네바의 시의회가 시외로 추방하였는데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긴 파렐과 칼빈도 이 일에 동조하였다. 재세례파는 신학적 공개토론을 희망하였으나 제네바 시는 이단자들과의 토론회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단자는 추방 아니면 사형한다고 결의하였다.
칼빈의 반대 세력이 제네바 시민들 중에도 있었지만 베른 시의회가 칼빈의 삼위일체 이론을 의심하면서 칼빈에게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제네바 시의회보다 강력한 조직력과 보수 세력의 지지를 가진 베른 시의회는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과 파렐의 종교개혁운동을 추종하는 것을 싫어했다. 제네바 시의 소의회는 늘 칼빈과 파렐을 지지하였으나 200인회는 중도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1538년 1월에 제네바 시의 200인회가 베른 시의회의 요청을 수용하여 제네바 교회 목사들이 이단자들을 수찬 정지시키고 파문(출교)하는 것을 못하게 결의했다. 이것은 목사들의 성직권을 시의회가 정치적 힘으로 박탈하는 것이어서 칼빈과 파렐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교회가 정부의 간섭에서 자유하도록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비록 제네바 시의회가 종교개혁운동을 지향하고 제네바 교회에 협력하고 있지만 교회 성직자들의 교권에 간섭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칼빈과 파렐의 종교개혁운동이 다소 엄격한 것이어서 제네바 시민들의 반대가 처음부터 없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든 제네바 교회 헌장에 반대자들을 출교처분 하는 엄격한 조항들이 있어서 그동안 여러 사람이 출교 당하였다. 그리고 제네바 시와 교회의 정교분리를 주장한 칼빈이 시위원들의 미움을 산 것이다. 그리하여 1537년 2월에 있었던 제네바 시위원 선거에서 칼빈 반대세력이 이겨서 칼빈의 반대자 수가 많아졌다.
칼빈의 지지세력이 약화된 가운데 1537년 9월 베른 시에서 여러 나라의 신학자들이 모인 국제 신학토론회가 열렸다. 이때 그들은 삼위일체의 신학적 이론도 합의를 보았고 성찬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칼빈의 이론에도 합의하였다. 이것은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설에 가까운 것이었고 쯔빙글리의 단순한 기념설과는 달랐다. 이렇게 하여 중요한 신학적 쟁점의 합의를 도출한 칼빈의 공로가 크게 드러났다.
칼빈의 이러한 신학적 영향이 커갈수록 반대세력은 칼빈을 제네바에서 축출할 궁리를 진전시키고 있었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제네바 시의원 선거에서 칼빈의 반대세력이 승리한 후 베른 시의회는 제네바 시의회가 베른의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을 수용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제네바 시의회는 제네바 교회가 철거했던 세례대를 교회당 안에 다시 설치하고 성찬식의 떡을 누룩 없는 떡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네바 시의회가 교회의 교권을 좌우하게 되었고 제네바 교회 목사들이 시의 정치에 간섭 못하게 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제네바 시는 칼빈이 설교 중 제네바 시의회를 겨냥하여 “악마의 의회”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가려내려 하였다.
제네바 교회의 한 목사 코우라우드(Couraud)가 베른 시의 신조와 성례전 의식에 반대하다가 설교금지 조치를 받았다. 칼빈과 파렐은 여기에 항의하였고 베른 시의회와 칼빈과의 화해 요청이 있었지만 칼빈이 배격하였고 베른 시가 만든 14개항 신조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칼빈은 제네바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젤에 가서 신학연구를 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사실상 제네바 시는 칼빈을 축출한 것이고 파렐도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1538년 4월 제네바 시의 소의회와 200인회와 시민전체회의에서 칼빈과 파렐의 추방이 결의되었다.
칼빈에게는 슬픈 일 두 가지가 있었다. 그의 형 찰스(Charles)가 늘 이단 신부로 의심을 받으면서 프랑스에서 목회하다가 1537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 듀 띨레(Du Tillet)가 칼빈에게서 떠났다. 그는 칼빈이 파리를 탈출해서 먼저 찾아간 친구였고 자기 집에서 오래 은신한 칼빈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함께 그의 고향을 떠나 바젤을 거쳐 제네바로 와서 칼빈과 같이 있으면서 목회하였다. 그런데 그가 칼빈 곁을 떠나면서 긴 편지를 썼다. 온건한 개혁사상을 가진 신부였던 그가 칼빈의 2년 동안의 개혁운동을 지켜보면서 가진 비판의 편지였다. 띨레는 칼빈이 정식으로 신부 안수, 취임식도 거치지 않은 채 평신도로서 교회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어 성직을 수행한 것이 첫째 가는 거리낌이었고, 다음으로 칼빈의 개혁운동이 너무 급진적인 것에 비판적이었다. 띨레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함께 교역하면서도 한 번도 요직에 앉은 적이 없었고 칼빈의 운동의 방관자처럼 지냈는데 그것이 칼빈의 처사였는지 아니면 띨레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띨레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가톨릭교회에 복귀하여 신부로서 여생을 보냈다. 띨레는 제네바를 떠나는 칼빈에게 편지에서 말하기를 프랑스로 돌아와서 같이 일하자고 하면서 칼빈에게 넉넉한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