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4:15-17절
설교문
유대인 출신의 뛰어난 작가인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 1797-1856)는 그의 조상의 종교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척추마비로 고생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다른 쪽 눈은 눈꺼풀이 마비되어 무엇인가를 보려면 눈꺼풀을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하이네는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면서 지칠대로 치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마지막으로 밀러의 비너스를 보고 싶어 발을 질질 끌며 루브르 박물관까지 갔습니다.
그는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있는 넓은 홀에 들어서서 비너스 여신 앞으로 가 쓰러져 오랫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누워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비너스 여신이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비너스 여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나는 팔이 없어서 당신을 도울 수 없는 것을 모르세요?”
우리의 시대는 우리를 돕는 것들이 많습니다. 과학과 현대문명 등 대단한 문명의 이기가 우리를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편안한 세상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방문합니다.
삼성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쓴 우리나라의 교수들은 하버드 대학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초청 섭외 1순위에 오른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세계에서 주목 받을 만큼 눈부신 발전과 진보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그리 장미 빛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 그중에서도 학교문제는 청소년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노동소득분배율 수치는 점점 악화되고 있으며, 전 세계 시장에서 소니를 물리친 삼성은 그들의 공장에서 백혈병 걸리며 일하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역시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독감처럼 퍼지는 우울증 같은 정신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탐욕과 정욕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리의 가슴은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팔’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너스의 팔을 찾고 있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팔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팔을 찾는 것 자체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참으로 인간이 의지할 팔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스승을 따르며 제자훈련을 받아 매일 감격적인 사건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와 동행했던 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떠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선장을 잃고 파선하여 어떻게 할 줄 몰라 당황해 하고 있는 아직 숙달되지 않은 선원들과 같았습니다.
더욱이 제자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타락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험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을 대신해서 제자들과 함께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그 당시 서릿발 같은 로마 권력과 유대 종교 권력들 앞에서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여 결국 지상 최고의 권력인 로마의 심장부를 그리스도 복음으로 정복해 버렸습니다.
오늘 이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도 보내 주셔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은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또 다른 보혜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는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란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로서 ‘곁에’ 라는 말과 ‘부른다’는 말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보혜사(保惠師)는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은혜로 지키고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재판정에서 피고를 돕기 위해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 큰 어려움에 직면한 죄수를 보호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어려운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언해 주는 사람, 사기가 떨어진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 낙망하고 좌절에 빠진 자를 일으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 등 그 뜻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엄격하다고 합니다. 자녀가 밖에서 놀다가 안식일을 범하고 온 날에는 아버지가 용서하지 않습니다. 회초리를 가지고 자식을 사정없이 내려칩니다.
어떤 아버지는 회초리 정도가 아니고 몽둥이로 치는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 때 엄마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아버지의 율법 교육은 당연한데 자녀가 몽둥이로 맞으니, 잘못하다가 불구자가 될 것 같아 안절부절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매 맞는 아이를 끌어 안고 아이를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여보, 당신의 매질은 당연해요. 아이를 사랑해서 매질하는 것은 제가가 알지만 이러다간 우리 아이가 다치겠어요. 제발 매를 좀 거두세요”
그리고는 자식의 등짝을 후려치면서 “이놈아, 빨리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어라, 빨리 무릎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하고 아이를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빕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진노를 피하도록 합니다. 이런 엄마의 역할이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죄와 허물과 실수를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회개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엿이 설 수 있도록 감동을 주며 새롭게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보혜사 성령의 감동에 예민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켜 주십니다.
2. 성령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앙적인 면에서만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도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운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베풀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역사 안하시는 곳이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것을 제거해 주시며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시며 패배에서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이 노력한 부문에서만 활동하면 그 반경이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는 보통 일차원이나 이차원의 세계에서 삽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반경은 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삶만을 인정하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만 만족하기 쉽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책에서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도덕성을 잘 유지할 수 있다 할지라도 비도덕적인 사회에 들어가면 근본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단면을 보더라도 인간이 구조적인 병폐 속에서 얼마만큼 무력한 존재인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결연한 신앙은 신선한 도전을 우리에게 줍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첫째,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상류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와 학문이 뛰어나고 장래 인류 역사를 미리 내다볼 줄 아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조국 이스라엘은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중에 다니엘도 끼어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은 자유가 없는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하는 생활을 살았습니다. 강대국의 포로가 되었을지라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양심과 신앙을 지켜 영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둘째, 절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1:8). 다니엘은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했습니다.
왕이 국비 장학생으로 이스라엘 청년을 합숙훈련시키는 데 왕궁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앙적 양심에 따라 채식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다니엘은 진수성찬을 거절하고 스스로 채식을 했지만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단1:12-13). 그렇게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한 결과 고기를 먹은 본국 청년보다 얼굴이 더 좋아진 것입니다. 이처럼 절제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이상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적 의욕이 분명하다는 증거입니다.
셋째, 다니엘은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의 고위 관리들이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다리오 왕이 삽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는 금령을 내리게 했습니다(단6:7).
그러나 다니엘은 만일 왕의 명령을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법이 공포된 것을 알면서도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핍박과 제재가 있어도 개의치 안고 환란과 시험이 와도 굽히지 않고 분명한 신앙을 다니엘은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고발되어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도 사자들은 다니엘을 잡아먹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본 다리오왕은 다니엘을 더 높여 전국을 통치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승리케 해 주시는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한 환경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할 때 새 힘을 얻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향한 창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열린 창은 하늘과 연결되었습니다.
우리 심령의 열린 창으로 하늘의 신령한 빛이 들어오고 천국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역경 중에 기도해야 합니다. 번영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위험에 처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좌절 중에 낙심치 않고 인내하는 신앙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니엘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면 평화롭고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음악도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마침 파바로티 콩쿠르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마감되어 1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서 “한번 다시 연락해 보아라”고 해서 콩쿠르 사무처에 전화 연락을 해 보았는데 지원 원서를 하루만 연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녀는 콩쿠르 지정곡인 아리아를 맹연습하고 혹시 몰라 이중창곡인 라보엠을 같이 연습했습니다. 콩쿠르 날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정곡 아리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파바로티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뛰어 나오더니 “당신이 이 콩쿠르에 나와 주어 너무 고맙습니다. 나와 함께 이중창곡 하나 불어 봅시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너무 놀랐습니다. 파바로티가 “당신이 이중창곡을 선택하세요”하자 그녀는 라보엠을 선택하였고 두 사람이 함께 환상적으로 라보엠을 불렀습니다.
그녀는 그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그 후 세계 유명한 무대에 파바로티와 함께 서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멋진 역사입니다. 이분이 그 유명한 김영미 교수입니다.
김영미 교수에게도 함께한 성령의 승리케 해주시는 역사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제가 만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명동촌에 가서 김약연 목사가 목회하셨던 명동교회를 방문하여 그분의 위대한 족적을 보면서 그런 위대한 목사가 되지 못한 저의 삶을 많이 반성했습니다.
일제 말엽 김약연 목사는 예수를 영접하여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민족의 해방과 미래는 교회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많은 젊은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학교가 바로 명동학교입니다. 그 학교는 김좌진, 나운규, 윤동주, 문익환 등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김약연을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어 이 나라 역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했습니다.
진리는 혼자 사유화시킬 수 있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을 변화시키고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부요를 주시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진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여 세상을 구원하게 합니다. 이 진리를 사모하여 그리스도의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그 무엇이든지 순종할 때 성령의 역사를 매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여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