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주제는 5.16 군사정부의 유신체제 하에서 큰 수난을 받고 있던 1960-70년대의 한국신학대학의 수업시간에서도 온갖 논란을 야기 시켰던 주제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당시 한신대에서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의거한 정의개념이 논의의 대세를 이루고 있어서, 사회정의라는 이슈는 마이클 샌델의 변증법적 정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문맥 안에서 갈등과 고뇌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신대의 젊은 지성들에게는 당시 사회정의를 짓밟는 유신이념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불의로 확고하게 규정되었고, 유신이념에 대한 동조는 물론이고 유신 이데올로기에 대한 털끝만큼의 동정이나 관용도 또한 무조건 불의 또는 악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신대 신학생들은 그들이 절대 악(絶對 惡)으로 규정한 유신이념에 혹 적극적으로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 때문에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정신까지도 어용논리라고 하는 주장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그런 유형의 논의가 또 하나 나타났는데, 이른바, 가톨릭 정의구현 사제단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최근 천안함 사태 및 연평도 사건에 대한 이해 때문에 국민들 간에 국론 분열적인 좌 우 이념대결이 극대화될까 염려하여 추기경이 직접 나서서 어느 한 쪽으로든 너무 치우치지 말기를 국민들께 권고한 것에 대하여 그 사제단이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추기경의 시국관이 정의구현 사제단의 좌 편향적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어용(御用)이 될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그러나 한 야당 국회의원은 이러한 정의구현 사제단의 입장을 오히려 비판하면서, “진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남한에서 그러지 말고 북한으로 가서 순교할 각오로 북한 동포의 인권을 위하여 싸우라”고 맞받아치고 나왔습니다. 이 경우에도 소위, ‘정의’에 대한 이해란, 관점에 따라선,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있는 가운데 하버드대의 20년 연속 최고의 명 강의록이라고 선전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2010년의 한국 독서계에 도도하게 등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자(膾炙)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 만큼 이토록 국가존립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지독한 이념대립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나 하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더욱 좌절케 하는 것은 흔히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일컫는 법조계의 현실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개탄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그 점입니다. 즉 2006년 4월 26일자의 한 일간신문에「나는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던 한림대 김인규 경제학 교수가 5년이나 지난 뒤인 금년(2011) 2월 14일자 신문을 통하여서는「나는 다시 고발한다, 법조계를!」이라는 글을 통해서 피에 맺힌 절규를 다시 하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인 민사소송의 80%는 가난한 민중들의 ‘나 홀로 소송’이고 나머지 20%의 대부분은 ‘전관예우의 악한 관행을 이용한 돈 많은 자들의 자명한 무죄보장 전제의 소송’이라는데, 이런 절망적인 ‘정의부재’의 한국 법조계를 보고서도 이 사회를 여전히 공정한 사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통령, 국회의원 그리고 법조인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정의부재’의 사회로 만드는 바로 그 주범들”이라고 비장하게 성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로, 시간 또는 세월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인간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의(義)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선 창세기 38장에 나타난「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성서가 말하는 ‘정의와 그 현실’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더 논의해 보는 것도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관한 증언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族長)이었던 유다는 가나안 복지를 향한 이주과정 중에서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중심 역할을 하는, 이른 바, 가문의 대(代) 잇기가 위기에 직면하자, 즉 첫 아들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되자, 족장 유다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레비리트 법에 따라,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은 맏아들을 대신하여 둘째 아들을 며느리 다말에게 남편으로 내어주지만, --Levirate law는 형이 대(代)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주는 관습법임, 신 25:5-10; 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40 참조-- 그러나 유다의 둘째 아들마저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창 38:9 참조). 그러자 유다는 남은 셋째 아들마저 며느리 다말에게 주었다가는 그도 형들처럼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하여 ‘셋째 아들이 성인(成人)으로 장성할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여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냅니다(창 38:11).
그러나 유다의 이런 조처가 한 지파의 족장으로서는 전혀 올바르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 곧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였음에도 그는 며느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셋째 아들을 남편으로 짝지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아무 죄도 없는 며느리를 마치 살(煞)이 낀 재수 없는 여인처럼 생각하여 셋째 아들이 다 장성하여 성년이 된 후인데도(창 38:12a) 며느리를 시가(媤家)로 불러오는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또 가문의 대(代)가 끊어질 이런 구원사적 위기를 아무 대책도 없이 방치(직무유기)한 채 오히려 그는 전혀 딴전만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아내가 죽자 곡(哭)하는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하는 이 중대한 일에는 조금도 관심 없이, 단지 딤나로 가는 길 가에 앉은 한 여인(cf. 렘 3:2; 겔 16:25b)에게로 접근하여, 그를 창녀로 잘못 알고(창 8:15), 탐욕스러운 수작을 거는 부끄러운 사내(창 38:23)가 되었고, 또 길가에 앉은 그 변장한 여인이 다름 아니라 가나안 종교의 ‘신전 여인’(가나안 신전[神殿]에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제의[祭儀]에 종사하는 성창[聖娼]; 창 38:14-22 참조)으로 위장해서라도 가문의 대를 이어 줄 속량자(‘꼬엘’)를 찾는 자(룻 3:9)가 되려고, 즉, 기울어져가는 시가(媤家)의 가문을 일으켜주기 위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레 20:10; 신 22:22-24)까지도 감수하고 변복(變服)하여 길거리에 나선 자기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은 이스라엘 족장으로서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범법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는, ①레 18:15에 의하면, 며느리를 범한 ‘성결법전의 위반자’가 되었고 또 ②출 21:7,14; 22:22에 의하면, 창녀와의 성관계를 금하는 ‘계약법전의 법도 어긴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야훼 신(神)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출 33:19 참조).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성관계라는 그 수치스러운 행위를 감내함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가문을 살리는 주역--가문의 대를 이어줄 속량자(꼬엘)를 발굴해낸 사람--이 되었고 또 유다 가문의 대를 출산하는 의(義)를, 즉 유다의 건장한 두 아들이 연쇄적으로 죽음을 당하면서 까지도 성취해내지 못한 그 일을 며느리 다말은 비록 이방인 여인의 몸이었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창 38: 18-19) 성취해낸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러한 의거(義擧)를 간음행각으로 오해하고 정죄하며(창 38:24), 또 마치 자신의 부끄러움(창녀와 관계를 가진 것)은 감추기라도 하듯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어깃장을 놓으며, 제사장의 딸이 간음할 때에나 벌을 내리는 화형의 극형(레위기 21:9)으로 다스리려 하는 그런 그 뻔뻔스러운 시아버지의 면전에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로부터 받은 몸값, 그러나! 그것은 결코 화대(花代; 해웃값)가 아닌! 단지 ‘꼬엘’(속량자, 대속자)의 신분증인 시아버지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창 38:18,25)를 꺼내보였던 것입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신분증으로 사용하는 관습은 고대 바빌로니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전수된 것인데, 비록 시아버지 유다는 그것들을 지불해야 할 화대(花代)의 차용증서로서 내놓았지만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가 잊고 있는 가문의 대(代)를 잇게 해주는 ‘꼬엘’(대를 이어 줄 속량자)의 신분증으로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승리는 시아버지 유다의 것이 아니라 이방인 며느리 다말의 것이었습니다. 족장 유다는 그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밝혀주는 확실한 증거물인 것을 곧 알아차리고 즉시 저 이방인 여인 다말에게 항복하고 며느리의 의(義)가 승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맙니다. “차드카 밈멘니!”(축자적 번역: 그녀는 나보다 의롭도다! 창 38:26a)
그렇다면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며느리 다말의 이 행위가 어찌하여 의(義)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또 메시아 예수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는 첫 번째 여성으로서(마 1:3) 도도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구약성서는 단호하게 다말의 이 행위를 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뿐만 아니라, 그 의(義)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 유다를 이겼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를 다루던 그 문맥과는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딜레마의 현실은 사실 정의에 대한 개념정의가 갖고 있는 바의 본질이요 그 진정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현실이 그러하고 또 마이클 샌델의 정의이론의 현실이 또한 그러합니다. 말하자면 ‘의(義)’는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흑백논리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성서의 현실이 갖고 있는 그 고유한 특징인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에 대한 해석은 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추구, ② 개인의 자유와 권리 존중, 그리고 ③ 도덕적 이상(理想)을 충족시키는 미덕 추구, 이 세 가지 모두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충족될 수 있는 정의이론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다소 복잡하고도 변증법적인 작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행복추구, 마이클 조던의 자유시장 철학이 추구하는 것, 임마누엘 칸트의 최선의 도덕적 동기, 등등의 각 정의이론들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시시비비를 장시간 토의하게 하여 그 복잡한 토론들 속에 나타난 딜레마들을 헤쳐 나가게 한 후에야 비로소 최선의 해석을 도출해 내도록 하는 그런 방법으로 정의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진지한 토의와 대화를 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의 결론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에서는 의견을 같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첫째로① 정의는 적어도 정적(靜的)인 논리개념이나 도덕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역동적(力動的)인 성격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말 기사에서처럼 정의는 통속적이고도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범주에서는 분명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② 정의는 결코 더 이상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국회(國會)가 보여주는 바, 합(合)을 결사 거부하는 정(正)과 반(反)의 목숨 건 이전투구는 분명 정의구현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정의(正義) 이해를 결코 어떤 개연성에 맡겨 두거나 또는 그 어떤 극단적 흑백논리에 맡겨 두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많은 법 자료들, 역사 자료들, 예언 자료들, 시와 지혜의 자료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관되게 정의에 관하여 증언해온 바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정의는 성서에서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초로 한 관계개념으로만 설명되어 왔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유한한 존재(‘땅의 먼지’;창 2:7; 3:19; 시 90:3)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즉 더불어 살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창 2;18; 레 19:17-18→눅 10:25-27), 독자적인 한 개인 개체의 도덕성 만으로서는 결코 의(義)를 일구어낼 수는 없다고 성서는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4:3; 53:3; 롬 3:10-18; 7:18 등등 성서 도처에서는 분명한 언어로 “의인은 없다!”라고 단언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단호한 어조로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막 10:18)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의(義)를 교육하는 하나님의 법의지(法意志)인 그 ‘토라’를 ‘주시는 분’과 그리고 그 토라를 통하여 의(義)로 교육(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라는 ‘관계맥락’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義)를 가르침 받는 인간의 경우는 의를 가르치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mimesis를 통하여!)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의(義)는, 이런 의미에서 볼 때는, 불확정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의(義) 개념도, 다말의 의(義) 개념도, 율법자료(律法資料)들의 의(義) 개념도 그리고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의 사건(눅 23:47 cf. 마 27:54; 막 15;39)이 지닌 의(義) 개념도 모두가 다 의(義)를 어디까지나 관계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를 보고 한 이방인 백부장이 “그는 참으로 ‘의인’이셨다.”(눅 23:47)라고 증언한 것은 바로 이 사실, 즉 인류를 구원키 위한 대속의 죽음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의(義)의 요구에 복종하신 예수의 그 복종사실(빌 2:18)을 두고서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의(義)는 그 인간본성의 도덕성만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고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모방의 복종(Imitatio Dei, cf. 마 5:48)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의로 인정받는[義認받는] 것일 뿐입니다. 다말의 의(義)도 바로 이 때문에 의(義)인 것입니다. 다말의 의는 일반적 성(性) 모럴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서 공동체(유다 가문)의 절박한 구원 요구에 성실히 응답하였다는 그 공동체와의 관계의 맥락에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마이클 샌델의 경우, 여기서도, 그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나?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성서는 매우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는 태초의 인간창조 때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이르기까지 의(義)의 길을 간단없이 ‘가르쳐 오신 하나님과 가르침 받아온 인간’ 사이의 ‘구원자와 피(被)구원자’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救援史 神學) 안에서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인간구원의 역사(救援史)라는 맥락 안에 어김없이 붙박이처럼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그러므로 줄곧 인류와의 구원사적(救援史的) 관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의가 고백되고 찬양되어 왔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義)조차도!! 관계의 맥락 안에서만 의(義)라고 고백되어 왔던 것입니다. ‘구원’을 일구어내지 않는 것은 성서에서는 그 어느 것도 결단코 의(義)라고 칭(稱)해지지를 않습니다. 소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는 것은 그러므로 구원사의 맥락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의(義)는 전적으로 ‘구원 지향적(salvation-oriented)인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48:9-11은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기필코 성실하게 구원을 베풀어 오셨기 때문에”(출 33:19) 그의 오른 손에는 정의가 가득 차 있었다고 고백되었고 또 주의 “공의 때문에! 시온, 즉 선민(選民)의 예배 공동체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찬양되었던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선택-출애굽 구원-출바벨론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교회의 구원선교에 이르는 ‘야훼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서의 응답은 전적으로 그분 하나님의 의(義)의 역사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맥에서는, ‘정의’란 이러한 구원관계의 현실을 떠나서는 결코 의(義)라고 말해지지는 않습니다. 즉 성서의 의(義)는 결코 그 어떤 절대적 규범이나 윤리-모럴로서 말하는 의(義)는 아닙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단지 공동체 윤리의 관계 맥락 안에서만 비로소 의(義)라고 말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취(Delitzsch)라는 현대 성서주석가는 이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행위를 칭송하면서 “구약성서의 기준을 따르면 그녀는 분명 성녀(聖女)이다.”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구원 지향적이 아닌 그 어떤 흑백논리도 성서의 맥락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앞에서는 쉿! 흑백논리는 물러가라! 며느리 다말의 의(義)가 시아버지 유다의 불의(不義)를 이겼도다! 그러므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의(義)는 찬양받아 마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