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한 종교개혁자로서 칼빈의 신학사상과 함께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마틴 부쳐가 칼빈을 스트라스버그로 초청하면서 같이 동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칼빈은 본래 파리를 탈출하면서 스트라스버그로 가서 조용한 연구생활을 하고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부쳐의 청을 받아들이고 1538년 9월에 그곳으로 갔다.
칼빈이 2년 동안 제네바에서 아무런 사전 계획도 없이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종교개혁운동에 가담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자기 소신대로 운동하였으나 선배가 되는 파렐과 늘 생각이 하나가 되어 협력할 수 있어서 그와 좋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이 추방되어서 칼빈은 스트라스버그로 왔고 파렐은 독일의 다른 곳으로 가서 정착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운동하였을 때 개혁운동의 주역으로 인정받아서 교리논쟁에 자기가 적극 참여했지만 파렐도 재세례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성공하여 두 사람은 제네바에서 쌍두마차와 같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에 와서 있으면서 제네바에서의 2년 동안의 운동을 회고하면서 스스로 반성해보는 편지를 파렐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교회가 이렇게 기울어진 것은 우리의 경험 부족과 부주의와 태만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제네바에 있는 한 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런 모양으로 우리를 겸비하게 만드신 것은 우리의 무지와 자만과 그 밖의 다른 약점들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진심으로 주님의 교회 앞에서 이와 같이 고백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내 양심을 가지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과 온 세상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순전했습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생각해볼 때 내가 당면한 여러 어려움은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섭리하시고 명령하시는 위대하신 치유자에게 결과를 맡기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칼빈과 파렐의 우정이 돈독하여, 칼빈이 바젤에 잠시 머문 동안 파렐의 한 친척이 유행병에 걸렸을 때 자기 돈으로 간병하다가 그가 죽자 장례비용을 대주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동안 제네바에 남았던 개혁운동 동지들과 서신 교환을 끊지 않았는데 비에르트(Viert) 목사와 코라우드 목사였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의 교인들에게 목회 서신을 자주 써 보냈다. 그는 그들을 “흩어진 제네바 교회의 남은 자”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확신하기는, 우리가 한 때 당신들과 연합해서 일한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결속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힘 밖에 있었다”고 하였다.
칼빈이 스트라스버그에서 한 일이 여러가지였다. 먼저 그는 프랑스에서 피난 온 프랑스 동포들이 그곳에 많이 살고 있으면서 교회를 갖지 못했었는데 부쳐가 그들을 위한 작은 교회를 세워서 칼빈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들의 목회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고 의지할 데 없이 피난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칼빈은 그들의 신앙적인 지도자로서 또 그들의 보호자로서 할 일이 많았다. 칼빈은 또 독일의 개혁운동가들의 회합의 회원으로 가입되어서 부쳐를 비롯하여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신학을 토론하고 교회 개혁을 의논하였다. 멜랑히톤의 신학은 루터의 신학보다 칼빈의 신학과 일치한 점이 많았고 부쳐 역시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의 개혁자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게 되어 신학토론회와 연구회에 꼭 동참하게 되었다.
칼빈은 신부의 독신 생활을 비판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결혼 문제도 고려할 때가 되었다. 파렐이 어떤 젊은 여성을 칼빈에게 추천하였으나 칼빈은 그녀가 프랑스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서 거절하였다. 칼빈은 재정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독일 교회가 그에게 약간의 생활비를 지급하여주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한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갖게 되어 몹시 행복해 하였다. 그가 결혼하면서 말하기를, 결혼하여 가정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 자신이 본래 약한 체질인데다가 과로로 인하여 늘 피로하였다. 게다가 그때 유행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갔고 칼빈의 교우들 중에도 죽어간 사람이 많았다. 그의 아내도 역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여서 칼빈이 한때 몹시 고달팠었다.
4. 칼빈의 제네바 귀환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 있던 동안 제네바에서는 종교개혁의 진전도 없었고 정치적 및 종교적 혼란을 겪었다. 그리하여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와야 한다는 요청을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에게 보냈다.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에서 행복한 생활을 했으므로 제네바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서 파렐에게도 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렐과 다른 친구들이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권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위자의 편지에 답하면서 제네바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말하기를, 자기의 관심은 당신의 교회가 바로 지탱되고 다스려지는 것뿐이므로 교회로 필요로 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노력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칼빈이 1541년 9월 제네바로 3년 만에 돌아와서 수일 후에 교회 강단에 서서 설교하면서 과거를 회상하였다. 제네바에 다시 온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와 시민들의 환영과 함께 신뢰를 받게 되어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개혁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교리적 문제는 그가 제네바에서 처음 2년 동안 운동하는 동안 충분히 토론되어서 재론이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옛날과 같은 큰 공개토론을 열 필요는 없었으나 칼빈이 가톨릭 교회를 분열시킨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과 가벼운 논쟁을 서신으로 한 일이 있었다. 칼빈은 자기는 교회의 분열자가 아니고 개혁자라고 말하고 교회 분열의 책임을 가톨릭교회 측에 있다고 말하였다.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것만이 아니고 신자들의 신앙과 일상적인 도덕생활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까지를 생각한 포괄적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칼빈은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 곧 성시(聖市)로 만들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신앙생활과 함께 신도의 기본적인 신앙지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373개 항목의 신앙요리문답을 만들어서 매 주일 교인들이 5~6개 조항을 암송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1년 55주일에 그 모든 신조를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요리문답서에는 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제외되었다. 이를테면 예정의 문제와 같은 것이다. 제 1항에서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나님을 앎이라”고 하고 그 이유는 “그를 예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칼빈은 신앙의 요긴한 대목들을 문답 형식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지식을 가르쳤다.
칼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사람의 가장 큰 의무로 생각해서 제네바 시민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엄명하였다. 그리하여 주일날 예배 시간에 예배에 불참한 사람이 거리에서나 어디에서 발견되면 중벌에 처하였다. 그는 주일 저녁 집회 때도 전 시민이 예배를 드리고 교회당 문 밖으로 나와서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거리를 메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만족하였다.
다음으로 제네바는 빈곤한 도시였으므로 칼빈은 사치와 낭비와 무절제한 행위를 엄금하였다. 부유층 사람들이 화려한 무도회를 열고 즐기는 것을 금하였다. 그리하여 유력한 시의원이나 권력자들이 칼빈에게 제지를 받고 반감을 품은 일도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도박과 음탕을 금하였다. 칼빈은 시민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번 돈은 절약하고 저축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재력이 있으면 되도록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게 하였다. 그리고 간음과 같은 도덕적 타락 행위를 한 사람을 엄벌에 처하였다. 투옥과 사형이 있었다.
제네바는 농지가 적고 산이 많아서 농업생산이 빈약하였다. 칼빈은 방직업을 장려하였고 자본이 없어서 산업을 일으킬 수 없는 경공업 산업인들에게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이자를 낮게 받고 빌려주어서 자본을 장만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고리대금업자를 정부와 교회가 엄격하게 다루면서 언제나 저이자 제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칼빈이 이자를 올려서 제네바의 산업 발달의 문이 열렸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칼빈은 산업인들이 부지런히 그리고 정직하게 일하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장차 제네바 및 스위스가 부유해진 먼 원인이기도 하였다.
칼빈은 민생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개선해갔다. 집집의 연돌을 높이게 해서 부엌에서 때는 화목이 잘 연소되게 하였다. 제네바는 작은 국제도시가 되어 여러 나라 사람이 이주하여 와서 시민권을 얻으려고 애썼다. 제네바는 시민권 발급을 신중히 하여 시민권 얻기가 쉽지 않았는데, 칼빈은 자신의 시민권 문제는 제쳐 두고 프랑스에서 온 동포들이 시민권을 얻게끔 노력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어떤 치과의사가 병원 개업 허가를 신청해왔을 때 칼빈은 그가 정말 치과의사인지 시험해보기 위하여 자기 이를 먼저 치료하게 해서 그의 기술을 시험한 후 허가를 내어준 일이 있었다.
칼빈은 국민 교육의 발달을 위해서 초등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를 키워서 대학을 만들었다. 대학을 만든 후 학장 자리에 자기의 후계자가 될 10세 아래의 후배 데오도레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임명하였다. 칼빈은 목회자로서 만족하고 다른 기관의 높은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베자는 칼빈의 전기를 써서 그의 개혁사역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 문제만이 아니라 시정 문제에도 깊이 간여하고 있었고 이제는 시의회가 교회 일에 덜 간섭하고 칼빈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네바 시는 칼빈의 신정(神政) 체제가 되었다는 비평도 있게 되었다. 칼빈이 일반적으로 비난을 받은 것은 그의 정치가 너무 엄격하고 엄벌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상은 제네바를 거룩한 한 도성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으나 저항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높았다.
칼빈은 특별히 자유 사상들을 경계하였다. 제네바 시에는 여러 나라에서 신앙이나 학문의 자유를 위하여 피난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신학을 비평하고 대립한 사람들도 있었다. 세바스티엔 카스텔리오(Sebastien Castellio)는 인문주의자인데 칼빈을 도와 교회에 봉사하였지만 칼빈은 그가 신부로 안수 받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에게는 교리 문제가 있었다. 그는 칼빈의 주기도문 강해에 이의를 가지고 칼빈과 맞섰으나 결국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이 이단자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를 처형한 책임자가 된 것은 그의 종교개혁운동에 가장 큰 오류로 남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생물학자였는데 20대 청년 시절에 과격한 종교개혁 사상을 가지고 신학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재건」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삼위일체 이론을 전개하였고 그 밖도 예정론과 유아세례 문제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지목되어서 피신하러 제네바에 왔던 것이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였다.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 이단자를 체포해서 재판에 붙여 처형할 것을 칼빈에게 강력히 요청했으나 칼빈은 주저하였다. 그가 세르베투스의 이단설을 묵인하여서가 아니고 로마가톨릭교회가 이단자를 가혹하게 처벌한 예가 너무 많아서 그와 꼭 같은 방법으로 제네바 자유도시에서 그를 처단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을 판정하는 문제는 제네바 교회의 교권에 속하였으므로 칼빈이 그 권한을 포기하면 시 당국이 이 문제를 다루게 되기 때문에,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처단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칼빈이 제네바 시 당국과 충돌하여 제네바를 떠나게 되었던 과거의 문제가 이단자를 판정하는 권한 문제였다. 그때 시 당국은 그 판정권이 교회 목사들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정죄를 받고 처형되면 자신을 반대하는 과격파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성토하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체포하여 이단으로 처형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에게 제네바를 떠나라고 권한 것은 자기가 그를 단죄하여 처형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러나 그가 칼빈의 권고를 듣지 않자 칼빈이 부득이 그를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제네바 시 당국이 그를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였다. 이것이 16세기 교계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으로 제네바에 있던 과격파 이단들의 기세가 약화되었고 그를 괴롭히던 도전자들도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처형 문제로 후대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20세기 그리스도교계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칼빈을 혹평하였다. 유럽의 칼빈의 후예, 개혁파교회 지도자들이 칼빈의 과오를 개탄하는 동시에 세르베투스의 망령을 위로하는 뜻으로 제네바 외곽에 있는 그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칼빈의 오류는 제 16세기 시대의 한 비극이었다고 말하고 칼빈을 대신해서 속죄비를 세운다고 그 비석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