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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유혹!

2017년 1월 29일 주일예배 설교자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

신명기 13장 1-5절, 마태복음서 4장 1-11절

[설날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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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김진한 기자)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

어제는 설날이었습니다. 일제가 양력을 강요해서 예전에는 설날을 구정(舊正)이라고 불렀다가, 1985년에 '민속의 날'이라고 바꿔 부르고 1989년에 와서야 '설날'이라는 말을 되찾게 됩니다. 설에는 떡국을 먹지요! 왜 밥을 먹지 않고 떡국을 먹을까요? 《동국세시기》에 보면 떡국 떡을 만들기 위해 가래떡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설날이면 멥쌀가루를 쪄서 커다란 목판 위에다 놓고 떡메로 무수히 내리쳐 길게 늘여서 만든다." 설날이 다가올 때에 방앗간이나 떡집에 가면 기계로 가래떡을 길쭉하게 뽑아냅니다. 설날 먹는 떡국의 가래떡은 길게 뽑은 것이 특징인데, 설날 아침에 이 떡국을 먹는 이유는 가래떡처럼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이 가래떡으로 떡국을 만들려면 떡을 썰어야 하지요. 그믐날 밤이 되면 굳혀 놓았던 가래떡을 밤새 썰곤 했던 기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방 한구석 쌀겨와 함께 보관하고 있던 날고구마를 깎아먹으며 할머니 아버지와 함께 모두 가래떡을 썰었습니다. 옛날 문헌을 보면 하나같이 이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썬다고 표현합니다. 즉 새해에 떡국을 먹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망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새해 첫날 먹는 음식은 대부분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북에서는 설날에 떡국과 함께 만두를 먹는데, 중국도 새해의 절기인 춘절에는 만두를 먹습니다. 그런데 춘절에 먹는 만두는 평소의 교자만두나 포자만두와는 생김새가 다르지요. 우리처럼 만두 양끝을 둥글게 말아서 붙입니다. 원보(元寶)라는 옛날 중국 은 동전(銀子)을 본떠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 모양으로 빚은 만두를 먹으며 집안에 재물이 넘치기를 빌었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부잣집에서는 금, 은을 넣고 만두를 빚는데 금은이 들어간 만두를 먹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운수 대통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숙종 때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이 쓴 《해유록, 海游錄》에 일본 떡도 우리의 권무병(拳拇餠)과 닮았다고 적었습니다. 권무병이란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떡이라는 뜻으로 가래떡을 가리킵니다. 일본도 동전 모양의 떡을 만들어 대나무 잎에 싸서 쪄서 먹었습니다. 일본 사람들 역시 부자 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그리스 등 일부 유럽 국가에도 새해에 동전을 숨긴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전통이 있습니다. 케이크를 먹다가 동전을 씹는 사람은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설날 떡국을 드신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부자 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서 순백색의 깨끗한 떡처럼 과거의 모든 허물은 다 없애고 새롭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새해를 맞아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서로 이런 덕담을 나누듯, 오늘 저는 구상 시인의 시 한편을 읽어드릴까 합니다.

새해 - 구상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 서슴없이 맞는 새해 /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사탄의 유혹 1.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는가?]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새해를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주제로 매주 설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세례를 받으신 예수가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만,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서 늘 있게 되는 유혹과 시험, 시련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부모구존(父母俱存)하시고 형제가 무고(無故)하여 나날이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지만, 인생의 길에선 반드시 굴곡이 있고, 약점을 가진 우리는 언제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면 삶이 비참해지고 고통은 더해집니다. 그래서 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제자 삼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우리들은 더욱 더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가 겪으신 첫 번째 유혹은 예수님의 정신은 가장 높으나, 몸은 가장 나약할 때에 찾아옵니다.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받고 예수님의 가슴은 벅찬 감동과 높은 이상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로 40일 동안 어느 것도 먹지 않고 굶주리자 악마가 옵니다. 즉, 이상은 높지만 실제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당면하여 허덕이며 생존의 가장 밑바닥에 처했을 때, 사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바로 두 지점을 유혹의 단서로 삼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유혹의 지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가정문이고, 또 하나는 "돌들로 빵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여러 면에서 치명적입니다. 지금 예수는 40일을 굶었습니다. 며칠만 굶어도 사람은 맥을 못 추고 눈에 온통 먹을 것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이런 유혹을 당하는가?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나선 이들에게도 먹는 문제는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넘어집니다. 2500년 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은 떨어지고, 공자를 수행하던 사람들은 모두 병이 들어 일어나지도 못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보다 열 살밖에 어리지 않았던 괄괄한 제자 자로가 발끈해서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군자도 이렇게 곤경에 빠져 어려움을 겪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합니다. "군자야말로 진실로 곤궁할 수 있지만, 소인들은 곤경에 빠졌을 때 언제나 정도를 벗어나 버린다네!"(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 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論語> 衛靈公)

지금 예수께서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사탄의 말을 따라서 돌로 빵을 만들었다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분명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돌을 빵으로 만들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요?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사탄의 말에 순종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즉 하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받았으나, 유혹에 넘어가 사탄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왜곡됩니다. 돌로 빵을 만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빵을 만드는 것은 밀입니다. 빵을 만들려면 그에 맞갖은 상식이 있고, 정확한 원칙이 있고, 정당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금 사탄은 이 모든 것을 어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를 보십시오. 여기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나 꿈으로 점을 치는 사람들은 표징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다른 신을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매우 강한 경고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표징도 있고, 기적도 일으킵니다. 돌로 빵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우리나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칩니다.

우리의 약점들을 매개로 유혹이 올 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삶의 기준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먼저 자신의 욕심과 뜻과 고집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수도원에 입회하겠다고 찾아오자 수도원의 나이 든 수사가 언제든지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순례자의 자세로 사는지 알아보려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금화 세 닢이 있다 하면 그것을 기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느냐?" "그럼요, 마음으로부터 모두 주겠습니다." "그러면 은화 세 닢이 있다면 그것은 어찌하겠느냐?" "그것도 기쁘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동전 세 닢이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러자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만은 안 되겠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수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그건 왜 안 되느냐?" "현재 제가 가진 게 바로 그 동전 세 닢이거든요."

오늘 예수님은 세 번의 유혹을 모두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앞세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의 시련이 더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유혹에 넘어갔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의 시험에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된 기준을 세워 놓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 2. 박수칠 때 떠나라!]

그런데 첫째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자 이번에는 악마가 예수님을 말씀으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예수를 향한 도발적인 질문을 이어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 천사들을 시켜 너를 손으로 떠받쳐서 너의 발이 땅에 닫지 않게 할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는 너무나도 교묘합니다. 정말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손아귀에 놀아나고 맙니다.

두 번째 유혹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유혹이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유혹이라면, 두 번째 유혹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망과 관련된 유혹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 관심과 사랑에 따라 삶의 행복과 의미가 좌우됩니다.

1월 13-14일에 서울북노회 교육부가 주관하는 신년교사강습회에 가서 중고생들의 게임 중독, SNS 중독에 관해 배우고 왔습니다. 중독이란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우리 아이들 세대의 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게임이나 SNS를 시작하면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SNS 중독은 카페인 중독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카페인은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게임의 세계나 사이버 공간에 매몰되는 원인은 모두 사회적 관계망의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나 친구,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독설로 인한 상처가 아이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게임과 사이버 세계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그것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자기만의 경험과 자기만의 관점으로 남을 보고 세상을 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괴리를 일으키고,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유혹과 시련이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같지만 자기가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을 뽑아 읽거나, 또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하나님께, 또는 동료 신앙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저절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게 되지만, 자기의 욕망에 따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뜻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를 뽐내고자 하는 마음만이 남게 됩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천에 있는 예인교회는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일정한 액수 이상의 헌금을 하거나 헌물을 한 사람은 절대 이름을 밝힐 수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으로 자기의 몸을 감싸고, 좋은 차나 넓은 집, 학벌이나 재력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내면이 부실해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궁극적인 지혜와 힘과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고, 결과적으로 인간 또한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지금 여러분은 진정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탄의 유혹 3. 하나님의 아들이 설 자리]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유혹은 권력에 관한 것입니다. 약한 우리들은 언제나 강한 힘을 숭배해 왔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 종교적 권좌에 오른 사람들은 세상을 지배할 정치적 권력마저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넷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목사가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지배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매우 무섭고 뿌리 깊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노골적으로 예수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엎드려 절을 하라. 그럼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사탄에게 절을 하고서라도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 즉,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고 싶은 이 욕망에 대한 시험을 바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이미 겪었습니다. 남을 지배하려는 모습은 시시때때로 나타납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아내를 때리는 남자,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는 어른들, 많이 가진 자들의 갑질, 그것이 힘이 되었든, 재산이 되었던, 지식이 되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면 그것을 가지고 못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 마음에는 지금 무엇을 품고 있습니까? 언젠가 문대골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슴에 현금 천만 원을 품고 지하철에 타보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도둑놈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다면 모두가 친구로 보일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가슴엔 무엇을 품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세상과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요?

2013년은 가톨릭에서 정한 신앙의 해였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기념해 로마를 방문한 66개국 6천여 명의 신학생과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되고픈 남녀들을 만났습니다. 교황은 이들과 함께 준비된 원고 없이 4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거룩한 부르심(聖召)이란 흥미로운 캠페인이나 개인적 목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황은 이어 가난의 영성을 강조하며 "이 시대에 부는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매우 위험하다," "독실한 신앙인들조차도 최신 스마트폰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가용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데 이런 사고는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녀와 사제들이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말한 교황은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거듭 당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가 필요하다면 낡은 중고차를 얻어 타고, 차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면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어린이를 생각하라," "사람들의 모든 죄와 결함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 "진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라," "슬픔이 있는 곳엔 거룩함이 없다," "수도자와 성직자들 얼굴이 절인 오이처럼 돼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들은 신부나 목사, 수녀나 수도사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가슴에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길 뿐만 아니라,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험과 유혹으로 시작했습니다. 시험과 유혹은 공생애 내내 계속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때마다 말씀으로,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겨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유혹과 시험에 노출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 주님 예수님처럼 말씀과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바로 거기가 진정한 행복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설날을 허락하신 하나님! 우리는 올 한해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시시 때때로 우리의 약점을 노리며 유혹하는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을 물리치게 하시고, 궁극적 지혜요, 진정한 사랑이신 당신의 품안에 늘 머물게 하소서. 바른 안목과 정직한 영을 주셔서 말씀을 읽을 때에 욕망으로 흔들리거나 왜곡하지 않도록 하시고, 언제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늘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 속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우리들 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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