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성상파괴?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

입력 Dec 02, 2019 06:21 AM KST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4)

종교개혁이 일어난 비텐베르크를 기점으로 성상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레온 3세(730-787)에 의한 정교회의 1차 성상(icon)논쟁과 파괴 이후 최대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칼슈타트는 1522년 「형상의 제거에 대하여」를 발표했고, 형상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 후 츠빙글리와 청교도주의에 의해 이 태도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4세기 말)의 "그림공경은 한 마디로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한 도시가 수년간 노력해서 교회에 수집해 놓은 소중한 예술작품들은 폭동이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흔적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사람들은 뜯어낼 수 없는 벽화에는 석회를 발라 버렸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조각품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스도인들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성상을 부수고 망가진 성상 무더기에 올라 마구 발길질까지 해댔다. 성상 앞에서 무릎을 꿇던 사람들이 그 성상을 짓밟은 데에는 분명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의 분노는 중세 말 너무 포괄적으로 받아들여진 성상 예배에 대한 분개에 기인한다. 중세 말 예술은 교회에서 분이 넘치게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예술은 아랫자리에 내려앉아 섬기는 자세를 취하는 대신 윗자리에 앉아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려 했다. 종교와 예술의 관계가 뒤틀렸다. 그때 청교도적인 예언자적 설교가들이 경계가 어긋난 상황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지나친 성상 예배는 성상 파괴를 초래한 원인을 제공했고, 성상파괴는 혁명적으로 아무런 형상도 없는 상태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이제 개신교 교회 공간은 깨끗하게 치워졌고 그야말로 아무런 장식이 전혀 없는 공간, 마지막에는 벽에 회칠을 하여 그 어떤 장식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칼슈타트의 성상파괴 행위에 경악하였다. 그는 칼슈타트의 행동을 새로운 율법을 따르는 폭력행위로 보았다. 루터의 통찰은 이렇다. "십자가상과 성인들의 초상화 같은 기념하고 증거하는 형상들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형상들에 드러난 기념과 증거는 참된 것이다. 그것들은 허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존경받아야 하고 훌륭하다." 실제 루터 옆에는 화가 알브레히트 듀러와 루카스 폰 크라나흐 같은 인물이 종교개혁을 돕고 있었다.

성상파괴는 기독교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왔다. 가장 중요한 소실은 형언할 수 없는 성상파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을 걸었던 형상 언어도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개신교회는 말씀이 형상을 물리치고 말씀이 교회와 신앙을 독점했다. 역사적 성서비판과 매스미디어의 언어의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성경주의는 강화되었다. 말씀만을 강조하는 배타적인 자세를 말씀에 대한 과장된 우상숭배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엄격한 말씀독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calvin
(Photo : ⓒ심광섭 전 감신대 교수 페이스북 갈무리)
▲Frans Hogenberg - The Calvinist Iconoclastic Riot of August 20, 1566.

교회에서 성상들이 제거되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상징적 사고가 파괴되었다. 상징적 사고는 참된 종교적 사고이며 종교적 사고에만 적합한 사고이기도 하다. 합리적 사고가 자연과학에 부합하듯, 형상적 사고와 언어는 외적 관찰로부터 내적 성찰과 직관으로 나아가며, 동시에 영적 체험을 표현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개념적인 이 사고를 의식적으로 막는다면 알레고리가 지배하는 일천한 비유적 사고에 머물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에도 호소한다. 시각적 욕구도 청각과 똑같이 그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상징은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 손실은 교회에서 예술작품을 상실한 것이다. 그 영향은 교회에 그대로 미치고 있다. 종교예술과 다른 예술이 평준화 되었고 교회를 깨끗이 하겠다는 이 광신적 열성 때문에 예술이 교회에서 박물관으로 쫓겨났다. 박물관에서 예술은 종교적 의미는 거세되고 미학적 관점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예술은 그것이 지닌 종교적으로 특별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죄다 내팽개쳤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의식의 진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실제 현대 예술은 더욱 고향을 잃었을 뿐이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예술은 모두 세속화 되었고 거룩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는 예술이 없는 교회가 되었다.[발터 니그, 『미켈란젤로』, 「서문. 형상언어」 참조]

따라서 개신교회는 2차 니케아 공의회(=7차 보편공의회, 787년)의 결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흠숭과 공경을 구분했다. 참 흠숭(latreia, adoratio)은 하느님께만 바쳐져야 하며, 그림에 대해서는 무릎 꿇기, 입맞춤, 분향, 촛불 등을 통한 상대적 공경(timetike proskynesis, veneratio)이 허용된다."

7차 공의회의 결정문 중 일부를 싣는다.

"옛날부터 교회에서 내려오는 모든 전통은 기록된 것(성경)과 구두로 전해진 것을 똑같이 지킨다. 성화의 제작도 이 전통 중의 하나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나타낸 성화는 그 내용이 성경말씀에 쓰여진 내용과 같으며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성화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귀중히 여기며 예배는 하느님께만 드린다. 성화는 분향과 촛불로 경의를 표한다. 성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십자가나 복음서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화는 예술적 형태로 된 복음이다. 성화는 신성을 투시하는 창(窓)과 같은 것이다.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거의 不在에 가깝다.
부재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
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워
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성자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정현종, 「창」(전문)

나는 현대 가톨릭교회가 정리한 성화에 대한 입장을 따르고 싶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29-2132]

2129 하느님의 명령에는 인간의 손으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신명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호렙 산 불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조심하여,......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15-16).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계시하신 분은 절대적 초월자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전부'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분의 모든 업적보다 위대하시다"(집회 43,27-28).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지혜 13,3)이시다.

2130 그런데도,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으로 성취된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는 형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거나 허용하셨다. 구리 뱀과6 계약의 궤와 커룹(cherubim)62)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2131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근거하여,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성모,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성화상의 새로운 '경륜'을 시작하신 것이다.

2132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성화에 대한 공경은 그 본래의 대상에게 소급되며"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성화에 그려진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존경을 표하는 공경이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흠숭이 아니다.

성화를 공경하는 행위는, 성화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하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 줄 뿐이다. 곧, 성화에 표하는 동작은 성화 그 자체에 표하는 동작이 아니라, 나타내고 있는 분께 표하는 동작이다.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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