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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경재 박사의 『삭개오의 기쁨』

갈릴리 복음 공동체로의 초대

신학,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

<<삭개오의 기쁨>>을 두고 저자인 숨밭 김경재 목사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온 지난 50년의 결산보고서라고 요약하고 있다. 그가 이런 설교요약명상집을 낸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빚진 자 의식 때문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자로서 교회를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에서 ‘삭개오작은교회’를 시작했고, 이 책에 등재된 요약설교는 그 공동체의 자궁을 빌어 낳은 옥동자이다. 둘째는 한국 개신교 강단에서 ‘갈릴리 복음’이 실종된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자본주의, 실용주의, 성공주의, 감정주의, 쾌락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교회 강단에 작은 틈이라도 내고 싶은 것이다. 평생을 신학자로 살아온 그가 ‘예수 없는 예수 교회’로 변질되어 가는 한국교회를 향해 던진 것이 신학 책이 아니라 설교명상집이라는 사실이 참 고맙다. 그 까닭은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나는 신학이라는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고, 신학이 교회에 봉사하는 구체적 사명은 결국 ‘설교’에 봉사하는 길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머리말).

이 책의 원고를 받아들고 나는 독일 화가인 발터 합당크(Walter Habdank, 1930-2001)가 수채화로 그린 ‘삭개오’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삭개오의 기쁨>이라는 책 제목이 환기시키는 어떤 정서를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종려나무처럼 보인다. 그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양손으로 붙들고 위태롭게 앉아 있다. 비정상적으로 큰 그의 손이 왠지 슬퍼 보인다. 그의 큰 눈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선해 보이고, 입매가 올라간 입술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마와 볼은 석양의 햇살을 받아 빛이 난다. 기쁨과 고통, 평안과 고독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합당크는 삭개오를 통해 우리 모두가 처한 실존의 정황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삭개오 교회를 시작하면서 김경재 박사는 다음의 세 가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공동체를 지향하겠다고 밝혔다. 첫째, 자기 자신의 실존이 현대판 삭개오라는 것을 절실하게 고백하는 자들이 모이는 공동체. 둘째, 항상 맘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사모하며 구도자적 자세로 모이는 공동체, 셋째, 교회의 헌금 절반과 교인들의 경제적 정신적 재화의 일부를 어려운 이웃들과 기쁜 맘으로 나누며 살기를 다짐하는 신도들의 공동체(18-19쪽). 김박사는 이것을 “‘삭개오의 구원체험’이 오늘 나의 실존의 내면과 내 가정과 교회 안에서 거듭 체험되기를 바라는 작은 신앙공동체”라고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기쁨’이다.

교리의 울타리를 넘어

‘갈릴리 예수 복음’의 핵심이 ‘기쁨’이라는 선언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거듭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한국교회의 토대가 흔들리고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사의 부정성을 준엄하게 꾸짖는 예언자적 외침이 잦아들면서 역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초월적 비전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부정의 길을 걷기보다는 돈과 권력이라는 달콤한 우상 앞에 즐겨 엎드리고 있다. 그들이 정통교리라며 내세우는 것들은 생명을 질식시키기 일쑤이고, 일상의 삶은 거룩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교회 강대상에서는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만, 진짜 기쁨은 파도에 떠밀려 해안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나룻배처럼 물러나고 있다. 예수 정신이 몰각된 교회가 빚어낸 아이러니이다.

기독교인들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는 교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데려다 줄 통로이기도 하지만 일쑤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교리나 기독교의 전통적 언어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될 때만 생명력을 갖는다. 김 박사는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 세 가지가 어떻게 변질되어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격적 신뢰의 표현인 ‘오직 믿음만’은 속죄론 교리에 대한 신봉으로, 믿음의 표준으로 제시된 ‘오직 성경만’은 성경절대무오설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한 구원을 가리키는 ‘오직 은총만’은 ‘싸구려 은총’으로 변질되었다(280쪽).

그에게 죄 혹은 불신앙은 정통교리를 의심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읽지 않는 것도, 기도를 자주 못하는 것도 헌금을 바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께서 내 속 맘을 다 알아주시고 믿어 주신다는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내 형제의 속맘을 알아주지 않고 믿어주지 않는 일”이다. 한국 강단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대속 교리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인간다운 삶이란 “그 누군가의 삶을 대리하여 사는 삶이고, 영원한 뜻에서 보면 하나님의 삶을 대리하여 살아가는 것”이라면서, “예수 생명과 일치하여 ‘하나 되는 순간’, 십자가의 대속적 교리는 교리로서가 아니라 뜨거운 보혈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것”(73쪽)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 세상의 기존 가치관과 세계관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고수하려고 한다.”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위험 사회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붙들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은 종이로 지은 집처럼 위험하다. 근대의 발명품인 근본주의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거나외면하는 것은 자기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 교회는 동굴 속에 갇혀 저 바깥세상을 모르는 플라톤의 수인들과 같은지도 모른다. 정통교리, 신학체계, 근본주의, 냉전시대의 가치관, 무한성장 신화 등 그 동굴의 이름은 다양하다(338쪽). 교회는 과연 그 동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김경재 박사의 설교는 그런 동굴이 실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임을 조목조목 들려준다. 그의 설교를 통해 고리타분하거나 억압적으로 느껴졌던 기독교 담론이 돌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교리나 전통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 삶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가 바른 ‘신앙생활’은 바른 ‘생활신앙’이라고 말하는 것(95쪽)은 그 때문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인간 존재’(human being)는 ‘인간 되기’(being human)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위선 혹은 독선으로 변질되곤 한다. 그렇기에 저자의 눈길은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땅의 현실에 주목한다. 우리는 이 명상집 도처에서 땅에서 들려오는 피울음 소리를 듣는다. 포클레인으로 파헤쳐지고 있는 강의 신음 소리, 골프장 조성을 위해 매립되는 늪지에 살던 뭇 중생들의 비명,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의 절규와 한숨. 정치인들과 언론인, 재벌들이 공모하여 벌이는 죽음의 굿판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불임의 적개심에 사로잡히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과 역사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 실존과 역사는 모호하다. 그렇기에 일도양단의 기세로 역사를 갱신할 수는 없다. 그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현실을 지양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입각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수 없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만물을 갱신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인의 삶을 ‘세속 한복판에서의 초월’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세속의 현실이 어떠하든 오불관언하는 자세로 초월을 논하고 노래하는 것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다.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를 바라보고, 또 그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다.

하지만 지난 시절 계몽의 주체였던 교회가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교회가 더 이상 ‘예수 따름의 공동체’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 이후부터 시작된 교권 중심의 공동체에 즐겨 머무는 순간 교회의 몰락은 시작된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이다. 도의 움직임은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잃어버린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다음의 인용은 마치 저자가 한 호흡으로 발화한 것처럼 유장하면서도 결연한 어조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예수를 내가 믿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방어적이며 명예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삶의 존재방식을 철저히 버리고,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 삶은 자유, 개방성, 겸허한 단순성, 그리고 충만, 사랑과 봉사의 기쁨, 형제자매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동반한다. 사회적 공동체 삶 속에서는 정의롭고 진실한 사회적 공공성이 실현되도록 악의 유혹과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대결을 동반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세상 문제를 모두 해결하려고 오만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조금씩 나무가 자라듯이 커가는 것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두 각자 자기생명의 영생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결국 모두 헛것이 되고 만다.”(303쪽)

사람의 으뜸 되는 목적

저자는 이런 믿음의 본을 갈릴리 복음 공동체에서 찾는다. 예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은 그가 죽음 이후의 천국을 보장해주기 때문도, 안락한 삶을 약속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예수와 만난 이들은 그를 통해 참 사랑을 체험했고, 참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에 역사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자와 같았던 그들을 한 몸 공동체로 묶은 것은 “자유・정의・평등・평화・사랑이 서로 포옹하는 생명의 나라 건설”이라는 역사의 꿈이었다. 그들은 성전 체제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에게서는 맛볼 수 없었던 생동감, 신선함, 창조적 모험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새로운 세상의 꿈은 언제나 불온할 수밖에 없기에 갈릴리 공동체는 고난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고난’은 자기초월적 자유의지를 가진 이들이 겪어내야 할 산고이다. 더 이상 고난을 당하지 않음이야말로 교회 타락의 징후이다.

그렇다고 하여 갈릴리 복음 공동체가 비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존재와 세계에 경외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이 고마움임을 알기에 주어진 삶을 건강하게 향유할 줄 안다. 저자는 여러 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의 1항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의 으뜸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문답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도구적이고 방편적인 가치들, 즉 궁극 이전의 가치에 몰두하고 있는 세상에서 저자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다. 철학의 뿌리는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모순에 대한 ‘경악’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다. 아래로부터의 철학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경탄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현실의 모순을 이겨낼 힘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세계를 향유하고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금의 현실은 우리의 그런 바람을 좌절시키곤 한다.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우리의 의식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 문제가 심각한 인류 생존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시장전체주의자들은 별일 없을 거라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자본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난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사람들은 지금도 죽음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저자는 새로운 ‘생태학적 영성’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자각, 절제와 단순성의 회복, 생명외경과 비움의 삶”(259쪽)을 특색으로 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저자는 오후 6시에 부름 받고도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은 은혜의 수혜자들이 바로 인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질병이다.

저자는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구원사 경륜 가운데서 ‘성령의 제3시대’ 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제3시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책임성과 자율성 안에서, 지구의 생명체들을 지키고 보존하며, 고통 받고 신음하는 지구촌 동료 인간들을 치유”(169쪽)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름에 응답할 때 교회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이 부름을 외면할 때 교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성, 영성, 감성 그리고 역사성

<삭개오의 기쁨>을 읽으며 여러 번 놀라는 동시에 감탄했다. 우선 한국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명절이나 절후의 리듬을 성경 혹은 교회력의 가락에 버무리는 솜씨가 놀라웠다. 일찍이 루돌프 불트만이 바울의 선교 사역을 ‘접촉과 저항’이라는 말로 요약했던 것처럼 저자는 우리 명절 혹은 절후 속에 녹아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성경의 신앙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복을 비는 마음이나 복을 받고자 하는 맘이 정결하고 착해야 한다는 보편적 도덕감(道德感)은 있었으나, 복 받기에 합당한 마음의 정화(淨化)나 사회적 윤리의식(倫理意識)은 약했다”(43-44쪽)는 진술이 그러하다.

또한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분답게 김 박사의 선포는 매우 성찰적이다. 성찰이 타자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라면, 그에게 있어 성찰의 거울은 과학・철학・종교・문명 등으로 다양하다. 어떤 대상과도 만나 대화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상실의 위험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없다면 애당초 대화는 불가능하다.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넘나들고, 과학과 문명의 전통을 종횡으로 누비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독자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은 ‘중심’을 이미 붙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자폐적인 담론 속에 머무는 까닭은 타자의 세계와 마주쳤을 때 자기를 지켜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한국 기독교의 뿌리는 놀랍게도 진정한 믿음을 붙들지 못한 이들이 일쑤 보이곤 하는 오만함과 지적 태만이 아닐까 싶다.

<삭개오의 기쁨>이 ‘하늘의 독백’처럼 들리지 않는 까닭은 김 박사의 시선이 끊임없이 우리 현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우리 현실을 주석하는 자라 한다. 그는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연민과 긍휼로 현실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현실이 어떻게 지양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삶이란 끊임없는 ‘벗어남’(脫)과 ‘지향’(向)의 긴장 속에 있다. 벗어나야 할 세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현전하지만, 지향해야 할 세계는 명백하다. ‘예수가 보여주신 생명세계, 그것이 참 본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앞서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간 이들이 많다. 김 박사는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우리와 대면시킨다. 그런데 그가 호명하는 이름 가운데 한국인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다. ‘설교요약명상집’이라는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 혹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우리 앞에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제 <삭개오의 기쁨>이라는 설교요약명상집을 맛있게 먹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사랑하며 순명하며 나아가다가 마침내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게 되는 신비한 일치 체험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315쪽)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적 과제이니 말이다. 갈릴리복음공동체를 향한 여정에 디딤돌이 하나 놓였다. 고마운 일이다.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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