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 (3)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편집자 주]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충성스러운 봉사와 헌신적인 사역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야심이나 열심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면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IV.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가?

성령
(Photo : ⓒ Pixabay.com)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갈급한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사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명령이 기록된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고 있다.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것인지를 살펴보자.

1.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간절히 사모하라

첫째로,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갈급한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문장은 비록 수동태이긴 하지만 명령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 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성령을 모시기는 했고, 그래서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성령충만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거나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의 내주(indwelling of the Holy Spirit)와 성령의 충만(fullness of the Holy Spirit)은 차원이 다른 영적인 상태다. 성령을 모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만족하며 성령충만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 주일날 교회에 출석을 해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경주하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결심이나 능력으로만 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당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덧입으며 봉사를 해야 한다.

고린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갓난아이의 처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성령충만에 대한 갈급함이 부족했거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 이외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고전 4:8, 10). 그들은 성령 이외의 것으로 이미 배불렀다. 라오디게아교회도 예수님으로부터 비슷한 이유로 책망을 받았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성령충만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이사야 55장 1절과 2b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으로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그 분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치며 이르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갈증이 있어야 한다. 갈급한 목마름으로 예수님께로 달려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시원한 생수(living water)를 마셔야 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흡족히 마셔야 한다. 예수님이 인생살이에 지쳐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성령은 보혜사(parakletos)이시다. 보혜사는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대언자"(변호사, Lawyer)이시다. 보혜사 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에 풍성한 그리스도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고 좌절한다. 보혜사 성령님이 활발하게 활동하시도록 그 분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목마름과 갈급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간절하게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배가 고파 큰 소리로 우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듯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신다.

2.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 문제를 청산하라

둘째로,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죄(sin)와 공존하실 수 없다. 따라서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죄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감추어진 죄를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성도의 마음속에 죄가 있으면 성령은 근심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a)고 명령하셨다.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대로 죄를 자백하여 죄의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7)이라고 말씀하셨고,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라고 약속하셨다.

엄격하게 말하면 "회개"(repentance)는 예수를 믿을 때 한번 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면 뒷면과 같다. 회개는 죄로부터 그리고 불신앙의 삶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적극적인 방향전환이라면, 회개는 죄와 불신앙으로부터 유턴(U-turn)하는 소극적인 방향전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실 때 회개와 믿음은 회심(개종, conversion)의 순간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신앙적인 반응이다. 회개와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이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부자관계 혹은 부녀관계가 근본적으로 깨어질 수는 없지만, 그 관계가 심히 불편해진다. 하나님은 근심하시고 성도들은 의기소침해지고 번민과 괴로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열려 있다. "자백한다"(confess)는 말은 성령께서 하시는 (책망의) 말씀을 "반복해서 따라서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성령께서 죄를 들추어내시며 깨닫게 해 주시면, "예, 그렇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종류의 죄를 범했을지라도 진심으로 자백하면(혹은 통회자백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을 특권을 이미 누리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이미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으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죄를 깨우쳐 주실 때마다 즉각적으로 자백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도들의 양심이 청결해 있을 때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3.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굴복하라

셋째로, 성도들이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할(total dependence) 때 성령충만을 경험할 수 있다(Charles Stanley, The Wonderful Spirit-Filled Life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2], 47-8).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주인되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도인 내가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 비로소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된다. 성령의 능력 베푸심(empowerment of the Holy Spirit)이 없이는 성도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여야 한다. 성도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고 봉사하고자 할 때에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삶을 성령과 상관없이 성령의 도우심 없이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전적인 의존"의 의미를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다(요 15:1-8)(Andrew Murray, 『참 포도나무』[The True Vine], 김승진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50-8). 포도열매는 포도나무 가지에서 나온 곁가지에서 열리는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포도나무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포도나무로부터 오는 수액을 공급받아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또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단절되어 있어서는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신앙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포도나무 가지가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포도나무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에 철저하게 붙어 있는 상태, 즉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Abide in me, and I in you)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여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의 수액을 공급받고 있는 상태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영적인 상태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께 전적으로 굴복할(total surrender) 때,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Stanley, 48-9). "전적인 의존"과 "전적인 굴복"은 비슷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후자는 보다 의지적인 결단이 강조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나 자신의 의지와 야심을 전폭적으로 내려놓고(굴복, 항복, 포기),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긴 상태가 성령충만인 것이다.

인명구조대원(Life Saver)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필자의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사람이 깊은 강물이나 바닷물에 빠져서 익사의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아직 자기 힘으로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며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는, 인명구조대원은 절대로 그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경을 헤매는 그가 엄청난 힘으로 결사적으로 구조대원을 붙잡기 때문에, 아무리 유능한 구조대원일지라도 제대로 헤엄을 칠 수가 없어 자칫하면 두 사람 다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익사 위기에 있는 자가 스스로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구조대원에게 전적으로 굴복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탈진상태가 되어 스스로 헤엄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드러누웠을 때, 비로소 인명구조대원은 한 쪽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다른 한 쪽 팔로 헤엄을 쳐서 그를 강변이나 해변으로 이끌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자가 스스로 살려는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구조대원에게 전적으로 굴복할 때 살 수 있듯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살 수 있다. 이러한 상태가 성령충만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등의 명령을 인간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자기를 쳐서 자신의 야심과 계획을 성령님께 굴복시키는 삶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5:24-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4.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계속하라

넷째로,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계속할 때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견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비록 수동태이기는 하지만 현재시제이자 명령형이다. "현재시제"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령충만의 상태가 상실될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반복적으로 죄를 범할 때나 육체의 일들에 빠져 있을 때, 인격이신 성령 자체를 상실할 수는 없지만 성령충만의 상태를 상실할 수는 있다. 이러할 때 성령께서 근심하시고 성도를 책망하시면 곧 바로 돌이켜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밖에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기를 시작하면, 비로소 불편해 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된다. 특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체의 일들(갈 5:19-21a,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피고 기도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육체의 일들에 대해 진지하게 자백할 때, 성령이 성도의 마음을 주장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도의 내면적인 생각과 동기까지를 성령께서 다스리시게 함으로써 성령충만의 상태를 견지해야 한다(시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기쁨과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기를, 그리고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를 기대하신다.

은행에 1억원의 예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한도 안에서 얼마든지 현금을 찾아 쓸 수 있다(Bill Bright, "The Steps to Being Filled with the Holy Spirit," 1-2/5, https://www.cru.org/us/en/train-and-grow/transferable-concepts/be-filled-with-the-holy-spirit.7.html, 2018년 3월 12일 접속). 그는 돈 백만 원이 필요할 때 창구에 근무하는 은행원에게 백만 원만 달라고 "구걸하지"(beg) 않는다. 출금전표에 백만 원이라고 쓰고 당당하게 현금을 내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그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하나님은 예수 믿은 신자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명령하셨다면 누구나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기대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은행에 1억원의 예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한도 안에서 마음껏 현금을 찾아 쓸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신자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할 대상이 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저를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저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제가 저의 죄로 인해 죽어야 마땅한 자리였는데, 저를 대신하여 그리고 저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 지금도 살아계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저를 구원하신 분(My Savior)으로 그리고 저의 새로운 주인 되신 분(My Lord)으로 제 마음 속에 모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 덕분입니다. 저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제 마음을 성령의 전으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성령을 제 마음에 모시기는 했지만, 그 분을 중심에 모시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입으로만 저의 주인이라고 말해 온 것이 부끄럽습니다. 제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예수님을 저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음을 자백합니다. 염치없는 이 종이 감히 하나님께 아룁니다. 성령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하오니 성령께서 저의 마음과 행동과 삶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여 주옵소서. 이 종이 저의 주인됨을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예수님의 주인됨을 전폭적으로 인정합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저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세상 사랑하는 탐욕을 청결케 하여 주시고 저의 영혼을 성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행동하게 하시고 성령만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과 권능으로 담대하게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잃어버려진 영혼들에게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