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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뒤끝] 또 한 번의 슬픈 역사 맞게 된 소피아 성당
터키 정부, 소피아 성당 모스크로 쓰기로 결정, 세속주의 ‘결별’

입력 Jul 21, 2020 04:26 PM KST

Hagia

(Photo : ⓒ 사진 출처 = SCMP)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하기로 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먼저 개인적인 소망을 적고자 한다. 올해 소망은 터키 이스탄불 여행이었다. 이스탄불은 동서양이 만나고,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일찍부터 각광을 받아왔다.

무엇보다 소피아 성당은 세계적 명승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소피아 성당은 늘 동경해왔다. 이스탄불을 마음속에 둔 이유도 바로 소피아 성당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해외여행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행계획도 미뤘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10일(현지시간)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개원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달 24일 모스크 안에서 첫 예배가 열릴 것"이라며 "우리의 모든 이슬람 사원과 마찬가지로 아야소피아의 문은 현지인과 외국인, 이슬람교도, 비이슬람교도들에게 모두 활짝 열릴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그간 공부한 것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곳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간직한 소피아 성당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여러 가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에 염증을 느껴 해안도시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수도 이전은 보다 전략적인 판단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의 연결 통로였고, 당시 로마 제국의 호적수는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호적수를 견제하고,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는 로마에 필적하는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을 만들고 싶어 했다. 로마엔 카타콤(지하묘지), 성 베드로 묘소 등 초기 그리스도교 유적이 많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새로 옮긴 곳이라 별다른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피아 성당은 이런 필요로 생겼다.

소피아 성당은 서기 360년 완공됐다. 그러다 532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유스티아누스 1세가 신축을 명했고, 마침내 537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피아 성당은 1054년 커다란 분기점을 맞는다. 이해 로마 교회가 동방교회에 파문장을 던지면서 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갈라졌다. 이후 로마 교회는 가톨릭의 총본산 구실을 했고, 소피아 성당은 동방 교회를 떠받치기 시작했다.

소피아 성당의 지붕은 둥근 모양이다. 서방 가톨릭교회가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구친 모양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여성미를 뽐낸다. 십자군 전쟁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십자군이 소피아 성당의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낀 나머지 성당에 마구 낙서를 하고, 매춘부를 들여 술판(?)을 벌였다는 일화는 소피아 성당이 간직한 흑역사다.

오스만 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점령하면서 소피아 성당은 또 한 번의 부침을 겪는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5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메흐메트 2세는 병사들의 약탈을 눈감았다. 하지만 소피아 성당은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했다. 이때부터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성격이 바뀌고야 만다.

성당 정치화 나선 에르도안 대통령

근대로 넘어오면서 소피아 성당은 종교적 색채를 벗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제국이 기우는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들의 관심은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이었다. 특히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를 부추겨 터키를 침공했다. 당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이스탄불을 차지하면 그리스 정교회가 소피아 성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리스로선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터키 군부의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는 침략군을 격퇴했다. 케말 파샤는 이후 터키를 이슬람 세속 국가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소피아 성당에 대해선 그 어떤 종교적 상징이나 신탁도 필요 없다며 종교색을 뺏다. 소피아 성당이 박물관으로 개방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는 수도도 앙카라로 정했다. 실로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면 소피아 성당의 역사는 제국의 부침과 궤를 같이한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제국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흥한 도시였고, 새 주인인 오스만 투르크는 이 도시를 발판으로 유럽·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통치했다. 이후 터키가 근대국가로 넘어오면서 소피아 성당은 종교색이 빠졌다. 역사의 큰 흐름에 따라 소피아 성당의 운명은 달라진 셈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16년째 집권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따른 피로감, 경기침체 등으로 입지가 불안하다.

집권 초부터 이슬람주의를 들고나온 에르도안으로선 주지지기반인 이슬람 신도를 결집할 필요가 있었다. 소피아 성당의 모스크 사원 전환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결정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피아 성당의 모스크 전환 결정이 발표된 시점은 4년 전 군부쿠데타를 진압한 시점과 묘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문인 오르한 파묵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향해 "아야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다시 바꾸는 것은 터키가 더는 세속국가가 아니라고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나 같은 세속적인 터키인 수백만명이 이에 반대하며 울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12일(현지시간) 주간미사에서 "내 생각은 이스탄불에 가 있다"며 "산타소피아를 생각하면 매우 고통스럽다"고 털어 놓았다.

한국 개신교계도 목소리를 냈다. 진보 성향의 교단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4일 "성 소피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대성당으로 건축되었으며, 537년부터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청에 속한 성당이었다. 1934년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개조되었고, 이후 86년간 이 곳은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치의 상징적 장소가 되어왔다"며 "다시 이 곳을 모스크로 전환하는 것은 역사적인 퇴보이며, 성 소피아의 상징적인 의미와 존재 이유를 상실케 하는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터키정부가 성 소피아의 법적 지위를 예전과 같이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통치방식을 볼 때, 결정을 되돌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기 전 가고 싶다. 교회사에 관심 많은 한 사람으로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코로나19 상황에도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기 전 소피아 성당을 보려는 관광객도 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미처 가보지도 않은 여행지를 두고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피아 성당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슬픈 마음이 인다.

소피아 성당은 기나긴 역사에서 또 하나의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됐다. 슬픈 역사를 현장에서 느끼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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