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윤응진 교수의 기독교 교육 아키브 <바로가기 클릭>
눅 3:7-14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주현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주현절 기간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앞서서 복음을 선포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러므로 주현절 기간에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음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의 앞부분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활동을 시작한 연대가 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째 되는 해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황제가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디베료는 아우구스트 황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고, 집권기간이 서기 14-37년으로 알려졌으므로, 재위 15년째 되는 해는 서기 28년경으로 추산됩니다.
당시에 로마제국을 대표하여 유다지역을 통치한 인물이 본디오 빌라도 총독(26-36년)이었고, 이스라엘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한 분봉왕들은 헤롯대왕의 아들들인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 그리고 루사니아였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분봉왕이란 그리스어로 ‘테트라아르케스’라고 불렸는데, 지위와 권위가 왕보다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로마제국이 임명한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안나스(6-15년)와 가야바(안나스 사위)가 대제사장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70인 의회)를 운영하는 최고권력자로서 본래 1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도와 재정기여도에 따라서 임명되었는데, 로마총독은 임의로 대제사장을 갈아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실세인 대제사장은 로마제국의 하수인에 불과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이었는데, 성전제도를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겼습니다.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의 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퇴직한 후에도 후임 대제사장들의 배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저자는 안나스의 이름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요 18:12-24).
누가복음 기자는 왜 이렇게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을 세례요한이 활동한 역사적 무대의 배경으로 소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복음 선포와 가르침이 바로 이들 지배자들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더구나 4절에 소개되고 있는 예언은 구약성서 가운데 이사야 40:3-5(희랍어역)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기원전 550년 전후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때에 선포된 예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원, 곧 민족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4절에 인용된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여기에서 ‘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야훼’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유대인 포로들을 멀리 바벨론 땅에서 구출하여 광야를 가로질러 이스라엘까지 인도하실 것이므로, 그 길에 장해물을 치우고 해방의 행진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들은 세례요한의 사역이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로써 복음서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이 좁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그리고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그리고 종교적 차원에서 지배자들에게 억압받고 착취 받던 유대인들의 구원, 곧 인간해방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한 “기쁜 소식”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는 19절 이하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헤롯왕의 악행을 비판함으로써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처형되고 맙니다(눅 9:9, 막 6:14-29). 이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고난의 길을 걸은 선구자였습니다.
2. 회개하라!
세례요한이 한 일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3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매우 거칠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7).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을 향하여 의도적으로 거칠게 말함으로써,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르게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독을 간직하고 있는 독사처럼 악하고 파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되어서 로마제국의 억압적 통치체제 아래에서 서로 저만 살겠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독사처럼 독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자기 자신도 파멸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는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런 독을 제거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만 바꾸는 ‘회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가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버리고 철저히 새로운 방식으로 ‘방향전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여기는 신앙인들을 향해서 회개를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일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목사들이 불교신도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이벤트들을 벌여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께서 ‘회개’할 것을 촉구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이나 다른 종교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활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계에서 비기독교인들을 ‘회개’시키겠다는 선교적 시도들은 요한과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요한과 예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먼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 밖을 향해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 안을 향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아니, 너는 틀렸다. 아직도 멀었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해!”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8).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믿음생활을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조상 아브라함의 삶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조상의 공로로 하나님의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지금 당장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걷지는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는 회개한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비기독교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을 향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런데 세례요한은 회개의 행위가 세례라는 종교예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례는 회개와 용서를 상징하는 예식이지만, 세례를 통해서 표현된 회개가 진정으로 개인의 삶에서 지속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말은, 사회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새로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의롭지 못하고 착취가 구조적으로 자행되는 사회 한복판에서라도,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요한이 대답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 이 말은 참으로 처절하게 들립니다. 이 말은 요한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속옷 한 벌조차 없어서 저녁에 추위에 떨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분의 속옷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옷만이 아니라 먹을 것도 그렇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라도, 가난에도 불구하고, 서로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12) 세리는 로마제국을 등에 업고 유대인들을 착취하는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로마당국은 세금징수를 위해 지방세무관서에 하청을 주었는데, 세리들은 바로 세금징수권을 따낸 하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금징수를 통해서 수수료를 챙겼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몫을 늘리기 위하여 로마당국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초과징수함으로써 동족인 유대인들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직업 자체를 종교적으로 더러운 것으로 여겼고, 세리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요한은 부당이익을 포기하라고 요구합니다.
요한은 군인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
이 군인들은 아마 로마군인들이 아니라,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군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봉급은 아주 적었으므로, 부정한 수단을 통해서 생계비를 확보하려는 유혹이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직업상 흔히 저지르는 관행처럼 된 죄를 짓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폭력으로 돈을 뺏는 일, 권력을 등에 업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단하고,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요구한 ‘회개에 알맞은 열매’들의 사례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새로운 삶의 행동지침들은 모두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청은 오늘 대부분의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회개에 알맞은 열매”들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무나 헌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바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사회구조적인 부조리나 가난한 환경을 구실로 이 요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체제 아래에서 고난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체제의 앞잡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웃을 배려하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요한의 요청은 매우 긴박한 위기의식을 전제로 합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9).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후에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마 7:19).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 종교집단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일반인들의 비난과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의 범죄행위들과 일부 대형교회들의 문제들을 보면, 과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는 세례요한의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올해 들어서 한 달 반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우리사회에서 교회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뉴스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1월 첫 주일 오전 9시경에 모 대형교회 당회장실에서는 담임목사가 부목사들에게 폭행을 당해서 눈 주위 뼈가 부러졌다(연합뉴스, 2011.01.04).
- 연봉 6억 받는 목사의 치부, 어찌하오리까. 담임목사의 불륜문제 (오마이뉴스, 11.01.12)
- 어느 대형교회의 130억 운영권 다툼. 목사는 장로들 내쫓고… 장로는 담임목사 고발(조선일보, 2011.01.16)
- 성장통 앓는 대형교회들 ‘제2 소망교회’나올라(중앙일보, 2011.01.20)
- 추문 잦은 대형 교회 누굴 믿고 그럴까(시사저널, 2011.01.20): “연말 연초를 거치며 대형 교회들에서 잇달아 추문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신도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 목사와 부목사 간 폭행, 교회 권력을 둘러싼 장로·목사들의 다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지는 대형 교회들의 불미스런 사건은 한국의 일부 대형 교회가 여전히 물량주의·배금주의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교회를 '사유화' 개념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 서울고법은 목사의 지위를 이용해 미성년 신도 5명과 성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강모(65)씨에게 징역 9년을 선고했다(연합뉴스, 2011.01.23).
- 대형교회 부목사가 신도 돈 9억 7천만 원 가로챈 혐의 기소. “청와대 신우회 지도목사 명함 뿌리며 위세 부려” (한겨레, 2011.02.07).
- 승려, 목사, 신부 등 성직자와 수도자 등 직업 종교인들이 저지른 범법행위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폭력, 강간 등 강력범죄가 다수 포함돼 있어 종교인들의 도덕성 타락이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인 70명 중 1명은 범법자인 셈이다(서울신문, 입력 2011.02.09).
- 국내 최대 기독교 연합체(62개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이광선(67) 목사가 양심선언을 했다: “한기총은 금권선거로 병들었다. 깨끗한 선거를 하면 반드시 패배하는 것이 한기총 선거 풍토”이다. (중앙일보, 2011.02.10)
(이런 기사들을 소개하면서, 제가 목사라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제가 목사로서 설교한다는 것이 참으로 낯 뜨겁기 짝이 없습니다.)
위의 기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범죄행위들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당시의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귀족들이 저질렀던 범죄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때문에, 평신도들은 마음 둘 곳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먼 곳에서만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입니다.
그러면 평신도들은 어떻습니까? 장로님이 청와대에 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국회에도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큰 어려움들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어려움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스스로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은폐하면서 세상을 향해, 불교신자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추악한 종교지도자들의 범죄들을 폭로하는 뉴스들을 들을 때마다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처럼 분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이 우리를 향한 외침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한을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라고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울지마 톤즈” 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이태석(1962년 9월 19일 ~ 2010년 1월 14일)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지역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던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헌신의 삶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에 알맞은 열매”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대학교회는 때 묻지 않은 “무공해 교회”를 만들자는 꿈을 꾼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15년 넘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그 꿈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설교단에 오셔서 설교를 하신다면, 우리에게 뭐라고 설교를 하실 것인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아” 하실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우리를 꾸짖으실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세례요한의 예리한 설교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함께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 “무공해 교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시대에, 우리 대학교회와 대학교회를 이루는 교우님들이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는 희망을 주며, 우리 스스로에게는 보람이 가득한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