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분문
(요한복음 2 : 13∼22)
설교문
지난 6월 말 웁살라에서 모인 세계교회회의의 초청 강사로 미국의 흑인 소설가 제임스·볼드윈이 세계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자기는 침례교회 목사의 아들이나 기독교는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자기가 불신하는 까닭은 자기 아버지가 흑인 목사이지만 백인들에게서 받은 말로 할 수 없는 천대를 몸소 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교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이 받은 참혹한 학대의 실상을 낱낱이 들어 설명하면서, 그 한 가지 예로서 처음 흑인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짐승처럼 잡아 싣고 온 배가 "예수의 선한 배(Jesus's good ship)"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러한 기독교는 믿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속히 망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혁명은 이러한 기독교회가 망해 가는 것이 혁명이라고, 그리고 속히 망해 가야 한다고 전 세계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서릿발이 도는 고발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소식을 들을 때 매우 놀라지마는 이 이교도, 어느 의미에서는 반기독교적 작가의 고발이 바로 오늘 봉독한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정신과 일치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의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까지의 총본부요 심장이 되어 있는 성전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요 2:19)는 폭탄 선언을 하셨습니다. 왜 헐어버리라고 하셨습니까? 종교는 생명의 문제, 인생의 근본 진리를 중심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나 생명이 표현되는 데는 형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전을 짓고, 의식을 만들고, 제도를 세우고, 그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를 창조하고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정말 진정한 종교는 이 의식과 전통과 문화의 달팽이를 과감히 스스로 파괴하여 버리고 또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형식적 교회, 지금까지의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감히 그것을 깨뜨려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제일 처음으로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 드린 질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도 그 거하실 곳으로는 오히려 부족할 것인데 감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이오리까"(왕상 8:27)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성전 속의 종교가 되었고, 의식 중심의 교회가 되어버렸고,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은 교인이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세속주의 때문이 아니라 교회라는 벽 속에 들어앉아 기독교라는 달팽이 속에 틀어 박혀 자기 혁신을 과감히 못하는 바로 그 타락이 가장 큰 것입니다. 이 시대는 혁명의 시대입니다. 정치적 혁명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혁명이 일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교회만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오늘날 이대로의 교회는 분명히 한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대로의 교회는 분명히 새로운 꿈을 이 민족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대로의 교회는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할 기백이 없는 송장 같은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오늘날 야수와 같이 각박해 가는 인심을 저지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계층 간의 치열한 대립을 완화시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죄악의 물결만 막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물결 속에 떠내려가면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무수한 사람들의 애원도 보답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농촌 교회와 가난한 노동자층과 광산과 공장에 교회당만 세워주고 목사만 보내주면 예수 믿겠다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정선거를 한다고 호통을 지르는 교회는 부정선거를 하지 못하도록 국민을 계몽하고 교육하기 위해 국민교육을 하자고 하면 예배당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막아 버립니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그의 작은 아들들이 부랑자가 되고, 가난해서 굶어 죽어가고, 그의 딸들이 창녀가 되고, 길바닥에서 껌을 팔고 천대와 괄세를 받는데 어느 부모가 마음이 편해서 예배를 받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까? 만일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면 우리가 저 형제들의 저런 참상을 보고 통곡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가슴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동조하는 예배나 받으시면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낡은 교회요, 거의 죽게 된 교회요, 냉랭한 교회요, 이름만 있는 교회요, 겉치레만 하는 교회요, 무감각한 교회요, 말만 앞세우고 말만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삯꾼의 목자요, 소경같이 앞을 못 보는 지도자요, 잠자는 파수꾼이요, 눈이 어두운 지도자요, 외식하는 지도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오늘의 교회, 오늘의 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부업으로 믿는 자들이요, 신앙을 도덕적인 사치로 아는 이들이요, 맛 잃은 소금 같은 존재들이요, 불꺼진 등잔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이들이 철저히 개인주의자들이요, 공리주의자들이요, 사치와 쾌락을 일삼고 물질로 하나님을 삼으며 신앙을 사치품으로 아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은 몰몬 교도들의 정직과 열성도 없고, 여호와의 증인들 같은 선교의 정열도 없으며, 박태선교 만큼의 단결도 없는 교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 이런 교인, 이런 신앙을 그대로 자족할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암만해도 우리가 백년 들여 지은 이 한국교회라는 성전은 우리가 허물지 아니하면 과거 로마 군대가 와서 허물듯이 그 누구의 손에 허물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거죽으로의 교회가 허물어지는 것을 가지고 슬퍼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그 성전이 허물어진다고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돌아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성전을 스스로 헐라 그러면 내가 3일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시는 교회의 참 몸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더 명백하게 나타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의 역사가 허물어지고 또 다른 하나의 새 역사가 탄생하는 데는 시간이 요하고 또 해산의 고통이 뒤따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처지를 슬퍼하며 자기를 청산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버리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이 곧 낡은 종교를 파괴하려는 노력이요, 새 교회상을 창조하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현실을 슬퍼하고 새로운 신앙의 참모습을 찾아보고자 하는 이 간절한 마음, 내일에 대처하기 위한 새 교회상을 이룩하기 위한 염원이 불붙어 오르는 이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창조는 속에서부터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번 웁살라 세계교회대회 주변에는 세계에서 모여온 교회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경찰까지 배치했다 합니다. 그 청년들은 당신들이 쾌쾌묵은 토론을 하는 그 사이에 우리의 신앙은 질식해가고 있으며, 당신들이 논하는 교회는 우리들 세대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정도의 청년도 없습니다. 그러나 낡은 교회를 질타하는 세계 교회 청년들은 큰 소망입니다. 교회의 혁명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불광동 수양회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새로운 교회상을 찾아보려고 모임을 가집니다. 우리 초동교회 하나만이라도 우리 교회의 새 교회상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치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혁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천막집을 헐고 판잣집, 판잣집을 헐고 벽돌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 안팎으로 그 속에 도사리고 앉으려 합니다. 아, 나는 견딜 수 없습니다. 벽돌집이 아니라 황금궁전이라도 변화와 창조와 새로움과 혁신이 없는 잠자는 교회 속에는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새로운 은혜를 옷 입고자 하면 하나님께 매어 달려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없어서 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교인이 이런데 무슨 해결책이 있겠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고 나면 무슨 대책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네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마 2:18) 무슨 대책이 있는가 그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삼일 동안에 다시 지을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으셔서 다시 살아나심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대책, 교회가 잘 되는 대책, 새 교회가 되는 무슨 대책, 참된 교회 지도자가 되는 무슨 대책, 참 기독교인이 되는 무슨 대책 등등 ….
예수님 안에 대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음으로써 믿으면 해결됩니다. 예수를 죽기를 기약하고 믿으면 해결됩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해결됩니다. 교인들이 주의 교회와 주의 사업을 위해 죽기로 나서면 해결됩니다. 그러면 다시 살아납니다. 새 교회가 됩니다. 새 역사를 만들고 새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