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1889-1975)는 말하였다. “한 나라의 멸망의 요인은 외부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다.”
1800년대 우리나라 형편은 국가적 말기현상의 표본이었다. 극심한 당파싸움과 적대의식, 부정부패의 편만, 탐욕스러운 외세의 침탈 등 그 혼란과 불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그 시대의 큰 사건들을 꼽아보자.
① 신유사옥 1801-유교의 독선적 가치관으로 천주교인을 범죄시하고 집단 학살.
② 병인양요 1860-서구 제국주의 식민세력 침략에 의한 날벼락 같은 외환.
③ 인오군란 1882-통일되지 못한 군사제도로 인한 갈등, 구식, 신식 군대의 충돌.
④ 갑신정변 1884-급진적 진보주의의 미숙한 혁명과 실패로 인한 국가적 혼란.
⑤ 동학혁명 1893-오랜 세월 짓눌리던 농민들의 봉기가 외세에 의하여 분쇄 돼.
⑥ 청일전쟁 1894-나라가 미약하다 보니 엉뚱한 외국 놈들이 내 땅에서 싸우고 분탕질 쳐.
이러한 소용도리 속에서 집권세력은 갈팡질팡하면서도,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하여 오늘은 청나라에, 내일은 러시아에 빌붙어 자기들 세력을 확장하려 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의 세력은 어느 듯 우리 주권을 거의 다 잠식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중앙에서는 지방관 자리를 돈으로 사고팔아 치부하였고, 그렇게 한 자리 얻은 벼슬아치들은 또 백성들을 쥐어 짜내어, 힘없는 백성들만 착취당하고 짓밟혀서 온 나라가 한 때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 황해도 서쪽 해변 소래 마을에 이 땅에서 볼 수 없던 이상촌을 개척한 전설적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게 중요한 분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아서 더욱 전설적이다. 그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서 한양에서 판서(判書)라는 고위직에 있었던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는 혼란하고 한심스러운 정계에 환멸을 느끼고 왕도 한성을 떠나서 농촌으로 낙향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이 나라 백성의 근본인 농민들을 위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포부를 품고 선산(先山)이 있는 솔내를 찾아, 아들 김성섬 내외와 수십 명의 남녀 비복(婢僕)들을 거느리고 이사하였다.
송천리는 한양에서 북서쪽으로 380리 떨어진 궁벽한 바닷가 마을이다. 원래의 이름은 솔샘(松泉) 또는 솔내(松川)라 한다. 이 마을은 황해도의 명산(名山)인 구월산 끝자락에 불타산맥과 허룡산이 병풍처럼 둘려 있고, 그 아래로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여기저기에서 맑은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은 훗날 선교사들이 구미포(九美浦)라고 하는 해수욕장으로 개발하게 된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인가라고는 다 쓸어져가는 초가집 몇 채 뿐이었다.
김판서는 산자락이 가까운 [구석몰]에 99칸이나 되는 거대한 저택을 건축하고 그 집을 중심으로 온 마을에 부채꼴로 농지를 일쿠어 가기 시작하였다. ([몰]은 [마을]이라는 어미 앞에 접두사가 있을 때 흔히 쓰이는 우리나라 토속어이다. 즉 [앞 마을]은 [앞몰], [뒷 마을]은 [뒷몰]과 같은 경우이다.) 그는 청지기와 아들을 불러서 지시하였다.
“지금 이 마을이 몇 세대인가?”
“서른 세대쯤 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판 농지에서 그대로 농사짓게 해라. 그리고 농우(農牛)를 60마리쯤 사들여서 우선 30마리는 각 농가에 주어 농사를 짓게 해라. 또 신유사옥이니, 병인양요니, 하는 난리 속에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임 많이 있는데, 그들이 이 고장을 찾아오면 농지와 소를 나누어주어 원주민들과 같이 어울리게 해 줘라. 원래 이 땅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나라의 근본이니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을 농민들은 그러한 배려가 믿어지지를 않았다. 여지껏 모든 세대에 걸쳐 농민은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짓밟히기만 하였을 뿐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김판서를 하눌님처럼 받들게 되었다.
다음 세대인 김성섬이 이 마을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김성섬을 김좌수(座首)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그는 먼저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들을 중심으로 둑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샘들은 가뭄이 심할 때에도 마르는 일이 없이 늘 풍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길은 될 수 있는 대로 곧게, 마차가 볏가마를 싣고 서로 왕복할 수 있도록 넓게 길을 닦았다. 그리고 농토마다 물길이 잘 닿을 수 있도록 배수로를 합리적으로 정비하였다. 과거에는, 또 다른 지역에서는 이렇게 공공사업에 백성을 동원하면 모질게 일을 시키면서도, 삭을 주는 일은 없고, 겨우 점심 한 끼나 줄 뿐이었다. 그러나 김좌수는 마을 일에 동원된 농민들에게 일하는 동안 잘 먹게 하고, 반드시 정당한 삭을 지불하였으며, 자기의 소작인이라고 해서 말을 낮추어 하지도 않았다. 농민들은 황송하여 그 집안을 상전으로 받들려 했지만 김좌수는 전혀 교만하지 않고 소작인들을 친구로 대하였다. 그리고 아직도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차별의 악습이 잔재해 있는 시대인데도 나이가 많은 상민들에게까지 존중하여 상대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온 나라가 불평등, 불공평한 세상이었으나 소래 마을만은 별천지와 같이 평화롭고 행복한 고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터전에 머지않아 송천교회가 설립된다. 이 마을이야말로 예수의 복음의 씨앗을 기다리며 준비 된 옥토였던 것이다.
글: 박종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