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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신호대기 1분간의 풍경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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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거의 매일, 매우 자주 이동한다.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직장과 교회, 그밖에 시내를 나갈 때도 내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움직인다. 멀리 출타할 때 기차나 버스를 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이다. 언젠가부터 자동차는 내 일상에서 빼놓기 어려운 일부가 되었다. 여럿이 함께 탈 때도 있지만 혼자 타고 다닐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렇게 자동차로 거의 매일 나갔다 들어오면서 운전대를 잡는 내 손의 동작은 거의 본능처럼 공간을 휘젖곤 한다. 더러 흥분하여 그 동작이 거칠어지기도 하고 권태감에 시달릴 때면 운전대가 변덕스런 파격의 리듬을 타기도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일상 가운데 운전대와 나의 만남은 차분한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면서 직진의 나른한 시선을 변주하며 틈틈이 여운 어린 틈새를 빚어낸다.

그 여운이 성찰의 표정과 만나는 것은 꼭 신호 대기를 할 때이다. 급할 때는 그 적색 신호등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가끔 아주 정신없이 달려야 할 때는 아예 무시하며 무법자처럼 폭주한 적도 전혀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동차 운전 시에 나는 꽤 많이 정지한다. 신호 대기 1분 안팎의 그 짧은 시간은 더러 무슨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꼼지락거리는 우화처럼 내 긴장된 몸의 포즈를 자주 바꾸어준다. 발바닥으로 브레이크를 밟게 하는 붉은 신호등은 내가 자동차와 만드는 급한 속도를 제어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꼿꼿한 시선의 뻣뻣한 직선을 해체하여 두리번거리는 곡선을 만들어준다.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나는 고개를 돌려 비로소 창밖의 풍경에 주목한다. 중절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지나가고, 상큼한 교복차림의 여학생들도 까르르 웃거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지나간다. 자전거 타고 달리거나 멀리 뚱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아줌마의 알 수 없는 성급한 질주에도 넌지시 시선을 던져본다. 앞과 옆의 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나는 저 익명의 타자들이 섞여 움직이는 이 도시의 풍경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옷깃이 스친 것도 아니지만 창밖으로 내 시선이 풀어지며 비로소 주목하게 되는 그 낯선 군상들은 얼굴 생김도, 표정도, 몸매도 제각각 모두 다르다. 그만큼 그들이 만들어온 생의 사연도 천양지차의 곡절을 담고 있으리라.

차창 밖의 움직이는 풍경화처럼 떠오르며 미끄러지는 그 군상들은 내게 창밖의 거울처럼 내 자신을 낯설게 만든다. 나 역시 그들이 들키지 않게 몰래 곁눈질해봤자 얼마나 사소한 타자일 뿐이런가. 이처럼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짧은 신호대기의 그 순간, 저만의 안온한 그 공간에서 긴장이 풀어지는 동작의 작은 변화와 함께 비로소 의식 내부의 풍경이 되는 세상의 한 토막을 관찰한다. 그 풍경은 무미건조한 물상들이 꿈틀거리는 생명의 신기한 객체로 대상화되는 감각적 인식의 입구이다. 거기서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려는 생각의 꼬리는 이내 잘리고 만다. 다시 또 미끄러지며 속력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미완과 결핍의 상념이 관계 맺기의 초입에서 유산되고 만다. 그 귀결은 대체로 관음의 자폐적 곰삭임으로 흘러버리고 말지만, 그 여운과 함께 남는 가벼운 후유증의 생산성이란 것도 있다.

그것은 다들 외롭게 개체로 살아가는 이웃생명들이 익명의 낯선 공간에 교차되는 발걸음 속에서 무언가 절박한 자기만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직관의 소산이다. 굳이 대면하여 말하지 않아도, 시선이 쨍하게 부대끼지 못해도, 옷깃이 묵직한 느낌으로 스치지 않아도, 이렇게 굴러가던 성급한 바퀴가 멈추는 신호대기 1분의 늘어지는 자리에서 우리는 새삼 무의식이 번득이며 의식을 반성케 하는 묘미를 맛보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끔 우리는 타인을 부르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느린 시선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간절함을 담아 신호를 보내기도 할 터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의 세상이 궁금하여 가끔 제 몸을 획기적으로 일순간 도약시켜 화끈한 배치기로 세상을 힐끗 쳐다보듯이 말이다.

오늘도 자동차로 이동하며 나는 반드시 신호대기에 걸리고야 만다. 거기서 나는 버릇처럼, 그 짧은 여분의 시간 위에 멈춰 서서 어제보다 조금 더 새롭게 자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장 단단한 신앙적 확신의 끝자리에 별수 없이 동어반복적 질문으로 남는 이러한 밑도 끝도 없는 사춘기식 질문과 함께 내 팽팽한 의식은 풀어지고 무의미한 옹알이 같은 ‘아~’하는 언어의 틈새로 무의식이 다시 계면쩍게 고개를 든다. 이내 성찰의 여백이 또다시 제공되고 나는 그 순간 관찰하는 주체가 되어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직선에서 곡선이 된다. 신호대기의 강제를 무릅쓰고, 아니 그 신호에 전염이 되어, 나 역시 신호를 보낸다. 거기 걸어가는 분들, 누구세요? 어떻게 사시는가요? 넌 참 귀엽고 명랑한 아이 같구나. 당신은 정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군요. 뭔 일이 있는지 피곤해 보이시네요. 요즘 남북관계 아주 개판 아니에요? 아이고, 이번 학기 끝나고 하려는 계획이 왜 이리 꼬이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초여름의 저 푸르딩딩한 가로수, 이 거리의 자동차 매연에도 꿋꿋이 서서 대견하지 않나요? 담장에 늘어져 시들어가는 장미꽃의 애절한 저 빛깔도 소멸을 앞두고 잠시 아름답지 않던가요?  /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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