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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길에서][1] 겁 없이 떠난 여행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귀국하자마자 정신없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공부만 할 때는 흡족하진 못해도 기도도 공부도 질서가 있었다. 목회를 할 때도 아침마다 거울로 내 얼굴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취직이란 것을 하고 나니 내 계획대로 하루를 살기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잠시 pause버튼을 누를 짬도 없었다. 그리고 그간 내게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행복한 일도 많았지만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는 일도 생겼다. 게다가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내게 오랜 동안 겹겹이 쌓여버린 세상의 묵은 때들도 너무 많았다. 치유법과 탈출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장마가 한창이다. 오늘 하루 비는 잠시 멈췄는데 습도가 장난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밀려올 것만 같은 날, 아침부터 은행이며, 동사무소며, 아이 학원이며 다니면서 한동안 하지 못할 일들을 미리 챙겨두고 어제 밤늦게까지 생각하고 생각해서 묶어 둔 배낭을 어깨에 멘다. 꽉 찬 20리터 작은 배낭은 생각보다 가뿐하다. 배낭 안에는 카메라가 없다. 여분의 옷도 단 한 벌밖에 없다. 어젯밤 배낭을 챙기면서 주제넘게 두 가지 원칙을 세워 보았다. 첫 번째 원칙은 카메라 없는 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기록과 자료에 대한 나의 집착은 선친께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상자의 뚜껑을 열 때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받은 명함을 모두 모아두신 것은 아예 애교에 속했다. 초등학교를 포함해 당신이 다니신 모든 학교의 성적표와 기록들, 이제까지 받은 모든 상장, 감사장, 위촉장, 신분증, 학생증, 심지어 교복 모표와 이름표까지, 60년대부터 받았던 월급봉투들, 30년 넘게 다녀오신 모든 학회의 순서지들, 말라비틀어진 내 탯줄, 게다가 30년 넘는 교수생활 동안 학생들에게 받았던 모든 리포트들까지 빠짐없이 책장 하나 가득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유품들은 당시 내겐 차마 더 볼 수 없는 고통이었다. 연기처럼 왔다 가는 이 세상, 뭔가 자꾸 남기려는 마음조차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카메라와 기록이 없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기억이나 추억도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원칙은 속옷과 양말을 포함해 그날 입은 옷은 그날 세탁하고 2벌을 옷을 돌려 입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여동생, 처제, 특히 아내 덕분에 나는 옷이 정말 많다. 다들 한가닥하는 멋쟁이들이라 내가 대충 입고 다니는 꼴을 그냥 봐 넘기지 못한다. 게다가 학교와 교회를 왕복하면서 매일 목을 조여 오는 넥타이와 주름진 바지가 참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참에 이 거추장스러운 옷에서도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주제넘고 사치스러운 원칙들이었다. 덕분에 작고 가벼워진 배낭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주인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가려는 길은 삼남대로 전라도길. 제주 조천관 나루에서 시작하여 해남 이진항을 거쳐 한양 숭례문까지 이르는 삼남대로 중 전라도 길을 걷기 위해 2008년 7월 4일 나는 해남 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린 시절, 학기 내내 방학을 기다리던 나에겐 단지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이유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방학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의 가장 큰 이유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다 막상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면 그 첫날밤의 묘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서 내려왔는데 다시 되돌아가고픈 호롱불 흔들리는 그 저녁의 감정 말이다. 버스에 몸을 싣고 차가 출발하자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느끼는 그 감정을 고스란히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도중에 서너 곳을 거쳐 해남까지는 무려 5시간 30분. 긴 시간이라 앞으로 무리할 것을 대비해서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도 싱숭생숭한 기분은 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자 곧 내 마음도 밝아졌다. 게다가 버스가 늘 내 마음에 끌림과 미안함이 있는 전라도 땅으로 들어서자 나는 창 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지막한 산들과 넓은 농경지들,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마침 비온 뒤 피어오르는 뽀얀 안개 속으로 실루엣처럼 보여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차가 목포에 정차했다 출발할 때 버스 안을 둘러보니 그 많던 사람들 중 남은 사람은 할머니 한분과 나, 할머니마저 바로 삼호에 내리시고 나니 그 큰 버스는 나의 전용차가 되었다. 그러자 기사아저씨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아는 한 호남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나 광주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광주 분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한참을 나의 호구조사를 하시더니 대뜸 그러신다. “전라도 사람 다 죽일려고 한당께요!” 몰표를 받아 당선된 새 대통령을 향한 불만을 느닷없고 거침없이 드러내신다. 하지만 나는 그의 거시정치적인 한마디 속에서 이 분이 나에게 큰 신뢰와 친밀감을 갖고 계신다는 미시정치적인 것을 느끼고 놀랐다. 내 판단은 옳았다. 버스가 드디어 해남읍에 도착하자 기사아저씨는 내 손을 이끌고 도로로 나가더니 손짓, 발짓, 몸짓을 다 써가며 식당, 택시요금, 방향, 숙소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나를 내려주고 곧바로 경상도로 향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친절은 너무 고마웠다. 서둘러 다시 운전석에 오른 그는 활짝 웃으며 창밖으로 소리쳐 내게 인사를 하고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교수님, 절라도 인심 많이 느끼고 가쇼잉~”

1982년 겨울, 완도에서 제주행 배를 이용하기 위해 잠시 해남 땅을 두 번 밟아본 이래 25년만의 해남 땅이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배도 고팠지만 이 땅을 다시 밟은 흥분은 나를 번화가로 몰아가고 있었다. 내가 살던 분당도, 판교도, 가락동도, 내 고향 평택항도 10여년전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변해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남읍은 25년 전 그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개발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 대한 연민도 느껴졌다. 마침 기사아저씨가 알려주신 시골국밥집이 눈에 띄어 불쑥 들어가 국밥 한 그릇을 내라 했더니 정말 수도권의 세련된 맛과 달랐다. 아마도 아내가 여길 왔다면 숟가락 놓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오히려 시골스러운 그 맛이 일품이었다. 기사 아저씨에게도 하나님에게도 감사할 노릇이다.

국밥의 맛에 빠져 있다 보니 이미 한밤이 되어 있었다. 이제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 하룻밤 숙소를 위해 나는 다시 읍내를 한참동안 배회했다. 가격이 어떨지, 바가지를 씌우지는 않을지, 내부가 깨끗할지, 술꾼들이 시끄럽게 굴지 않을지 등등 쫌생이 새가슴은 한참을 망설이고 주저하다 드디어 오래된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걱정한 것보다 가격도 싸고 시설도 괜찮았다. 그제야 숙소를 정하는 데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대충 씻고 지도를 펴놓고 내일 일정을 확인했다. 어차피 뭔지 모를 감정에 잠도 쉽사리 들지 않을 터이니 내친김에 기도를 시작했다. 내일부터 펼쳐질 일에 대한 기대와 흥분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걱정을 하나님께 다 내어 놓고 편히 자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한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길 기대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자 잠이 솔솔 나를 꼬인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려고 할 무렵, 꿈인지 생시인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첫날 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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