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연구학기를 받아 이곳 샌 안셀모에 온 지 근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집필하기로 한 주석서를 계획에 맞춰 쓰는 일에 매일의 시간은 기계적인 리듬을 탄다. 목표치를 달성하고 나면 어깨를 펴고 창밖으로 잠시 눈길을 던진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참 무미건조한 오후다. 아침에도 출근하는 차량 이외에 거리에서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저녁나절이나 주말이면 운동하려고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지만 동네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어디 박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통 그 일상의 내막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에서 자동차가 신발과 다를 바 없으니 길가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 드물다는 게 별스러울 건 없다. 사람들이 무슨 사교모임이나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소그룹으로 움직이고, 아이들도 방학 중 캠프 모임 등을 통해 넓은 땅 어느 구석에 박혀 끼리끼리 어울리며 활동하리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이들의 만남은 '전문적으로' 직장에서 이루어지리라. 정장 또는 작업복을 입고 손님을 대하거나 직장동료나 상사들과 어울려 회의하고 토론하며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치열한 모임과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해진 시간을 마치고 스며드는 곳은 룸살롱이나 한국에 흔해빠진 그 호프집도 아닌 듯하다. 도심지로 나가면 그러한 환락의 명당들이 지하 요소마다 왜 없으랴마는 이곳의 중산층들은 대체로 조기 귀가형이다. 집에 들어와 앞마당의 잔디를 깎고 컴퓨터 서핑이나 디비디 영화를 볼 것이다. 다시 또 산악자전거를 끌고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주변의 구릉지대를 혼자 혹은 두셋이 소요하면서 빤한 소재로 일상적 형이하학의 신변잡기를 또 훑으며 편리한 교양과 주관적 경험담을 변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굳이 야외로 나선 그들의 행보는 실내 공간이 연장된 동선에서 맴돌 뿐, 도무지 생의 근본을 향한 탈주의 모험을 보여주지 않는다. 설사 그런 모험의 동선이 개척되는 순간조차 전문화된 제도권 지식의 울타리 안에서 교양의 분장과 함께 적절히 실내적으로 순환하며 관리된다. 나는 이들의 일상을 꾸준히 관찰하면서도 그 한 가운데 나도 모르게 억지로 동화되고 있는 내 단조로운 하루의 리듬 속에서 21세기의 새로운 인간형으로 실내형 인간의 탄생을 목도한다.
한국에서 실내형 인간은 그 현란한 핸드폰과 스마트폰의 나르시스적 공간에서, 또는 침침한 피시방이나 노래방, 소주방 등 각종 '방'의 전성기와 함께 그 의미와 보람을 극대화해나가던 기억이 아련하다. 물론 이러한 풍조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채 가속도가 붙은 한 시대의 관성을 심화시키고 있을 터이다. 자못 요란한 한국적 실내형 인간의 우선적 특성은 실내화해나가는 그 내면의 바깥조차 닫혀 있거나 바깥으로 설정한 여러 '방'들 속에서 특정한 틀로 표준화된 규범에 의해 일상의 삶이 갈무리된다는 것이다. 그 언어적 습관과 몸의 치장, 유행하는 술과 음식, 심지어 정치 현안에 대한 비판과 개인적 그리움이나 슬픔의 정조까지 닮아가면서 언론이 양산한 화제를 되먹임하며 그 시대적 풍경을 실속 없이 반복하는 것도 이런 계통의 유별난 점이다.
그러나 열정은 쉽사리 식기 마련이고, 사회적 인정투쟁의 각축장도 자기동일성의 모방욕망을 하염없이 되풀이하면서 시들어갈 때 내면화된 그 다양한 '방'들도 피로해지는 시점이 도래한다. 한동안 소통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각종 게시판과 토론방, 또 아이러브스쿨 등의 추억 나눔 공간이 예전만 못하게 시들해진 현상도 이 점에서 자못 시사적이다. 교회 내적으로는 대형군중집회의 자리마다 들뜬 확성기의 웅변과 찬송이 '할렐루야, 아멘' 일변도로 퍼지던 때의 향수가 아련한데, 이제 수도원의 침묵을 말하고 관상기도를 입에 담는다.
그러한 신품종의 기제를 통한 내면 성찰의 프로그램이 점차 질펀하게 어울리던 세속의 방들을 접고 고독한 실내형 인간의 가속화를 부추긴다. 일찍이 건강한 광장도, 안온한 밀실도 없이 흑백이념의 사각지대로 내몰린 <광장>(최인훈 작)의 주인공이 결국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3국의 도피행을 선택한 사연이 이제 일상 속에 점차 제 이야기처럼 공명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들뜬 한국의 대도시 유형이든, 이곳 샌 안셀모의 고적한 유형이든, 이제 실내형 인간은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쇼핑조차 집에서 인터넷 화상공간을 통해 하고 보다 나은 대안의 투표 방식으로 이런 화상공간을 이용하는 안이 새로운 계획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도보든, 자전거든,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이든, 길게 자신의 실내화된 자아를 바깥으로 끌고나와본들 거기에 소통의 창은 흐릿하고 난반사로 실내화된 동일성의 욕망만이 자신의 내면으로 헛헛하게 회귀할 뿐이다.
그 내면으로 향한 기계적 욕망과 화상 이미지의 촉수에는 일찍이 <데미안>(헤르만 헷세 작)이 보여준 자신의 근본을 성찰하며 응시하는 영혼의 시선 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가장 잘난 모습이 종종 전시되고, 그 반복이 민망해지면 시대의 영웅으로 떴다가 이내 잊혀져가는 대중스타나 성스런 고인의 칭송담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운다. 거기에는 '나를 좀 봐달라'는 아우성, 저 사람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내 감추어진 욕구를 발견해달라는 그 오래묵은 아우성의 메아리가 요란하게 번진다. 그 아우성과 메아리의 요란함에 비례하여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각종 실내의 '방'들은 아직 퇴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기도원과 부흥회 문화의 그 투박한 열정도 이제 세련된 치장으로 실내화되고 기계적 육체미를 풍기면서 부활하고 승천한다.
이곳 샌 안셀모의 밋밋한 일상 속에는 좀처럼 대중 영웅이 보이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웅변이 들리지도 않는다. 저녁 산보길에 흘깃 곁눈질로 포착되는 것은 작은 실내등 켜진 집집마다 명멸하는 실내적 미덕의 흔적이다. 그 미덕의 최대치인 양 프라이버시로 똬리를 튼 은근한 개인주의가 빼곡 얼굴을 내밀듯 말듯하다. 그 자리는 이미 근대적 주체가 생명의 향유를 충분히 만끽한 고요와 평안의 서식처이다. 비록 고독하지만 바깥으로 좀더 연장된 실내 공간으로 만족하며 전문적으로 일하면서 제 양식을 먹는 사람들이 저만의 공간 속에 이토록 즐비하다. 나는 그들이 오늘도 보이지 않아 궁금하여 그들 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더러 산길로 나서서 무료를 달래본다. 저녁나절이면 아내와 함께 골목길을 수색하듯 돌아다녀도 보는데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얼굴은 'Hi, Hello' 따위의 외교적 수사 이상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그것 밖에 보여줄 수 없는 건 그것이 마땅히 자신의 사적인 실내가 연장되는 정직한 꼴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한계속의 미덕이 살가워 나는 이 고요함을 고독하게 즐길 태세로 충만하다. 그러나 생명의 담론이 쟁쟁하게 얽히면서 태초와 영원, 무한과 종말의 서늘한 변방이 교차하지 못하는 빼곡한 그 실내의 틈새가 때로 아쉬워진다. 그 아쉬움은 점차 기계적인 노동속에 내가 소외시킨 내 주체의 바깥 공간을 향한 그리움과 관심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겠지만(류시화), 그대가 내 곁을 스쳐 지나도 너무 맹랑하고 빤한 모습에 그리움의 시원이 맥락을 얻지 못한다면, 하여 그리움조차 아예 내 자신의 자폐적 실내의 변용물이라면, 우리는 순정한 마음을 내어 비타산적으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내에서 주일마다 반복되는 하나님 찬양과 뜨거운 기도는 외교적 수사나 욕망의 구호를 넘어 무슨 중뿔난 의미로 너와 나의 영혼을 두드릴 수 있겠는가.
실내형 인간의 전성시대에 고독하게 배회하는 군상들은 오늘도 저만의 나르시스적 실내 공간 속으로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 밀실조차 가꿀 수 없는 소외된 심령들은 얼굴 없는 민표정을 지으며 안쓰럽기 그지없다. 거친 노동의 현장마다 자신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달라며 유령처럼 배회하는 이 시대의 바깥/타자들이 더욱 추워 보이는 까닭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저만의 편리한 실내를 몰고 다닐 뿐, 제 언어와 감각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아득한 타자로 호명되는 하나님이 먼 시간의 저편에서 손짓할 때 나는 훌쩍 이 우울한 시대가 씌워준 실내적 자아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밤이 깊으니 불빛 아래 글쓰는 내 실내공간이 자꾸 좁아져 간다. 저 바깥의 컴컴한 평지 위로 어젯밤 본 별밭이 가물거리며 이 불온한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보듬고 있으리라. /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