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조는 서상륜보다 여섯 살 아래의 동생으로서 본명은 상우(相祐)이며 [경조]는 그의 자(字였)이다. 의주에서 1852년에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에 부모가 병사하니 두 형제가 의지하며 살았다. 서상륜은 서당에서 공부하였으나 성격이 적극적이고,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하여 장사를 하다 보니 자연히 대외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였고, 서경조는 내향적인 성격으로써 가정 사정으로 정상적인 교육은 받지 못하고, 형의 서당 학습 자료를 얻어서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의 한서를 탐독할 수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분야의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에 형을 따라 중국에 가서 로쓰와 매킨타이어 목사를 통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일반적인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속국의 하인처럼 대하며 교만했었는데 예배 처소에 모인 사람들은 중국인, 조선인,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분위기를 보고 [예배당]이란 참 사람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역시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고 형을 따라서 전도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중서서원]에서 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된 서양 서적의 한문 번역서를 접하게 되어 학구열이 높은 서경조는 발전된 문물을 많이 섭렵하게 되었다.
그런데 형이 성서를 우리나라로 반입하다가 관헌에게 적발되어 쫓기는 몸이 되자 형을 따라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黃海道 長淵郡 大救面 松川里)로 오게 되었다. 송천리에는 이미 광산김씨 일가가 그 지역의 지도자 위치에 있어서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있었다. 서씨 형제는 김좌수 가분의 제 3대인 김윤방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를 기독교인으로 인도하였다. 김윤방의 협조로 교회도 건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니 이 글의 중심인 송천 지방의 수많은 인걸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신앙과 학문의 면에서 드높이 성장하게 되고, 하나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훈련받게 된다. 그리고 후에 그는 김씨 집안의 아들 하나를 둔 과부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을 서광호라는 이름으로 입적시키고, 후에 자신의 친 아들을 낳으니 그의 이름은 서병호이다.
그 때에 형 서상륜이 로쓰 목사가 제물포로 발송한 성경 6,000권을 인수 받아 갖고 오니 그 속에 있는 한문 성경과 신앙지도서 덕혜입문(德惠入門)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로마서를 읽는 중에 자신이 죄인 됨과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되고,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면서 신앙을 갖기로 결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의 생각을 따라 교회를 체계 있게 이끌어가기 위하여 한양에서 활동 중인 서양 목사님들을 만나려고 상경하였다. 그곳에서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상담하고 지도를 받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 형제를 사랑스럽고 귀하게 생각하여 진정으로 성실하게 지도하여 주었다.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에게 자기들의 송천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을 지도하고 세례를 베풀어 주기를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때 형편이 아직까지 선교활동에 자유로운 시기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자고 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던 중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목사도 용기를 내어 황해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방하고 중국에서 활동중인 로쓰 목사를 만나려는 목적으로 여행을 결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송천리를 심방하게 되니. 서경조는 그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자신의 아들 서병호가 생후 4개월의 젖먹이 애기였으나 목사님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심을 깨닫고 기쁨으로 그에게 유아세례(幼兒洗禮)를 베풀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첫 [젖세례]가 되었다. 그리고 소래교회의 교인 6명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선교사들은 서경조를 권서(勸書)와 조사(助事)로 임명하여 아직 정식 교역자가 없는 황해도 지역의 교회 행정과 지도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직위는 옛 시절에 임시방편으로 설정한 교회 임무로서 오늘날에는 사라진 제도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하여 언더우드 목사는 서경조를 소래교회의 장로로 임명하였다.
서경조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크고 깊음을 알고 소래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한양에서 선교사들이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어린이들을 양육하는 것을 본받아 소래교회 부설로 야학당을 시작하였는데 그 기관은 후에 해서제일학교(海西第一學校)가 되었다. 이 학교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가의 지도자로 양육 되었다.
서경조는 평소에도 성경 읽기를 열심히 하여 신자들을 지도하는데 유능하고 성실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는 일찍이 [서기록(書記錄)]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가 관여한 모든 조직체의 행사 기록을 자상하게 남기는 공로가 컸다.
그는 1904년에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젖줄은 평양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학교에서 과거의 교회 봉사와 학력이 인정되어 1904년에 3학년에 편입하여 정식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9월 19일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에서목사로 임직하였다. 목사는 노회에서 임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교회의 초창기이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여러 행정구역 단위마다 있는 노회가 아직 없고 오직 한 조직만 있었기 때문에 독노회(獨老會)라고 하였다.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이 이 독노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로 임직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서경조 목사가 연장자이므로 축도를 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우리나라 역사상 첫 축도가 된다.
서경조는 이제 명실공히 목사로써 언더우드와 함께 교회 개척의 일익을 담당하여 사면팔방으로 다니며 활동하였다.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 등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에 그가 관여하지 않은 교회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경기지역 순회목사로써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점당하게 된다. 그의 아들 서병호에 관하여는 후에 별도로 기록하겠지만, 장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하게 되니 서경조는 1919년에 그 아들을 따라 역시 이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돌보며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의 아버지로써 힘써 일하다가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로 그 고귀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글: 박종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