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2)

바. 제 2세대의 등장

1. 김필순의 유토피아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
1
 
광산김씨 제 2대인 김성섬 김좌수에게서 첫 부인이 아들 셋을 낳고 죽었다. 세 아들의 이름은 첫째가 김윤방, 둘째가 윤오, 셋째가 윤렬이다. 재취로 들어온 안(安)씨 가문 여인의 첫 아들이 김필순(金畢淳)이고, 그 다음 첫째 딸이 김구례(金求禮), 둘째 딸이 김노득(金路得), 둘째 아들이 김인순(金仁淳), 셋째 딸이 김순애(金順愛), 넷째 딸이 김필례(金畢禮)이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좌수 김성섬이 예수를 믿기로 결단함으로 말미암아 김씨 집안의 모든 자손 뿐 아니라 소래 온 지역이 믿음의 고장이 되었다. 서상륜, 서경조 형제의 영향력은 이 마을을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문명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언더우드를 위시한 선교사들이 이 마을을 자주 방문하여 주민들을 잘 지도하여 주었다. 김필순은 1894년에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적극적이어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기상이 있었다. 어느 날 언더우드는 김필순의 아버지 김성섬에게 제안하였다.

“좌수 어른, 저 아이는 아주 총명하여 잘 가르치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 아이의 교육과 장래를 저에게 맡겨 주시지요.”

“네, 목사님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제가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입니다.”
 
그렇게 하여 김필순은 언더우드를 따라 한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김씨 집안은 가세가 넉넉하여 소래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큰 몫을 감당하였지만, 교회가 운영하는 마을의 학교도 지원하여 그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은 양반 상민을 가리지 않고, 또한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다 공부하게 하였다. 그 학교에서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게 한학(漢學)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한양으로 보낸 후에도 그 학비를 다 조달하였다. 언더우드는 김필순을 자기 집에 기식하게 하며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게 하였다. 배재학당은 당시로서는 최신 교육기관으로써 특히 영어 학습이 우수하였다. 김필순은 그 학당에서 새로운 서구 문물과 신앙 교육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인재가 그 학당을 통하여 배출되었다.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남궁혁(南宮赫), 주시경(周時經), 신흥우(申興雨) 등이 다 그 당시의 배재학당 출신들이다.

그런데 김필순에게는 그의 어머니 안씨가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또한 미신적으로 조상을 모시는 관습이 못마땅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위하여 늘 기도를 드리고는 했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첫 번째 방학을 맞아 얼마간 고향에 돌아와 있던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 안씨는 우중충한 고리짝에 조상들이 대대로 입던 여러 가지 의상을 잔뜩 넣어두고는 절기마다 꺼내어 진열하고 고사를 지내고는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마을간 사이에 김필순은 머슴들을 시켜서 그 궤를 마당으로 끌어내다 놓았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 필례를 불러서 말했다.

“얘야, 이 옷들을 다 끄집어내라. 이것들은 다 쓸데없는 미신의 찌꺼기일 뿐이다. 우리 이것들을 없애버리자.” 

“오라버님, 어머니가 귀히 여기시는 것들인데 그래도 될까요?”

“중대한 결정은 큰마음을 먹고 결단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잘 못된 일이 언제까지나 이어질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는 부싯돌을 쳐서 그 옷들에 불을 붙였다. 이 때 막 마을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너희들 무슨 짓을 하는거냐? 조상의 유물을 불태우다니!”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다 같이 예수를 믿으십시다. 이런 것들은 다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에 결단을 내리세요.”

“아, 나는 이제 어떻게 조상님들을 대한단 말이냐! 큰일이구나.”

자기에게는 첫 아들인 필순이 하는 일이라 마구 야단만 칠 수는 없고, 조상님들께 죄송스러운 마음만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머리를 싸매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다음에 그는 용단을 내렸다.

“그 일을 내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 것 같다. 나도 이제부터 너희들을 따라 교회에 다니겠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참 잘 하셨어요. 예수님만이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여 온 가족이 다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후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읽기와 기도생활에 열성이었다. 훗날 어머니 안씨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가정이나 온 마을에 참 좋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체험하고, 자기의 이름을 안성은(安聖恩)이라고 고쳤다.

김필순은 막내 여동생 김필례를 특히 사랑하여 그녀의 신앙과 교육에 관하여 큰 몫을 당당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모르는 김필례에게는 김필순이 아버지의 역할을 다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다음 김필례에 관하여 다시 쓸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할 뿐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 김필순은 그 곳에서 4년간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특히 선교사들을 통하여 영어 학습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바, 그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훗날 세브란스 의학교로 진학하여서는 에비슨 교수의 통역을 맡아 하게까지 되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필순은 1899년에 제중의학원(濟衆意學院)으로 진학하였다. 그곳에서 의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새록스 교수의 조수 겸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에비슨 교수를 도와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고 나아가서 한글로 된 의학서적 하나 없던 시대에 우리 말로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많은 의학서적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학생 신분으로 후배들에게 의학서를 번역한 지식으로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제중원은 1900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병원과 의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04년에 준공하고 명칭도 [세브란스 의학교]로 바꿨다. 
 
김필순은 호탕한 사람이라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때로는 이성교제의 기회도 생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사실인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김필순이 한양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에게 빠졌다는 소문이 소래 마을로 흘러 들어왔다. 어머니 안씨는 그 소문을 듣고 큰 걱정에 빠져 매일 밤 뒷동산에 올라가 필순이 바른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안씨에게 그의 아들이 헛된 유혹에서 벗어났다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과연 얼마 후에 귀향한 김필순은 자기의 여인 문제가 다 청산 되었고, 이제부터 성실하게 학업에 진력하겠다고 말하였다. 
 
김필순은 제중원의학원에서 의학 공부를 할 뿐만 아니라 병원 경영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의료 선교사인 교수들의 조수 겸 통역자로서 일인 삼 사역을 감당하였다. 의료 선교사들은 김필순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키워 날로 유능한 의사로 성장하였다. 의학원 교수들의 기쁨과 기대는 말로 할 수 없이 컸다.

1905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목적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7년에 구한국 군대의 해산을 강행하는 수순을 밟아왔다. 이에 항의하여 보병 제1대대 박성환 참령(參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장병들은 무기를 들고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무기로 보나 훈련 수준으로 보나 일본군에 대하여 너무나 열세였다. 양군이 마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일방적 학살이 자행되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총상으로 죽어가는 우리 군대들의 피로 강물을 이루었다. 세브란스 병원 의사와 간호원들은 소달구지에 적십자 기를 달고 거리로 나가서 부상병들을 후송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김필순도 온 의료진과 함께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청년들의 아우성, 그러다가 죽어가는 광경을 보는 김필순의 가슴은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왜 내 나라, 내 땅에서 내 백성이 저 섬나라 애놈들의 총칼에 이렇게 무자비하게 희생되어야만 하는가! 아 이 나라는 어찌하여 자주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는가? 김필순의 마음은 분노와 애국심으로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 안씨는 막내 딸 필례와 함께 한양 큰 아들네에 와 있었다. 그가 그 집으로 달려가 보니 식구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의 하얀 의사의 가운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니 얘야, 어찌 된 일이니?”

“어머니, 지금 부상병 치료를 위하여 일손이 딸려 야단이 났습니다. 여동생들을 빨리 병원으로 보내주세요.”

“아무리 급해도 어찌 양갓집 규수들을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보낸단 말인가?”

“어머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지금 예절이고 체면이고 가릴 때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에요”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애들아 가서 오라버니를 도와드려라.”
 
그리하여 함라, 미염, 필례 그리고 조카 마리아까지 총동원하여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부상병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서 환자들을 간호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을 통하여 누이동생들과 조카 마리아도 애국심과 반일감정이 크게 치솟았다고 한다.

이 일 후에 김필순은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김구 등 기라성(綺羅星)과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 세브란스 의학교는 1908년 김필순을 위시로 한 7명의 의학도를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에비슨 교장의 애정 어린 지도하에 의학의 수련, 환자의 치료, 후진들의 교육, 의학서의 번역 등의 일로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일하였다. 그가 번역한 의학서적들은 오늘날 한국 의학계의 고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규칙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성경을 읽었으며, 가슴에서 울어나는 기도를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귀중한 일꾼이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 1909년 겨울에 안중근의사가 한일합방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기독교 지도자 600여명을 체포하고 고문하여 당시의 일본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날조하였다. 그리하여 그중 105인을 기소하여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등 신민회의 요인들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였다. 김필순은 주변의 동지들이 하나하나 체포되어 가는 상황을 보고 자신의 위기를 느꼈다. 그리하여 세브란스 의학원에 다음과 같은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잠적하였다.

[신의주에서 한 임산부가 난산을 하게 되어 왕진을 요청해 왔음으로 급히 출장 나갑니다.]그리고는 서간도의 통화현으로 떠나갔다. 그는 그곳에서 일단 조그마한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곳에는 신민회의 이회영이 조선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독립군의 기지를 만들 준비를 하였다. 김필순은 병원의 모든 수입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희사 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까지도 일본의 마수가 뻗혀 오게 되니 1916년에 몽골 에 가까운 [치치하얼]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또 일단 병원을 개설하여 생계 대책을 세웠으며,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조선인 정착촌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도의 땅을 구입하였다.

그의 고향 소래 마을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성섬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이상적인 마을을 이룩하였다. 그 곳에서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가 없었고, 농사꾼에게 농토를 나누어주어 살게 하였다. 조선 역사상 그 예를 볼 수 없던 이상촌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르러 조선은 일본 침략자에게 강탈당하여 그러한 이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땅과 주권은 본래 우리들의 것인데 분하게도 왜적에게 강탈당했다. 그 땅과 주권과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치치하얼에 조선인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계획하였다. 먼저 가난한 조선인 농부 30가구를 영입하여 땅을 분배하고 농기구를 보급하였다. 어머니 안씨와 이복형 김윤오와 여동생들도 불러들여 힘을 합쳐 일했다. 앞으로는 독립군 양성소도 만들어 우리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시키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귀한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 독립군 동지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통화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는 어느날 인사차 김필순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의 뒤를 한 일본인 의사가 따라왔다. 간호부가 그 손님을 안내하여 김필순에게 인도했다. (그 당시는 요즈음의 간호사를 [간호부]라고 칭했다.)

“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은 조선의 훌륭하신 의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의사인데 이곳에 개업을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이 구역에 조선 의사와 일본 의사가 나란히 병원을 운영하며, 또한 서로 협조하면 참 좋지 않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우리 서로 잘 해 봅시다.”
 
이렇게 하여 치치하얼에는 두 개의 병원이 병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며 의료 정보를 교환하고 도와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필순이 왕진 나가고 없을 때 그 일본인 의사가 찾아와서는 김필순의 간호부에게 말하였다.

“김선생님은 좋으신 분인데 너무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식사를 거르는 대가 많아서 몸이 약해 지셨더군요. 이 우유를 갖다 드리세요. 몸에 좋을 것입니다.”
 
그 옛날에는 우유가 고급 식료였다. 간호부는 선생님에게 좋은 것을 드리게 됨을 만족하며 김필순이 돌아온 후에 그 우유를 드렸다. 김필순은 고맙게 마셨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호부에게 의지하여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설사가 시작되더니 멈추지를 않았다. 그래서 밤새 신음하다가 결국 다음 날인 1919년 음력 윤 7월 7일에 조국 광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옆에서 돌보던 간호부는 울며, 울며 애통하였다. 그 일본인 의사라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그 지역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를 따라와 일하던 어머니 안씨를 위시한 온 식구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망지소조(罔知所措)할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자매들의 노력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하다가 이와 같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국땅에 한줌 흙으로 사라져 간 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훗날 조국이 광복된 후에도 그 친일 매국노들은 응분의 응징을 받지 않고 교묘한 정책과 음모를 통하여 그들의 세력과 권리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들을 계속 핍박하고 괴롭힌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김구, 조봉암,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된 대한민국 치하에서도 그들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한 맺힌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글: 박종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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