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갈아 돌아가라
본문 : 창 16:7-11; 눅 15:17-24
설교 : 김이곤(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금년 6.25는 6.25동란이 일어난 지 꼭 61년이 되는 날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우리는 ‘민족화해’에 의한 ‘남북통일’이라는 <지상의 과제>를 이루어내려고 만난의 노력을 다해왔었습니다. 그러나 ‘조국분단’이라는 이 불행한 현실은 점점 미궁으로만 빠져들었고, 설상가상,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사이의 ‘힘겨루기’라는 전혀 또 다른 불안감이 우리 민족의 앞날을 또다시 위협하고 있음을 지금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시점에 즈음하여 저는 오늘, 분단조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남북이 ‘민족화해’라는 대 轉機를 이룩하여 선진화된 통일한국을 이루어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향해 묻고, 또 감히!! 그 대답을 성서를 통해 들어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성서는 창세 이래로 오늘까지 ‘오직 하나의 대답 만’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 ‘오직 하나의 대답’은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남을 최소한 내 몸만큼은 생각해주면서 그 남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 그것만이 ‘민족화합’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그런 대답뿐이었습니다.
즉 성서는 그 서두부분인 창 2:18에서 이미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악하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었습니다. 말하자면, 人間이란, 태초부터, 서로 다른 두 인격이 합하여 가정도 이루고 사회도 이루며 국가도 이루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 잘 살려한다고 해서 잘 살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 오히려 혼자서만 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은 잘 살기가 오히려 더 힘들어지고, 급기야는 분열과 분쟁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케 된다는 것을 성서는 줄곧[間斷없이]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도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凡常치 않은 한 이야기를 통해 이 진리를 또 한 번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에겐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一夫多妻 社會였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아내가 둘 있었습니다. 정실부인은 ‘사라’라는 이름의 정통 이스라엘인 여인이었고, 둘째 부인은 이방나라 애급에서 사라의 ‘몸종’으로 데려 온 ‘하갈’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종’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는 ‘쉬프카’(שׁפחה)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단순한 ‘여종’이라는 말보다는 ‘대리모’ 또는 ‘씨받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중동 땅,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왕 때부터,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자기의 ‘몸종’을 남편에게 ‘대리모’로 내어주어 후사를 잇게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습’에도 일정한 불문율은 있었습니다. 즉 ‘대리모’로 데려온 ‘몸종’은 남편의 아이를 가지는 그 순간부터는 남편의 제2의 ‘아내’이므로 그녀의 여주인은 그 여자를 종 다루듯 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동시에 ‘대리모’로 들어 온 그 여인도 또한 자기가 임신했다고 해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거나 깔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또한 이러한 관습이 합법적으로 통용되었으며,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자기 ‘몸종’을 ‘대리모’로 남편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갈’은, 그런 관습법의 규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자 곧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주인 ‘사라’도 질세라, 그 여종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드디어는 그의 여종을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로,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의 평화공존’이라는 것은, 비록 일부다처의 사회에서라 할지라도 지켜지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그의 여주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끝내는 자기 조국인 애급 땅을 향해 도망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갈과 사라는 ‘함께 살지 못하고’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여인 사이의 이러한 갈라섬은 단지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았고 마침내 그 두 여인의 아들들의 갈라짐으로,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원수관계로 갈라지는 원인으로 확대되었고 또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라짐은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인들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 사이의 민족갈등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이 갈등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화해 불가능이라는 종교적 대립과 반목관계로까지 확대, 비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술이라는 지역의 길가 어느 샘물 곁은, 지리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 가나안과 이방 나라 아랍국들 사이를 경계 짓는 국경지역의 길로서 오늘 날 아랍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Mecca라는 도시로 가는 길 路上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점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메카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分岐點이었고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이스마엘의 이슬람교가 갈라지는 분기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도망친 그 길, 이젠,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가나안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그리고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인들과 이슬람의 알라 신앙인들이 영원히 증오와 갈등의 원수관계로 헤어지게 될 매우 중요한 지점인 그 길, 그 길의 어느 우물 곁에, 갑자기, 전혀 예상을 깨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이방 여인 ‘하갈’의 그 逃走하는 길을 가로막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의외의 사건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敵對관계에 있는 아랍국들의 국경지역인 술 지역까지, 그것도 유대 전통에서는 깡그리 무시해 버려도 전혀 문제될 것 없는 저 ‘쫓겨난 이방 여인 씨받이 몸종 하갈’의 뒤를 왜 저토록 집요하게 뒤따라오신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이었을까요?
혹 저 이방 여인 ‘하갈’이 복수의 한을 품고 되돌아 와, 선택받은 집안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을, 마치, 오늘날의 저 이슬람 자살특공대들처럼 폭탄을 가슴에 안고 “다 같이 죽자!”라고 하면서 자살테러 공격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셔서, 그래서, 여기 멀고도 먼 아랍 국경지역까지 저 이방 여인을 뒤따라오신 그런 것일까요? 성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과연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에 대한 이방인 여종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제 여주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하고 있습니다.” 이 대화 속에는 마치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인들이 심각한 인종충돌을 일으킬 것 같은 매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전혀! 의외에도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하갈아, 너는 네 여주인 사라에게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네 여주인의 수하에서 고통을 인내하며 함께 살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분명, 이 말씀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는 편애하시고 이방 여인 ‘하갈’은 차별을 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고 충분히 의심해 볼 수도 있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본문 끝에 나타나는 다음의 말씀은, 이러한 의심을 일시에 불식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갈’을 향해 “하갈아,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케 하여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많게 하리라.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이는 내가 네 고통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이방 여인 하갈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대단한 축복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진 말씀이었겠습니까?
분명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는, 이른 바, 종교적/이념적/인종적/민족적 갈등때문에 苦惱하는 지상의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선교’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너희에게는 비록 이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그러나, ‘참고, 함께 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민족화해를 이루는 관건이다.”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는 지금 여기서 듣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내하며 함께 산다는 것, 비록 이해관계가 충돌한다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그 갈등을 극복하며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민족화합으로 가는 필수 관문”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본래부터 성서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내하며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편익을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갈’을 향한 돌아가거라 라는 이 권면은, 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분명 그것은 ‘사라’와 ‘하갈’ 사이의 저 화해 불능의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결코, 그 무슨 强者인 ‘사라’를 편드는 길도 아니고! 弱者인 ‘하갈’을 편드는 길도 아닌! 오직! ‘함께 더불어 사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시려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동반되는 共存’ 이것은 태초에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던 그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숙명적 과제’였다는 것이 성서의 근본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을 향하여 최초로 하나님께서 던지신 말씀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여자여, 너는 남편을 지배하고 싶겠지만 남편도 또한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창 3:16) 즉 죄인 된 인간은 서로들 이웃을 지배하려고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는 길은 남을 지배하는 거기에 있지 아니하고 단지 돌아가 서로 손잡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 길’만이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조차도! 이 길, 즉 인간들이 그 버리고 떠나왔던 곳으로 ‘회개하고 돌아가는 길’ 그 길 이외에는 ‘다른 길’ 즉 ‘다른 대안’은 없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전지전능의 하나님에게도! 그가 우리 모든 인류의 한! ‘아버지’이시고 우리네 인간은 모두가 다 그의 자녀인 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 길은 오직 이 길, 즉 우리가 버리고 떠나왔던 본향인 그 아버지 집으로 뉘우치고 돌아가 서로 손잡고 더불어 함께 사는 길, 그 길 밖에는 달리 다른 길은 없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사라도 하갈도 ‘모두’가 다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의 궁극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예컨대, 이혼을 결심할 정도로 반목이 격렬해진 부부를 향해 “하나님은 남편의 편일까 아내의 편일까?”라고 묻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질문이듯이,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 이듯이, 또 고부간의 갈등이 폭발 직전에 있는 두 여인에게 “하나님은 시어머니의 편이실까 며느리의 편이실까?”라고 묻는 것도 또한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가 사라의 편이실까 하갈의 편이실까?”라고 묻는 것은 전적으로 난센스에 속하는 질문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라의 편도 하갈의 편도 되실 수가 없는! 그 둘 다의 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은 단지! 같은 자녀인 그 둘이 더불어 함께 살기만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미국편도 아니시고 중국편도 아니시며, 남한편도 아니시고 북한편도 아니신 것입니다. 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전능성’ 때문에 오히려! ‘이런 한계’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오직 단지! 사라와 하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저 인간갈등의 벽, 즉 이념갈등, 종교갈등, 인종갈등, 민족 갈등, 부갈등, 부부갈등, 등등의 그 갈등의 벽들을 우선 먼저! 허물기를 바라고 계실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내리신 축복을 하갈에게도! 내리시는 그런 분이시었습니다. “사라”만이 하나님의 딸이 아니라 하갈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삭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랍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본래부터 갖고 계셨든 本質이었습니다.
19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의 연초, 저는 나이 겨우 만 28세의 매우 젊은 나이에 몹쓸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어가는 자식을 참아 보지 못하셔서 제 어머님은 감히 저를 어떻게든 살려보시려고 하나님께 사생결단 매달려 기도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마침내 이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에 밀려 지치시다 못해 그만 자지러지시면서 하시는 말씀, “하나님 아부지예, 저 이곤이를 기어이 데려가실라캅니꺼? 그러시려면 차라리 저 놈 대신 이 늙은 애미를 ‘대신’ 데려가 주이소.”(경상도 방언)라고 하시며 문지방을 붙잡고 통곡하시던 그 어머니의 그 ‘모성’의 한계성을 통하여 저는 감히! 아,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계성이 지닌 逆說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기지 못하고 지신다는 이 역설, 얍복 강변의 절뚝발이 야곱에게도 하나님은 이기지 못하고 지신다는 그 전능성의 역설을! 저는 바로 저 어머니의 모습에서부터 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돌아가거라! 돌아가서 제발 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며 더불어 함께 살아라!”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갈과 사라를 포함한 온 인류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 민족이 ‘민족화해’에로 이르는 그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 뜻이었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온 인류 모두의 아버지시고 그리고 우리 모든 인류는 또한 단지 그분의 자녀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자녀들인 우리는 모름지기 그 도망쳐 나온 본향인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모든 싸움을 그만두고 단지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모든 종류의 인간갈등과 인간반목은 모두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근본 뜻을 역행하는 반역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힘의 논리’만 믿고, 또 ‘이념논리’만 믿고 사생결단 싸우기만 했던 우리는 그 모든 것 다 뉘우치고! 회개한 후! 하늘에 계신 우리의 한 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가 사라이든 하갈이든,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잘 지키고 있었던 신실한! 큰 아들이든,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다 삼켜버린 작은 아들 탕자이든, 그 누구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벗은 발로 달려 나와 반가이 맞아 껴안으시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환영의 잔치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와 한국국민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민족화해에 관한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