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3:1-6, 20-25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주님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아멘.
야고보서 2:14-17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2:28-31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아멘.
설교문
찬양 드릴 때 마다 느끼는 점은 주일날 예배 때, 또는 가정예배나, 집회 때 마음껏 찬양 부를 수 있고, 또 마음껏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들이 일본 식민지에 있을 때, 교회사 기록을 보면 가장 예배가 잘되고, 또 기도소리가 진지하고, 찬송이 크게 울려 퍼진 그런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 동네가 평양이었습니다. 지금 평양이 아니고, 옛날 평양입니다. 평양에서 부흥회가 있고, 예배가 많이 있었는데, 당시 교회사 책을 읽어보면 예배 때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 우리 새찬송가로 544장 『울어도 못하네』입니다. 내용은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입니다. 오늘 성가대가 부른 찬송은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뭐냐면 새벽마다 와서 하나님 이 땅에 독립을 주시고, 자유를 주옵소서. 마음껏 소리치는 것이 새벽기도고, 찬송은 하나님 아무리 울어도 안 되네요. 이것인 찬송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인들 생각에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 하니까 울지 않고 웃었으면 좋겠는데 웃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교인된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러면 어떤 성경말씀을 가장 많이 읽었습니까 하고 통계를 봤더니요, 예레미야서를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도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성경을 써가지고 ‘눈물의 예언자’라고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 땅이)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았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자나 깨나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을 조금 좀 자유를 주셔서 만족하게 살게 하시고, 복되게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가 누구한테나 나왔고, 예언자들은 특별히 이스라엘이 식민지로 사는 이유는 ‘죄를 지어서 그렇다, 회개하고 돌아서자’ 이 설명을 계속하는 거죠. 그 중에서 선지자마다, 사람성격이 다른데 예레미야는 말할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레미야가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눈물로 시를 쓰고, 눈물로 말을 했던 모든 것을 모아서 눈물의 장 몇 개를 모았습니다. 모은 것이 뭐냐 하니까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그 중에 한 부분을 오늘 저희들이 성경본문에서 읽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통하는 눈물을 흘려서 기도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나라 망했고, 모든 백성이 전부다 망했다고 믿고, 좌절 속에 희망도 없고, 고통이 심할 때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조금 살려 주십시오. 죽겠습니다. 이런 심정 가지고 자기 고백도 했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고백을 담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예레미야서와 애가서 한 번 읽어 보시고, 같이 눈물 좀 흘려 보세요. 눈물 흘릴 때 성경 말씀에 써놓은 걸 보면 언어 표현을 아주 정제된 표현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제가 너무 길어서 주보에는 다 쓰지 못했는데요. 여기 6절과 20절 사이에 몇 구절만 봉독해 드립니다. 하나님 내 백성이 예언자인 저를 얼마나 조롱하는지 종일토록 나를 놀려 댑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거지요? 쓸개즙으로 나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내 배를 채워줍니다. 먹을 게 없어서 쑥 먹고 삽니다. 돌로 내 이빨을 막 부수어버리고, 내 얼굴을 땅에 대고 지저 됩니다. 주는 평안이 없습니다, 행복은 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나오는 이 탄식뿐 찬란함 없고, 주님께 걸었던 마지막 희망도 이제는 거두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예레미야 애가서가 식민지 시절 한국교회 제단 마다, 주일 때마다, 새벽제단마다 눈물의 도가니로 변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이 나라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사랑하기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나라 사랑하기가 쉬운 게 아니고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면 나라사랑만 어려웠던 게 아니라 아마 이웃사랑하고 가족사랑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여러분 살아가면서 사랑이 좋은 줄로 많이 알고 사셨지만 경험 속에 사랑이 뭐냐 물으면 사랑은 아픔이다. 그런 경험 안 해 보셨습니까. 사랑하기에 보내야 되고, 사랑하기에 포기해야 되고, 사랑해야하기에 고통도 당해야 되고,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울어야 되고. 이런 경험 많이 해보셨죠? 개인이나 집단이나 같습니다. 예레미야애가서만 이런 경험한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시대마다, 지역마다 비슷한 울음의 고난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제가 식민지 시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조금 무대를 옮겨서 우리나라가 식민지에 살던 시절 그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살았나 제가 사랑 이야기 좀 할려고 합니다. 1920년~30년대에 흐르면 서양에서는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는 새로운 철학사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당대에 20년대에 출발해서 최근까지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조를 들라고 그러면 아마 실존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에서도 실존주의 철학. 그래서 1920년대 두 실존주의 거장이 독일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분들입니다. 한분은 괴팅엔이라는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하이데거(M.Heidegger)라는 사람이고요, 아주 당시 보면 엄청나게 강의가 좋았더군요. 또 한 사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있던 야스퍼스(K.Jaspers)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오늘 야스퍼스 이야기를 조금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20년대 의학공부를 해서 의사가 됐고요. 그러다가 교수로 부름 받아서 의학을 통해서 사람 몸을 치료하다보니까, 몸만 치료해서는 안 되겠고, 심리치료가 가능하고 정신 치료해야 되겠다 그래서 정신의학, 심리학 그러다가 어디까지 올라갔냐면 역시 철학까지 가야겠다고 해서 철학자가 된 사람입니다. 유명한 사람이지요. 이분은 20년대 교수가 되가지고 유명한 교수가 되었는데, 대학 다닐 때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게르투르트 마이어라는 여성인데, 이 여성이 유태인 처녀였습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유명한 하이델베르크의 정교수가 됐습니다. 책도 많이 썼고,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히틀러가 통치 하면서 나치당이 지배하고 첫 번째 내놓은 이야기가 유태인은 이등인간, 이렇게 시작 하더니 시간이 가면서 유태인들을 잡아서 아우슈비츠로 보내고, 포로수용소로 보내 가스실에서 죽이는 역할을 시작합니다. 야스퍼스의 부인이 유태인이었습니다. 1933년 이때 야스퍼스가 나치 등장과 함께 하나의 경고문을 받았습니다. 이혼해라. 이혼 안하면 신상에 해롭다. 사랑하는 아내보고 이혼하래요. 이 때 1933년이면 우리나라는 막 신사 참배가 강요 될 시점입니다. 한번 두 상황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와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독일에서는 자기나라 독재가 와서 유태인을 학살한다고 망령을 부리고 있고...이 때 야스퍼스가 생각을 합니다. 이혼해서 교수직을 유지하고 편안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결혼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인지. 그래서 ‘이혼을 거부합니다’ 했더니 33년 부터시작해서 한 1~2년 동안에 두 가지 조치가 내려집니다. 하나는 교수직 박탈, 두 번째는 출판 금지. 공부한 사람이, 연구한 사람이 책도 쓰고 강연을 해야 하는데, 책도 못 쓰고 교수직도 박탈당합니다. 그래도 이혼을 거부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유태인이고 나는 교수로써 유명한 사상가로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라는 이 말이 엄청나게 힘듭니다. 실존적으로 어렵습니다. 나치가 와서 물으면, ‘나는 나치를 반대합니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 한 마디가 나치에게는 엄청난 저항입니다. 사랑은 저항입니다. 아내를 향해서 하는 사랑은 애틋한 순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사랑이라는 말은 엄청난 고뇌요, 슬픔이요, 아픔입니다. 사랑은 쉬운 게 아닙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예레미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요 모두가 다 예레미야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다 박탈당하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도와주어서 1942년에, 한 10년 쯤 지났지요. 이 사람이 스위스에 망명하기로 하고, 스위스에 허가를 받습니다. 바로 옆 나라이지만 독일 정부가 허용해야만 망명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독일 정부가 허용했지만 조건부 허용이었습니다. 40년이 넘어 가니까 부인은 그냥 하이델베르크에 남겨 두고 혼자만 가라. 그래야 나치 비판도 안 할 거고. 발목을 잡아 두는 겁니다. 갈까 말까 하다가, 차라리 혼자 가서 편안하게 사느니 아내와 함께 고통당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망명 계획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유태인을 색출하기 때문에 살 수가 없어서 자기 아내를 친구들한테 부탁을 해서 숨겨 줍니다. 아내가 친구네 집에 숨어서 살았답니다. 이 사람은 그동안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치가 마지막 계획을 세워서 이 야스퍼스의 아내를, 유태인 아내를 1945년 4월 14일 하이델베르크를 출발하는 기차에 실어서 아우슈비츠에 보내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이 결정을 알게 된 야스퍼스는 아내와 함께 유서 비슷한 결단을 합니다. 당신이 숨는 집에서 발각이 돼서 이 기차에 타게 되면, 당신은 목숨을 스스로 끊어라 나도 목숨을 끊겠다. 공동 자결을 하려 합니다. 그리고 숨어 있습니다. 참 이런 얘기들 역사에 많은데요.1945년 4월 14일인데, 1945년 5월 4일이면 독일이 항복하는 날입니다. 한 20여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일 되기 보름 전에 45년 3월 30일 하이델베르크 시내에 연합군의 하나인 미군이 진주해서 하이델베르크를 해방시킵니다. 14일 앞두고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아내와 함께 살아나서 자기가 했던 모든 철학 심리학, 이 모든 것을 새롭게 쓰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얘기는 제가 철학 이야기가 되니 안 하겠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참 아프다. 사랑하면 승리한다. 하는 이야기를 이분이 쓴 여러 가지 책 속에서 표현합니다. 사랑은 이긴다. 병상에서, 연구실에서, 어디서든지 이기는데 이 사랑은 어느 한 나라의 사랑이면 안 되고, 온 우주가 이 사랑을 출발로 해서 같이 섰으면 좋겠다. 그분이 이다음에는 스위스로 다시 가서 바젤 대학에서 마지막 생을 마칩니다만, 세계를 위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철학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제가 드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아픔을 동반하는 사랑이 참 진실 된 사랑이다 하는 것을 되새겨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저희들한테도 있고 세상 어디나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의 훌륭한 사상만 접목할 게 아니라 살아온 사실적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다 받아서 한번 우리와 맞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의 생활은 좋았나요. 하나님의 아들은 행복했나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묻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고 성가대 찬양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대답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서 말씀 여러 군데 있습니다만,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거다. 두 번째는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거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요, 전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첫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을 예수께서 뭐라고 했냐면, 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렇겠지만. 이 말은 신명기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 말씀의 인용입니다. 신명기 6장을 딱 펴면 4절에, ‘들어라 이스라엘. 쉐마 이스라엘!’ 이 전체를 쉐마라고도 표현합니다. 들어 보아라. 귀를 쫑긋하고 들어라.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하나님을 이마에도 붙이고, 손목에도 붙이고, 문설주에도 붙일 정도로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래야 산다. 이게 이스라엘이 받은 명령입니다.
아마 야스퍼스는 유대인 아내와 함께 신명기 이야기를 아침마다 밤마다 불렀을 겁니다. ‘쉐마 야스퍼스! 쉐마 그리스도인들아!’ 하나님만 사랑하면 생명이 주어진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내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마.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해라. 모든 인간들아 그래야 사느니라. 두 이야기를 예수께서 인용하시면서, 이 이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 예수님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천년이 지난 우리에게 다시 ‘쉐마 코리아! 쉐마 경동교회!’ 하나님만 사랑해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그러면 산다. 그런데요,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살기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 예레미야 성경 말씀을 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싶어서 하나님이 가까이 왔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이 죄를 지어서, 죄 없이 사랑을 하고 싶은데 죄 때문에 사랑을 못 합니다.
죄는 무슨 죄악이냐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입니다. 죄 값을 치루지 않고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분신인 예수보고 네가 죄 값을 대신 지어라, 그리고 십자가를 지어라 하고 예수를 보냅니다. 예수는 그 죗값을 십자가에서 다 받아냅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데, 너무 아픕니다. 죽어야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 하시지만, 이 분의 사랑 방식은 너무 아프고, 너무 힘들고 울음 정도가 아니고 너무 심각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면서 나는 이만큼 사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셨듯이 너희도 사랑하라. 그러면 산다. 애타게 우는 생명 때문에, 생명 때문에 우는 모습이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요즘에 언론 보도 보았더니 카다피가 그것도 하수구에서 나오면서 한 대 얻어맞고서 살려 달라고 ‘쏘지마, 쏘지마’ 저는 표현 잘 모르겠습니다. 왕 중에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수구에 묻혀서 쏘지마 하는 표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죽음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슬퍼서 울어야 하는, 울어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말 아쉬운 죽음도 이 세상에 많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수 많은 사람이 죽어가기도 합니다. 어느 죽음이 좋은지 여러분이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회초리를 들어서 치는데, 우리의 죄는 다 회초리로 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를 바라실 때, 방법이 좀 다릅니다. 네가 받아야 할, 사랑하는 네가 받아야 할 진노의 대가를 나도 함께 당하마. 사랑이 힘들지만 힘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당합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서 아이를 키울 때 매 들어보셨어요? 저 많이 들었습니다. 반성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매 들을 때, 이 매를 치면 우리 아이가 울고 아파할 텐데 내가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제 어머니가 제게 매를 치면서 어머님이 내 매를 치라며 자기 다리를 쳐서 피가 났던 것을 제가 기억합니다. 그 분은 내가 죗값을 치지만 죗값의 상당 부분을 아니 전체를 내가 대신 받고 싶다 이렇게 아프게 사랑하고 싶다. 저는 매를 드는 것이 잘못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매 드는 사람은 맞는 자기 자식의 아픔을, 사정을, 때리는 부모가 함께 감당할 수 있으면서 매를 들으면, 부모가 자식이 매에 대해서 반항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이 매 드는 것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그것은 질문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잘못하는 자기 학생의 잘못에 대해서 벌을 가해서 매를 들 되 그 벌을 선생이 나눠 함께 감당하겠다고 매를 들면 어떤 학생이 그 매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사회의 논란은요, 매 드는 것이 폭력으로 조명하는 것만을 논란하지, 매 속에 담긴 진한 사랑은 얘기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아픈 조우는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깊은 뜻은 얘기 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을 토론 하면 우리 사회는 거죽 핥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왜.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기 때문. 그 사랑을요 뭐라고 야고보서는 표현하느냐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말고 믿음이라고 해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이라 하지 말고 믿음이라고 해라.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그것을 믿으시면 나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는 구원이 있는가 하면 구원을 혼자 받는게 아니고 같이 받지 않느냐. 옆 사람과 같이 받지 않느냐. 그래서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받는 믿음의 구원과 함께 받을 구원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 자 같다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을 믿는 것(세로), 이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끼리 나누어서 함께 믿는 것(가로),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두 가지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없는데요.
오늘 예수께서 오시면 첫째로 하나님 사랑, 둘째로 이웃 사랑, 셋째로 너 자신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 속에 너 자신을 사랑하여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열 줄 알잖습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학하지 않잖습니까. 자학하는 사람은요, 자기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가둬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 그렇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가 믿기에, 가장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진실 된 자기를 찾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자기를 찾습니까. 어디 이웃이 있다는 겁니까,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고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역도 성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믿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오늘 야고보서는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행함이 없는 믿음 이렇게 말합니다. 행함은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없는 하나님 사랑은 믿음을 하나님이 서운해 하십니다. 아파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서 하나님 사랑 듬뿍이 받았다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고맙지요. 이웃이 고맙고, 자기 자신이 고맙지요. 그럼 그것을 하나님한테 찾아가시면 됩니다. 감사하면 됩니다. 함께 고백하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