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경재] 고 박순리 서남동 목사 사모 발인예배 설교문

세 번째 생일(고후 5:1-5)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본지 자문위원)..
우리는 여기 지금, 우리들의 사랑하는 어머니요 할머니, 우리들이 존경하는 사모님이요, 그리스도 몸인 교회의 성도이신 고 박순리님의 영결식을 거행하려 모였습니다. 제가 1959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 고인의 부군이신 서남동 교수께서 연세대학교로 옮기시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사모님을 수유리 캠퍼스에서 자주 뵈었습니다. 사모님은 우아하시고 귀부인같은 단정함과 부덕을 갖추시어 학생들은 모두 먼발치에서 뵙기만 해도 존경스러워 했지요.
  
학문에 심취하시어 연구만 하실 줄 알았지 가정에 식량 떨어져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남편 서남동 교수에게 한번은 항의하는 뜻으로 사모님께서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집에라도 가려고 집을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집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서고 보니 저녁 해 질 무렵 막상 갈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다시 수유리 교수사택으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말씀하셨던 회고담을 들으면서, 뒷날 제자인 한신대 교수들은 박봉에 시달리던 스승교수님들의 어렵던 시절을 회상하고 웃음을 나누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발인식 예배 집례를 맡은 목사는 ‘영결식’이네 ‘장례식’이네 하는 전통적인 교회예식상의 용어를 쓰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믿음의 빛에서 보면, 오늘은 고인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날”이요, 낙원에서 그리던 주님을 만나고 남편 서남동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영광스런 영적 몸으로 태어나시는 ‘제3의 생일날’ 이기 때문입니다.
  
‘제3의 생일’이란 말은 최근 90세 되신 유동식 교수님이 ‘대화문화아카데미’가 주관했던  ‘내가 믿는 영생과 부활’이란 콜로키움에 참석하셔서, 담담하게 당신의 실존적인 ‘죽음과 영생’에 관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서 다시 한번 각광을 받았던 화두였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지만, 유동식 교수님 부인은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유 교수와 행복하게 해로하시다가 별세하기 몇 년 전에, 암을 얻어 수 년간 고통을 견디시고 투병하시다가 먼저 소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유 교수님의 증언에 의하면, 돌아가시던 날  그렇게도 말기암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시던 부인께서 그날은 얼굴도 밝고 맑으셨고 통증은 고요하게 잦아들었는데,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유 교수님의 팔에 안기신 채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더랍니다.

“여보, 내가 먼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세 번째 생일을 곧 맞이할 거예요. 첫 번째 생일은 엄마 탯줄 끊고 세상에 탄생하던 생일이요, 둘째 번 생일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고 거듭남 받던 생일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번 세 번째 생일은 이보다 더 밝은 세상에서 곧 태어날 거예요”라고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말씀하더랍니다.
  
그 말하는 모습의 얼굴이 정말 거룩한 천국 영광의 빛을 반사하듯이 평화롭고 기쁨에 찬 얼굴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 교수가 자신의 고백을 하는데, 자기는 사람이 죽으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몸으로 덧입혀져 영체로서 변화되고 빛과 생명과 평화의 생명질서에로 옮겨간다고 믿는다”고 고백하시더군요.
   
90세 되신 노교수가, 그 나이에 무슨 자연사 죽음이란 게 두려워서 교리적 고백을 복송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질서가 그렇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고, 역대 존경하는 신앙선배들의 확신이 그렇고, 자신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 나이 90이 다 되면, 삶과 죽음의 두려움 그 경계도 다 없어지고, 도리어 본성대로 말한다면,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에서 나왔다가 자연에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양의 종교들은 모두 그렇게 말 합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끝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제3의 탄생’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생에 대한 집착이나, 여한이 많아서 그러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그렇게 오해할런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비밀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본문대로 말하면,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후5:5) 우리들의 유한성을 불안해하는 아직 덜 성숙한 인간들의 ‘환상적 기대’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요, 선물이요, 초청이요, 보증이요, 새창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7년 전, 서남동 교수가 우리 사모님을 야속하게도 이 지상에 남기신 채 먼저 그 곳으로 옮겨가시던 날, 죽재선생을 끔찍이 사랑하시던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써놓으셨습니다.
 
“죽재의 영결식은 수유리 한신대학원 예배실에서 거행했다. 1984년 7월 21일 오전 10시였고 장지는 금촌 기독교 공동묘지였다. 장공도 따라갔다. 84세의 늙은이로서 비례(非禮)랄지는 몰라도 끝까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관식 예배에서 내가 축도하고 그리고서는 흙이다. 모두 한 줌씩 한 삽씩 흙을 관 위에 덮는다. 그의 명정에는 ‘고 죽재 서남동 목사 지구’로 명기되어 있었다. 죽재는 과연 흙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일까? 나는 분노를 느꼈다. 그의 몸은 흙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전이다. 다만 이제 그 성전이 승화됐을 뿐이다. 나는 그의 몸 위에 흑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떼이야르 샤르뎅이 말하는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계속 일할 것이다.”
 
장공의 자서전 <범용기> 일기장에서 베껴온 글입니다. 84세 된 장공, 산전수전 다 겪은 장공이 그 따위 죽음이 두려워서 ‘분노’를 느꼈다고까지 일기장에 써 놓았을까요? 이제 박순리 여사님은 장공이 말한 인간의 이성이 다 파악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세계,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제3의 생일맞이를 하시는 것입니다.
  
죽재 서남동 선생도 생존해 계실 때 신학자로서 제3의 성령의 시대란 말을 좋아하셨습니다. 성경엔 제3의 숫자에 신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제3일에 부활하셨다, 장공의 <제3일>이란 잡지 이름, 인류문명의 제3의 길을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3은 수비학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수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과 문학과 신화에서도 3은 문턱을 넘어서 다른 차원으로 통과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무엇인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는 카이로스를 의미합니다.
  
만세삼창으로부터, 가위바위보로부터, 3인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3이 들어가는 곳에는 통과, 재탄생, 변화, 성취가 뒤따릅니다. 3이라는 숫자는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암블리코스는 말하기를 “삼(3), 트리아드는 모든 다른 수를 능가하는 아름다움과 공정함을 가지고 있다. 삼은 하나의 잠재성이 최초로 현실화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햇빛의 순수한 백색광은 3원색의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영결예식은 슬픔으로 어머니를, 사모님을 보내드리는 예식이 아니라, ‘제3의 생일’ 맞이하시고, 빛의 세계 보다 더 투명하고 사랑과 선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세계에로 들어가시는 날임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는 바울의 말씀이 오늘, 아니 이미 박순리 성도에게 이뤄진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에서 날마다 느끼며 지상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 가시겠지만, 우리도 그 빛의 세계에 들어가는 날까지 순례자의 길을 힘있게 걸어가기로 다짐합시다.
 
성령의 위로와 소망의 은사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12일 오전 7시, 강동경희대의료원 장례식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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