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지난 4일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한국교수불자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 ‘믿음과 수행, 그 접점을 찾아서’에서 개신교 측에서 대표로 발제한 정재현 교수(연세대 신학과, 종교철학)의 발제문 <믿음과 삶- 기독교에서 수행이 지니는 뜻과 더불어> 전문을 그의 동의를 얻어 총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발제문에서 정 교수는 믿음이란 우리의 삶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관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음 또는 행위/수행의 차원이 믿음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구성을 위한 본질과 정체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사뭇 그 성질이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수행’ 간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그 접점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2.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정체의 원초적 편향성
▲정재현 연세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그렇다면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은 앞서 살폈던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과는 정반대로 막상 대답을 하려면 너무도 막연하다. 믿음과 ‘무엇’을 이으면서 나올 수 있는 두 개의 물음들이 이토록 대조적인 형편에 처하게 되는 것이 꽤 오묘한 일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의나 인정, 또는 수용인가? 아니면 참여와 행동인가? 혹 그것도 아니면 느낌이나 기분인가? 이것만도 저것만도 아니라면 도대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을 믿고 있을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물음이 이렇게 되면 더욱 막연해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믿음을 무엇으로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도 좋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서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자리하는가?’를 물어도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다면 대체로 ‘마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답의 옳고 그름은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느끼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며, 뭔가 뜻을 품는 것도 역시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뒤져보아도 좋겠지만 역시 이 셋 중 어느 하나로 추릴 수 있다. 마음을 굳이 정신이라고 한다면 생각과 느낌과 뜻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지는 정신의 세 요소인 지성(知性)과 감정(感情), 그리고 의지(意志)로 각각 정리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일어나는 자리로서의 마음이 이러한 갈래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믿음의 얼과 꼴이 또한 그러한 마음의 갈래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생각하는 마음자리에서 믿음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추리고 받아들이며 새기는 것을 가리키지 않을까 한다. 성경공부나 교리학습을 중시하는 태도가 좋은 예에 해당한다. 또한 느끼는 마음은 예배나 부흥회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통한 정서적 감동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뜻하는 마음에서 믿음은 삶의 실천을 위해 도덕을 강조하고 실천적 행동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들은 공히 믿음의 요소들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개개인 안에서는 마음을 이루는 이 세 요소들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집중적이리만큼 쏠려있는 모양새를 취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 쪽으로 쏠린 채로 지어졌거나 생겨먹었다. 그러기에 세 요소들에 따른 성격과 심리유형분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인간의 정신문화 활동 중에서 문학의 경우 주지주의, 주정주의, 주의주의 등이 그 좋은 예에 해당할 것이며,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에서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마음의 갈래에서 서로 다른 어느 한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이 긴장과 갈등의 소지를 품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조화와 공존을 위해 그러한 다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로 설계한 조물주의 창조섭리를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서로 다름이 다양한 사조의 원천이 되는 데에 비해 종교의 영역에서는 한 쪽으로 쏠림에 의한 다름이 그 방식만을 고집하거나 가장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지닌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지성적 신앙은 성경이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인 성경주의나 교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교리주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지성적 방식의 믿음만이 옳다거나 가장 좋은 것이라는 주지주의적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감정적 믿음은 종교적 감동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기 때문에 예전주의나 열광주의와 같은 주정주의적 착각으로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지적 믿음은 도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오히려 사람을 억누르는 도덕주의로 변질되거나 실천을 명분으로 하는 행동지상주의와 같은 주의주의적 독선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어느 갈래이든 한 부분에만 치우치게 되면 이러한 왜곡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런가? 문학이나 예술은 삶의 표현방식이지만 믿음은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자리가 삶의 전 영역이 아니라 마음에만, 그리고 마음 중에서도 한 갈래에만 머물게 되면 안정을 구해야 하는 믿음은 그러한 갈래들 사이의 긴장스러운 생리를 견디지 못하고 쏠려진 한 쪽을 전체로 둔갑시키는 절대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것도 생겨먹은 꼴에 따른 편향성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자기도취적 우상주의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진단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믿음의 자리를 그저 마음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느님과 관계함으로서의 믿음이 인간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벌어지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성, 감정, 의지라는 세 갈래를 다 묶어봤자 정신인데 믿음이 육체 없이 정신에만 자리한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느님과 관계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에 우리가 전존재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자리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 이전의 전인(全人), 즉 ‘통사람’이어야 하며 이를 한 마디로 푼다면 곧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유행처럼 회자되는 영성(靈性)이라는 것도 바로 이를 가리킬진대, 영성은 지성, 감정, 의지에 따라 나오는 제 4 요소가 아니라 이를 모두 아우르는 마음과 내밀려졌던 몸이 하나인 몸의 차원으로서 삶을 일컫는다. 결국 믿음의 자리는 곧 삶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즉 믿는다는 것은 곧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믿음의 영역을 마음의 갈래로부터 삶의 모든 영역으로 펼쳐내었다. 그리고 이는 마땅한 과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믿음과 삶의 일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이 수행을 포함하여 행위의 차원을 지니지 않으면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냥 그렇게 잘 살면 될 일이지 굳이 믿음이 덧붙여져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 우리는 더 깊은 뿌리물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깔고 있으면서 동시에 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믿는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