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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그늘의 미학, 음지의 신학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단풍으로 푸른 잎의 생기가 말라가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햇살조차 머쓱했는지 숨어버린다. 바야흐로 서늘한 그늘의 전성기가 이 땅에 그득하다. 나는 햇볕 예찬론자다. 추운 유년의 기억이 덧날 때마다 나는 거의 짐승처럼 햇볕과 양지를 찾는다. 햇볕은 곧 빛을 연상시키고 빛은 곧 진리의 은유이다. 그러니 신학에 발을 들인 사람으로서,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빛은 어둠과 대치되는 지점에서 투명한 진리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에겐 ‘진리=빛’의 등치논리를 반성하고 또 심지어 회의하게 되는 경험적 계기가 이어졌다. 마냥 환한 빛보다 그 빛과 어우러진 그늘의 공간을 유심히 성찰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새벽기도 모임에서 교인들은 환한 형광등의 불빛 아래서 개인 기도를 이어가길 꺼려하는 심리를 보인다. 감추어야 할 죄과와 부끄러운 삶의 기억이 많아서일까. 은밀한 소통의 고요한 장소에 전등불빛조차 방해가 되어서일까. 빛은 말과 통하고 침침한 그늘은 침묵과 연계되는 까닭일까. 기도자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심리적 거리를 최대한 지우면서 밀착시키도록 음지의 동굴에서 속삭이며 하나님과 대화하길 꿈꾼다. 너무 환한 빛이 자신을 감싸면 할 말도 움츠러들기 때문이리라.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서구의 고풍스런 도시 중심마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오래 묵은 성당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는데 그 내부는 예외 없이 이상스레 침침하다. 아주 깜깜하지는 않다. 스테인드 글래스를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그 실내에 안온한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동방정교회당에서는 천정과 벽마다 빼곡하니 장식된 성화(아이콘)들이 그 희미한 빛의 그늘을 제공해준다.

산악자전거의 본산지 캘리포니아 샌 안셀모의 유명한 코스는 대부분 태멀패스(Tamalpais) 산기슭과 골짜기를 감싸면서 미로처럼 뻗어 있다. 동반자가 있으면 그 길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깊은 심연의 아우라를 느끼기 어렵다. 내용과 주제가 어떠하든 반드시 어지러운 말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내면으로 치닫는 말이 숲의 침묵을 깨면 빛과 그늘의 경계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그러나 더러 혼자 그 길을 나서서 상대방과 속도를 맞출 필요도 없이 천천히 자유분방하게 그 길을 굴러가다 보면 멀리 짙은 숲으로 만들어진 그늘이 둥그런 동굴처럼 입을 벌리고 손짓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더러 엄마의 자궁 같기도 하고, 태초의 빛이 뿜어져 나왔던 혼돈의 도가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숲 그늘이 이룬 나무 동굴은 멀찌감치 희미한 미혹의 손길을 건네는 듯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지친 네 심신을 달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어서 다가와 내 품에 안겨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천천히 다가서는 발길은 매우 조심스럽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100년은 족히 넘을 아름드리 편백나무들이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몇 번의 체험을 통해 그늘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받아온 억압의 정체를 속속들이 까발리지 않고도 이 깊은 숲 그늘의 서늘한 자태는 아무 말 없이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속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그늘이 말없이 치유한 그 상처의 대부분은 말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었다.  

복잡한 예를 들지 않아도 그늘의 미덕은 명백하다. 그것은 빛이 선양한 진리의 두께에 질식당한 가녀린 영혼들이 찾아드는 피난처이다. 하나님이 낮과 함께 밤을 만든 창조의 법칙도 예외 없이 상통한다. 그래서 밤에 안식을 주신 뜻도 쉽게 헤아릴 만하다. 대낮의 태양빛은 너무 환하여 그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가려버리지만, 밤중의 달빛은 은은한 빛으로 그늘의 미덕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 배경의 어둠 속에 수많은 영롱한 별들의 자취를 읽게 하는 것이다. 착한 어둠이란 역설이 이렇게 가능해진다. 태양과 대낮과 빛의 영광이 창조주의 충만을 지향한다면, 달과 밤중과 그늘의 배경은 인간 삶의 여백과 안식의 틈새를 열어준다. 거기서 독하고 거친 삶의 모든 부담이 이완되고 그 은밀한 음지에 비로소 부끄러운 그 짐들을 내려놓는다.

지금까지 서구근대신학은 말의 세계와 동거해왔다. 그 말들(rhēma)은 곧 하나님께 기원을 둔 말씀(the Logos)의 자식들이다. 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의 사상이 서구신학을 지배하면서 빛과 어둠, 진리와 사이비잡설의 경계가 엄격해졌고, 햇볕보다 더 환한 영광의 세계를 천국이려니 상상하면서 살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그늘을 억압했고 음지를 지옥처럼 매도했다. 그래서 말들의 천하는 보편화되었고, 말들의 권세가 세상을 지배해왔다. ‘침묵은 금’이라고 상찬했지만 그것은 화석화된 격언일 뿐이었다. 예배당은 점점 더 환한 조명을 발하며 휘황찬란함의 감격 속에 그 번쩍거리는 성도의 의상과 면상을 비추기에 분요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신앙의 위선적 가면을 두터워졌다. 신앙은 생활과 소외되어 양쪽 모두 점점 더 가식적이 되어버렸고 은밀함의 미덕은 사장되기 시작했다. 환한 공간에서 보여주기 위한 신앙과 자신의 근사함을 분식하는 말의 힘이 전권을 쥔 탓이다. 빛의 도그마를 장악한 자들에게 모든 것은 투명한 가치를 띠어야 했고 그늘은 왜소한 자의 알리바이처럼 초라하게 구석으로 밀려났다. 교회와 학교의 강단과 언론지면에 말이 넘칠수록 세상은 점점 더 개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담임목사의 최고 자격요건이 ‘설교’로 통했지만 미끈한 설교가 세상의 총체적 변혁에 프로이트나 마르크스만큼이라도 공헌한 기록은 드물다. 투명한 빛의 화끈한 임재와 이에 대한 종말론적 학수고대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잃어버린 말들의 성찬은 점점 더 세상을 차가운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 심연엔, 아뿔싸, 출구가 없다.  

선거 전에도, 선거 중에도, 또 선거가 끝나도 말들이 늘 풍요했다. 그러나 그 말들의 대부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들이었다. 매일, 매시간, 인용부호 속에 처리된 각종 말들은 이른바 ‘편집의 마술’ 속에 흑색선전과 진실의 경계를 지우면서 악악거리는 난장을 차렸다 이내 파장하곤 하였다. 거기에 제 말들의 풍경과 의도를 반성하는 침묵과 그늘의 흔적은 희미하였다. 반면 말들의 메아리에 꼬리를 물면서 서로 씹고 씹히는 그 주인 없는 말들의 행렬은 무던하게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말들끼리 서로 모방하면서 제 욕망의 짝퉁을 찍어내는 충동적인 말들은 늘 생각보다 앞서 나가면서 빛의 영광을 추구하였다. 그렇지만 되돌아오는 결과는 ‘해명’과 ‘소명’의 형식을 통해 ‘사실과 다르다’ ‘오해가 있다’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판에 박힌 반복적 수사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그 말들의 전후 사정은 사실의 확인과 진실에 대한 진지한 추적이 실종된 채 아무런 감동이나 성찰도 없이 거듭 유산될 뿐이었다.

이렇듯 요란하고 어지러운 말들의 난장 시대에 특정 말의 내구연한은 하루의 햇볕만큼 짧아져버렸다. 침묵과 여백을 골자로 하는 부드러운 그늘의 공명이 없기에 말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삶의 결핍을 담아내지 못한다. 악을 써대며 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제 존재 의미를 이루어갈 때 담백한 삶의 미학은 망가진다. 덩달아 은밀한 중에 모든 자들의 은밀한 행동을 은밀하게 살피며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신학적 의미도 망각되어버린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말이 ‘예, 예, 아니오, 아니오’ 정도로 표현되어야 하며 이를 넘어서는 것은 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말의 난장 시대라서 그런지 이 어록의 의미까지 왜곡되어 어중간하게 처신하지 말고 딱 부러지는 말의 명백한 표현으로 시비를 분명히 하라는 뜻으로 풀이되곤 한다. 그러나 이 어록의 진정한 의미와 교훈은 좌우간의 확실한 입장 표명을 통해 확립해야 할 우리 언어생활의 선명한 자세에 있지 않다. 이 어록은 앞서 제시된 맹세 금지의 맥락에서 풀어야 그 교훈의 틈새가 제대로 포착된다. 우리의 언어는 담백하게 ‘예, 예’, ‘아니오, 아니오’ 정도로 족한 것이지 그것을 과장하여 자신의 진리를 강렬하게 호소하려는 모든 수사적 장치는 기실 악의적인 왜곡의 위험을 노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라는 한 마디로 족한데, 한 번 더 ‘예’라고 말하는 것은 음지를 머금고 사는 인간의 부족함에 기인한다. 자신의 말을 한 번 정도 강조할 여유를 허용한 것이다. ‘아니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빛의 영광에 들 떠 ‘어이구 답답해. 내가 이 나라 대통령인데 왜 날 못 믿어’ ‘만약 아니라면 내 손에 장을 지져’ ‘내가 성서에 손을 얹고 다짐해’ 식으로 나간다면 호들갑스런 자기 시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 그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이미 신뢰를 망실했음을 증명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는 담백하지 못하고 누추하다. 게다가 자기 지시적이며 따라서 폐쇄적인 어둠 아니면 광명의 빛으로 위장한 과잉 거품이기 십상이다. 거기에 악써대는 진리의 자기 현시적 욕구는 충만할망정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깃든 그늘의 미학은 부재한다. 충만의 로고스와 그늘의 미학이 본디 긴밀하게 어울렸건만 이즈음 그 소외의 간격은 물과 기름처럼 아득해졌다. 예수의 저 말씀은 기실 허풍스런 말로써 맹세하지 말라는 어록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늘은 남루하지 않다. 그늘은 침묵처럼 담백하다. 소박한 ‘예’와 ‘아니오’의 한 마디로 제 존재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세계가 그 음지의 미덕이다. 그것은 뜨겁지 않기에 화려하게 번식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그늘이 길어지고 그 속에서의 칩거와 안돈이 오래 가면 사람도 식물성으로 변한다. 동물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식물이 되면 창조의 이치를 위반하는 것이니 그건 그리 건강하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그악스런 동물성에 너무 침윤되어 오로지 제 말로써 유아론적 진리를 선양하기 급급한 세태에는 식물성의 인간이 외려 그리워진다.

비 내려 축축한 거리는 그늘의 엷은 빛이 짙다. 주변의 나무들은 계절의 흐름을 닮아 순명하는 법이 몸에 배겼던 게다. 바람 불면 제 잎사귀를 떨구어내면서 잠시 반짝이는 그늘의 빛을 보여주며 추락한다. 거기에 짧고 낮은 ‘예’가 스쳤을까. 아니면 안타까운 희망의 약속에 ‘아니오’라고 자신 없게 속삭였을까. 오후 네 시의 그늘은 깊고 침묵 속에 바삭거릴 뿐이다. 말씀 중심주의와 영광의 신학, 제 욕망의 분신인 말들에 도취한 채 그 사유화된 폐쇄적 진실이 과잉으로 범람하는 양지의 신학에 나는 쉽게 지친다. 그렇지만 변덕스런 내 몸은 오늘도 별수 없이 양지와 음지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서늘함이 추위로 느껴지면 햇살 아래 머물고, 그 양지의 빛이 더워지면 다시 그늘 아래 몸을 숨긴다. 대낮이 너무 길 때 그 낮의 시간을 잘라 가끔 내 맘대로 밤을 만들어 낮잠을 청할 때도 있다. 그렇게 그늘은 내 몸에 깊이 숨어 있다. 그늘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은근한 하나님의 미래와 만나게 한다. 그 틈새로 지친 세속의 말들도 잠시 한숨을 쉬며 무장을 해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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