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7)

6. 정신학원의 어머니 김필례(3)

④ 동경여자학원 시절

김필례는 1908년도에 드디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 오빠 김필순은 당시 최신 스타일의 양장의상을 사주었다. 여지껏 한복만 입고 자라난 김필례로서는 참으로 황홀한 호사였다. 이처럼 김필순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여동생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 어머니가 서울역으로 전송하러 나왔다. 그는 김필례의 두 손을 잡고 당부하였다.

“필례야, 하나님이 너를 항상 돌보아 주실 것이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라.”
“네, 어머니,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간 평안히 계세요,”
 
그렇게 떠나 부산, 관부연락선, 시모노세끼, 기차로 동경까지 난생 처음 머나먼 길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용기를 내었다. 동경에 이르러 보니 조카 김덕룡이 마중 나와서 안내하여 주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동경 여자학원]으로 찾아갔다. 그 학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설립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서, 조선의 연동여학교와 같은 계통이었다. 학교 당국은 김필례를 개인적으로 평가해 본 결과 중등부 2학년수준의 학력을 인정하고 편입을 허가하였다. 그 학교에 다니면서 주일이면 조선인교회로 출석하였다.
 
그런데 김필례는 동경 유학생들 중에 처녀로서는 처음 여학생이었다. 다른 여자들도 있었지만 다 결혼 했거나 부적절한 관계로 돈 많은 남자를 따라 나온 여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공부라는 것도 고향에는 유학 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무슨 편물이나 기술습득을 하기 위해 건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김필례는 동경 유학생들에게 단연코 제일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소위 연애편지와 선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김필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과 신앙생활에 정진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기억하며 한상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09년 일본은 그간 무력에 의하여 대한제국을 잠식해 오더니 드디어 [한일합방]을 강행하였다. 우리 조선 유학생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비극의 소식이었다. 모든 생각 있는 유학생들은 비분강개하여 본국 정부를 성토하고, 일제를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상황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날이 갈수록 망국은 현실로 대두하였다. 
  먼저 본국 학무국으로부터 보내주던 국비 장학금이 단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빠 김필순은 곧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동생 필례야, 낙심하지 말아라. 국비만큼은 못해도 내가 병원에서 번 돈으로 너의 학비만큼은 보내 주겠다.”
 
그렇게 학업은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오빠마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니 700여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격려금을 모아 보내주었고, 학교에서도 얼마간의 장학금을 보태주어 학업은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도 김필례는 남이 할 수 없는 귀한 일을 단행하였다. 같은 학교에 [야스꼬]라는 일본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일본의 귀족인 화족(和族) 남성 아리시마(有島武夫)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 청년이 독일 유학중에 변심하여 독일 여성과 결혼하였다. 이 여인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헤어날 길을 몰랐다. 그러던 중에 김필례를 알게 되고 그녀의 인품과 교양에 감화되어 가까이 하기를 원했다. 김필례가 길리시단(크리스찬)임을 알고 자기도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두 여인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김필례는 야스꼬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함께 학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스꼬의 도움으로 일본어를 더욱 깊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에서 관심을 끌던 폴랜드 작가 [생키비치]원작 [쿠오바디스(いずこへ ぬく)]를 세 번씩이나 독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야스꼬가 드디어 마음을 정리하고 일본인 문학가 [히까다]와 결혼하게 되었다. 친구의 행복을 기쁘게 생각하며 김필례는 그간 자기가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피아노를 사기 위하여 장학금을 아껴 모아두었던 자금을 결혼비용으로 희사하였다. 그리고 그 후 자기에게 들어오는 장학금의 일부를 쪼개어 그녀의 가난한 신접살림을 보태주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학창생활 에피소드가 있다. [양승애]라는 여인은 함경도 기생이었다. 그녀는 돈 많은 한 변호사의 첩이 되었다. 그런 여자가 동경여학교로 유학을 와서 김필례와 한 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성격이 몹시 이기적이고 까다로와서 아무도 그녀와 함께 기숙사의 방을 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당국은 곤경에 빠졌다. 그러자 김필례가 자기가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그래서 한 방 기숙생이 되었다. 그런데 양승애는 자기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김필례에게 모질게 굴었다. 자기가 본국에서 정실부인에게 당한 것을 앙갚음이나 하듯 무례한 요구를 남발하였다.

“얘, 아침에 이부자리를 단정히 개어놔.”
“방 청소를 깨끗이 해.”
“내가 나갈 때 문간까지 나와서 배웅해.”
“내가 돌아오면 문간에 나와서 영접해.”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일본인들의 험담을 쉴 새 없이 쏟아놓았다. 그러나 김필례가 대응하지 않으니까 자기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핍박하였다. 그런 행실이 끊이지 않으니 양순한 김필례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김필례가 변소에 들어가 앉았을 때 울분이 터져나와 혼자서 마치 양승애가 앞에 있는 듯이 할 말을 쏟아놓았다.

“얘 이 못된 승애야, 내가 자존심이 없어서 너에게 당하기만 하는 줄 아니? 이국땅에 나와서 동포의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참고 지내니까 너는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하는구나. 정 그렇다면 나라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꺼야. 제발 좀 남의 나라에서 우리 민족의 흉한 꼴을 보이지 좀 말아 줘.”
 
그런데 옆 칸의 변소에서 -으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양승애 당자였다. 다 들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양승애도 김필례에게 함부로 굴지 않고 자숙하였다고 한다.

앞부분에서 말했지만 아버지와 같은 오빠 김필순이 일본 경찰의 마수를 피해서 중국으로 망명해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한 남자가 김필례를 찾아와서 종이 노끈을 주고 곧 사라졌다.[종이 노끈]이란 옛날에 모든 물자가 부족할 때에 얇은 종이를 손으로 꼬아서 노끈으로 만들어 책을 매는데 쓰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전해준 노끈은 일본 경찰의 검색을 피하기 위하여 무슨 책을 잡아매어갖고 왔으나 그것을 풀어서 보니 오빠의 밀서였던 것이다.

“필례야. 긴 말 못한다. 나는 중국에 망명하여 우리 민족의 이상촌을 건설하는 중이다. 우리는 힘을 길러 나라를 되찾아야 하겠다.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곧 다음에 적힌 주소로 나를 찾아와라.”
  김필례는 긴장하였다. 그리고 결단하였다. 오빠의 명은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장선생님, 저는 본국에서 긴급한 일이 생겨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니? 너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데, 아깝게 여기서 학업을 중단하다니. 네 형편이 어려운 줄은 안다. 그냥 공부를 계속해라 학비는 학교 당국에서 어떻게든지 마련해 줄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말로 하지는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중대한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교장선생님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일단 귀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온 딸을 보고 어머니 안씨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김필례가 오빠의 밀서에 관하여 이야기 하자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안된다. 중국으로 가는 일은 나와 너의 언니 순애가 하겠다. 너는 반드시 그 학업을 마쳐야만 한다. 일본으로 돌아가거라.”
 
오빠의 요청보다도 더 완강한 어머니의 명령이었다. 여기서 김필례는 어머니 일행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전송만 하고 다시 동경으로 발걸음을 돌이켰다. 학교 당국은 아주 기뻐하며 그녀의 장래에 대한 배려를 잘  마련해 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능한 독일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하였다.
㈁ 영화음악학교(감리교 직영)에서 음악을 전공하게 하였다.
㈂ 동경여학교 학생 5명의 피아노를 가르치게 하여 학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 동경여학교 합창반 지도자로 취임하게 하였다.
  이상의 특혜는 향후 동경여학교 중등부에서 5년간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의무가 따랐다.

이렇게 큰 혜택을 입으며 공부한 김필례에게 본국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Lewis)가 찾아왔다. 그리고 5년간의 의무규정을 알고는 곧 야스꼬 교장선생을 찾아가서 요청하였다.

“우리 김필례를 그렇게 좋은 조건에서 키워주신 학교 당국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조선의 정신여학교에서는 김필례와 같은 지도자가 지금 꼭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에게 5년간의 의무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의무를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이행하도록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같은 북장로교 계통의 학교이지 않습니까?”

루이스의 간곡한 요청은 야스꼬 교장도 받아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길이 김필례 자신을 위해서도 적합한 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16년 김필례는 23세의 젊은 선생님으로 정신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글/박종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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