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도 힘들도록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숨죽이고 있는 사이 버스는 광주에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무심코 버스 밖을 내다보니 가뜩이나 숨쉬기 힘든 내 가슴이 더 죄어온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숲, 버스 옆으로 쌩쌩 달려가는 승용차들, 거리를 가득 메운 상점들과 사람들, 바로 그 흉물스러운 대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떠난 지 며칠 됐다고 이런 풍경이 엄습해오자 가슴이 확 막혀왔다. 버스는 새로 지은 대형 터미널로 들어섰고 눈치 보며 차에서 내린 나는 그 매캐한 매연냄새가 새삼스럽게도 지독히 혐오스러웠다. 서둘러 터미널로 들어서서 나는 무조건 버스시간표를 찾았다. 대도시라고 그 아름다움과 정취가 없으랴마는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아파트에 사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대도시의 이런 모습에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던 것이었다. 빛고을 광주를 탐험하겠다고 온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단 10분도 대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출발하는 장성행 버스표를 다시 끊었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2005년 10월 말 영구귀국해서 주변을 정리하고 12월 초 광주행 기차표를 끊었다. 난생 처음 광주역에 내린 나는 호남 최고의 도시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택시는 나를 바로 5·18 민주화 성역에 데려다 주었다. 조경공사를 위해 파놓은 땅과 땅을 덮은 비닐 등이 때마침 다가온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날려 묘역을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 큰 묘역에 사람이라고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맨 위부터 시작해서 한 분, 한 분에게 고개 숙이며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반복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분들에게 사죄를 시작하자 그 추운 날 나의 볼에서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흘려내렸다. 나는 그렇게라도 내가 갖고 있는 이 죄책감과 상처를 해결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진정 그분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철부지 고등학생은 당신들을 폭도로 알고 있었고 당신들의 희생을 방관하고 있었다고, 그동안 두려워서 찾아뵙지 못했다고,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당신들의 희생으로 내가 이렇게 좋은 세상에 살게 되어 감사하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장성에 내렸다. 예전 장성광업 시절의 화려함은 이제는 없었다. 택시 기사에게 길을 물어 어렵사리 파출소를 찾아 지도와 관광안내책자를 구한 뒤 땀도 식힐 겸, 지도책도 검토할 겸 해서 다방에 들어갔다. 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싸구려 알루미늄 창문에서 들어오는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다방에 앉아 있던 늙은이 셋은 연신 티브이 뉴스를 보며 현 시국에 혀를 끌끌 차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방 할머니께 제일 시원한 것을 달라고 하자 오디냉차를 가져오셨는데 이 역시 정말 맛있었다. 내가 맛있다고 하자 한 잔 더 주시기까지 했다. 지도책을 펴고 장성향교와 옛 읍내인 성산리로 목표를 잡았다. 다방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 가니 할머니 서너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15분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어차피 도착시간도 엉터리인 시골버스, 기다리느니 걷자, 한 3, 40분 못 걸을까?’ 이런 생각에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실라고라? 걸을라믄 솔찬히 멀틴디…” 할머니들은 나를 걱정하셨다.
후회막급, 10분도 못 걷고 나는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을 걷자니 흐르는 땀조차 바로 말라버린다. 배낭과 등짝 사이엔 물기가 흥건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낭도 다방할머니께 맡기고 올 것을 날이 찜통이니 배낭조차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나마 버스 안에서 샀던 팔토시가 톡톡히 제 역할을 하며 효자노릇을 해주었다.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성산리 얼마나 남았냐고 묻자 한 30분 걸으면 된단다. 그래서 또 죽자 사자 살인적인 더위와 싸우며 한참을 걸었다. 지나는 아저씨께 또 물었다. 그랬더니 또 30분 남았단다. 이 놈의 장성시계는 멈춰 선 건지 가도 가도 30분이란다.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어 작은 가로수가 펼쳐준 보자기만한 그늘에 몸을 숨겼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경험은 초등학교 조회시간 이후 처음 경험해보는 것 같다. 이렇게 헤매고 있는데 저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정류장도 아닌데 난 체면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 버스가 급정거하며 나를 태워줬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버스 성산리 가죠?”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 물었으나 기사는 대답이 없다. 못 들었나 싶어서 “성산리 가나요?”하고 재차 물었지만 묵묵부답, 그래서 또 다시 “옛 읍내요?” 했는데도 볼에 심통이 덕지덕지 붙은 기사는 보란 듯 경멸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서 아주 못된 기사 놈을 만난 것이다. 나는 이 친구가 왜 이러는지 그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2005년 광주여행 당시 택시기사로부터 이유 없이 더 큰 위협을 당한 경험이 있어 아마도 외지인에 대한 그 어떤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뻘쭘해서 버스 뒤로 향하려 하자 앉아 계시던 할아버님이 내가 측은해 보였는지 내게 자기가 내리는 곳에서 함께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 좌석의 손잡이를 잡고 잠시 서 있자 앞뒤 분들이 자신들이 미안했던지 내게 친절히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버스는 곧 성산리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폐허가 된 교회가 보였다. 어쩐지 최근 우리 기독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리고 마을을 구경하기 위하여 골목으로 들어서자 정말 내가 찾던 그런 광경이 눈에 펼쳐졌다. 성산리의 골목은 그야말로 빈티지 골목, 6, 70년대 만들어진 현대빈티지가 아니라 조선빈티지다.
장성은 오래된 도시였다. 마한시대부터 백제,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장성은 꽤 큰 도시였다. 장성 인근에 서원이 몇 개인지 갑자기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학문적으로도 이름 높던 지역이었다. 백제 무왕 때 건설된 천년고찰 백양사, 몽고항쟁을 위해 축조된 입안산성 등 주변에 역사적 유적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화려함의 중심엔 성산리가 있었다. 이곳의 초등학교는 바로 예전의 동헌터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가 호남선을 건설하려고 하자 이곳 유생들이 반발했고 그래서 호남선의 장성역은 중심이었던 성산리가 아니라 영천리로 옮겨져 그곳이 지금의 장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성산리엔 옛 장성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바로 돌담들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몇 백 년 된 돌담을 여전히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골목마다 새까맣게 그을리고 새파랗게 이끼 낀 돌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남들은 거대한 궁궐이나 큰 유적지에서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정말로 우리나라가 역사가 있는, 뼈대 있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박물관처럼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유적이 아니라 아직도 생활 속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있는 역사의 흔적들 말이다.
장성향교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정말 멀고 험한 것이 아니라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여러 번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을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견공들의 급작스런 출현이었다. 길을 좀 헤맨다 싶으면 어디선가 송아지만한 변견공(便犬公)들이 뛰쳐나와 나를 향해 달려들 듯 짖어대는데 이 때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시간보다도 더 괴로운 것은 공포였다. 그래서 다음 여행에서는 꼭 긴 창을 옆에 끼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한참을 헤매다보니 눈앞에 25번 국도가 하늘 높이 솟아서 지나가는데 국도 아래 뭔가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 자세히 보니 향교 입구에 서 있는 비(卑)였다. 예전 같으면 향교 앞에 떡 버티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인도했을 그 비는 지금은 새로 난 도로에 묻혀 이름 모를 풀들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도착한 장성향교는 안타깝게도 굳게 닫혀 있었고 향교 바로 앞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일반 가정집이 들어서 있었다. 너무 흔해서일까? 이 아름다운 목조건축물이 이렇게 냉대를 받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여차저차 다시 마을로 내려와 이번엔 아예 걸을 생각도 안하고 무작정 버스를 기다렸다. 한여름 성산리 마을은 인구가 이동해서인지 매우 조용했다. 다행히 버스는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얼씨구나! 하고 버스에 올라타는 그 순간 나는 바닥에 침을 뱉고 다시 내리고 싶었다. 헐, 아까 그 자식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