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첫 신학박사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남궁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오직 그의 외할아버지 임씨가 구한 말 승지(承旨)와 평안감사를 역임한 고관이었다고 한다. 그를 귀여워 한 외할아버지를 따라 평양 감영으로 가서 일곱살이 될 때까지 있었다.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세관원이 되어 인천과 목포에 근무하였다. 그 시절에 목포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와 교우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 때 배운 영어는 훗날 그의 학계 진출과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선교사들은 그의 장래성이 뛰어난 것을 보고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신앙의 여성을 배필로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나게 된 여인이 김필례 선생의 조카가 되는 소래마을의 김함라(金涵羅)이다. 그들은 1908년 게일(J.S. Gale)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선교부의 추천으로 목포 영흥 중학교교사로 근무하다가 숭일중학교로 옮겼다. 그 시대 그에게 영어를 배우려는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에게 영어를 배운 사람 중에 김성수, 김병로, 그리고 장면 박사의 부친도 있었다.
그의 부인이 된 김함라는 소래마을의 전통에서 자란 신앙의 여성답게 평생동안 남편을 받들어 남궁목사의 진로에 큰 힘이 되었다. 남궁혁의 학문과 진로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17년-1921년 평양신학교 졸업.
② 광주 양림교회 첫 목회
③ 1922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유학
④ 1924년 신학석사 학위
⑤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
⑥ 1925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 취임
⑦ 성서 번역, 주석 발간, 신학지남(神學指南)지 편집
평양신학교 시절에 그는 성서를 번역하고 성서주석을 발간하였으며 특히 당시 목회자들에게 성서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교양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을 편집하였다.
그 일에 김인서, 강흥수, 김재준 등의 후배들이 협동하였다. 그는 도량이 넓고 후배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진로에 협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형룡 박사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신학교수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성휘, 송창근, 김재준 등의 후배들을 위한 후원에 힘을 썼다. 그러나 일제 핍박이 정범 강화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니 이를 단호히 거부한 평양신학은 폐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궁혁 박사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시절에 역시 망명객인 이승만이 그를 찾아와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승만이 집권한 후에 이승만을 찾아간 일이 없다.
조국이 광복되자 미 군정 하에서 적산관리처장(敵産管理處長), 그리고 재무부 세무국장을 역임하였다. 적산관리처라는 곳은 우리의 적이던 일본인이 남기고 간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재무부 역시 돈을 다루는 기관이다. 그 직위에 있으면서 그는 과거의 친일배들이 광복 조국에서 고관이 되어 부정한 행위로 사욕을 채우는 일을 수없이 보게 되었다. 청렴결백한 그는 이에 환멸을 느끼고 그 좋은 자리를 포기해 버렸다.
해방 후 월남한 신학자들이 남한에서 남산신학을 재건하려 할 때에 그의 후배인 박형룡 박사가 그를 찾아와 교장 직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주의적인 파벌의식을 의식한 남궁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사하였다. “한국의 교회는 분열의 조짐이 농후합니다. 나는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는 교회의 연합 사업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총무 직을 수락하고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북한에서 월남한 평양 사람들의 조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평양노회의 노회장, 그리고 이어서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6.25 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북괴 정치보위부는 남궁혁 박사를 회유하였다.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기독교 대표로써 남한을 향하여 북조선의 정당성을 방송하시오. 그러면 우리 공화국에서 편히 잘 살 수 있을 것이요.” 그러나 남궁혁 박사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구금된 상태에서 금식 기도하기를 계속하던 중에 기진하여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글/박종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