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렘 23:13-22, 고전 12:27-13:3, 마 23:10-15)
설교문
[너희에게 화가 있다!]
마태복음 5장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산상수훈은 8개의 축복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복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한편 마태복음서 23장 13절부터 33절에는 일곱 가지 화 선언이 등장합니다. 이 중 여섯 번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한번은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 선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선자들!"이고, 또 하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마태복음서 본문은 일곱 가지 화 목록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입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첫 번째 비판은 하늘나라의 문을 막았다는 것인데,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율법학자나 바리새파는 자기 동족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잘 가르쳐서 하늘나라로 인도하도록 하는 역할과 책임을 맡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수많은 율법 조항을 만들어 사람들을 얽어매고, 정죄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율법에 대한 확고한 자기 신념과 율법 해석의 우월감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아 이 땅에서 하늘 문을 여는 사람이 되었지만, 율법학자나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들먹거리면서 도리어 예수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더 냉혹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하던 청년 시절,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열심히 하던 시절 저는 이 구절을 읽고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제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정말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는 다른 이들을 하늘나라나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는 디딤돌일까? 아니면 걸림돌일까? 목사가 되었지만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1세기 후반 벌어진 로마와 유대의 전쟁, 66년에 시작해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960명이 자결함으로써 끝난 이 전쟁은 유대인들에게 큰 절망과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로마 제국 아래에서도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각종 갱신 운동들은 이 전쟁으로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세력은 말씀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하던 바리새파였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고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유대교 재건을 위한 운동이 벌어집니다. 랍비 힐렐은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으로 성전 제의 없이도 율법 연구와 회당 중심으로 새로운 유대 종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성전 유대교에서 랍비 유대교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 유대교와 경쟁하는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고, 마태복음서는 바로 그 한복판에 있는 복음서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을 통해서 당시 유대교 재건의 열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개종이란, 유대교에 입교하기로 온전히 마음을 먹고 할례를 받아 구전 율법까지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다른 이방 종교와 달리 유일신을 섬기고 있었고, 그 경건함과 열정이 대단하였기에 이방 사람 중에는 이들의 종교성을 흠모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중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은 사람은 할례도 받아야 했고 모든 율법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개종하여 유대교인이 된 그 사람이 마음이 진실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고, 기도하고 용서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온유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서도 깨끗한 마음을 지니며, 평화를 위하는 일꾼이 된다면 너무나도 좋은 일이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경건한 체 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 율법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남들에게 올무가 되게 하면서 자신은 전혀 지킬 생각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이 된다면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은 마태교회 교인들과 유대교 재건 운동의 주인공들 중 과연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두고 벌이는 일종의 인정 투쟁 한복판에서 생겨난 것이고, 오늘날도 수많은 교인 중 과연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겠는가를 물을 때 여전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바알의 이름인가? 야훼의 이름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도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자인가를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우선 사마리아의 예언자들을 비판합니다.
"나는 일찍이 사마리아의 예언자들에게서 못마땅한 일들을 보았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예언자들의 죄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을 대변하는 바알을 섬깁니다. 명백하고 노골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더 깊이 탄식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전이 있는 도시에서, 거룩한 예배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다릅니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돕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 앞에 서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비판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자기들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
그야말로 두렵고 떨리는 촌철살인의 말씀입니다. 거짓 예언자가 반드시 거짓말쟁이만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진지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니며 불의에 저항하고, 진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너무 쉽게 빠져드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스스로 정의를 위해 싸우고, 옳은 일을 하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확신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검증되지 않고, 자기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생각이 너무 옳다고 여겨질 때, 내 판단이 너무 분명해 보일 때,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차오를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는 자기의 제자 아드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어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자기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자기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예레미야는 참된 예언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야훼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회의에 참석해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조언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야훼의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 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
진정한 신앙인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멈추고, 확신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자리입니다. 내 마음속 환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이 먼저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서야 하는 하나님 앞이란 과연 어디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도대체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약속한 바로 성경입니다. 내 말을 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우선 성경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도 가지각색이고, 여기에서는 이 말을 했는데, 저기에서는 저 말을 하고 있고, 또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들리는데, 저 사람에게는 또 다르게 들린다면 과연 우리는 또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향린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 왔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서 가능한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 왔습니다. 향린에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다 해서, 누구보다도 열심을 다한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야 하고, 서로의 머리를 맞대야 하고, 서로 의논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신 회의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가 그러하고, 친교가 그러합니다. 선교하는 과정, 목회와 사역을 실행할 때도 가능한 많은 교인의 뜻을 모아가는 일들이 중요합니다. 사역들의 사안에 따라 각 부서와 소모임 단위에서 결정하고 바로 행해야 하는 일들이 있지만,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마땅히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다수가 모여서 의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함께 의논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해 나갈 때 그것이 궁극적으로 바알의 이름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되려면 마지막 한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가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장(章)은 낭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너무 좋아하는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7절의 말씀을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로 시작해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로 끝나는 유명한 구절이지요. 사랑이라는 달콤한 단어의 뉘앙스로부터 여기에 나오는 15개의 동사는 우리를 낭만적이고 고귀한 이상, 신비한 환상 한가운데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쓸 때 상황을 보면 아름다운 언어로 가득 찬 고린도전서 13장의 언어는 사실 투쟁과 싸움의 언어라고 해야 합니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북쪽에 자리 잡은 오래된 도시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기원전 8세기에는 25만의 인구가 북적이던 국제 해양도시였으며, 현재에도 3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여 살아 있는 도시입니다. 동쪽의 겐그리아, 서쪽의 레카이움이라는 두 항구도시를 끼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오가는 배들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유럽에서 한동안 "고린도"라는 말은 성적 쾌락과 유흥과 결부되었는데, 이것은 고린도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마음껏 쾌락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방탕한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 사람 같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온갖 인종의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나와 다른 남들이 늘 북적였기 때문에 내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것이 매우 큰 관심사였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양보나, 공공을 위한 희생은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고 발달했습니다.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들을 설득하는 수사학이 발달했고, 2년마다 열리는 이스트무스 축제를 통해 대규모의 운동경기가 벌어지면서 경쟁과 승자독식의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강자에게 굴복하고, 강자에 기대어 권력을 탐하고, 수사학을 동원하여 온갖 이득을 얻어내어 한껏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고린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했고, 조금이라도 성공하면 성공의 사다리에 드디어 올라탔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그 사다리에 올라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도시가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이런 도시가 기원전 146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폐허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6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고, 로마의 그리스 식민 행정 구역인 아카이아 주의 수도로 제국의 가장 강력한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합니다. 바울 사도가 활약하던 당시 고린도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고,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과 각양각색의 문화와 종교가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상인과 군인, 순례자들, 해방 노예, 탈영병과 퇴역병들이 이곳에서 온갖 것을 소비하며 개발 신도시가 주는 기회와 향락을 붙잡았습니다. 신의 노여움이 항상 걱정되었던 뱃사람들을 위한 신전들이 가득했고, 선술집과 그 주변의 매춘업소 또한 즐비했습니다. 선박 제조와 수리를 하는 공장들, 항해에 필요한 물품 판매 업소들, 그리고 바울과 브리스길라 부부가 운영하는 천막 공장도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 공장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전도하였고, 선창가를 떠도는 민중들, 가난한 오클로스들, 전통이나 종교에도 별로 권위를 두지 않는 부랑자들,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이들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사회의 문화가 고스란히 들어있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고린도 교인들의 온갖 추태들은 실제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헐뜯고 싸웠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나 이권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 서로 고발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 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어떤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며 성노동자들과 마구 몸을 섞으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도 부유한 자들이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고 마시며 취했고, 가난하여 늦게 온 같은 교인들에게 남은 음식을 먹게 하는, 멸시하고 천대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집니다. 자기들이 겪은 종교체험을 최고라 여기며 저마다 자랑하고 드러내려고 해서 예배를 망친 일들이 허다했고, 예수의 부활 문제, 음식을 먹는 문제, 이방 신전에 출입하는 문제 등 신학적 논쟁들도 풀지 못하고 싸움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도 조직이 있고, 제도와 질서를 갖추려는 흔적이 있습니다. 교사와 예언자, 사도들과 집사들이 있습니다. 온갖 사람의 말, 즉 수사학적 능력을 갖춘 뛰어난 이들도 있고, 천사의 말, 즉 신탁을 받아서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언의 능력으로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고, 온갖 비밀과 지식을 드러내는 신령스러운 지혜의 소유자도 있습니다. 이 산더러 들려 저 산으로 가라 했을 때 실제 그렇게 해 낼 만 한 굳센 믿음의 소유자도 있고,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려는 열정 가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천박하고 막돼먹은 인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딱 한 가지가 부족했으니,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뭘까요?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나르시시즘, 자기 욕망의 발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사랑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럼, 사랑은 무엇일까요? 거창하게 말하거나 복잡한 철학적 개념으로 분석하지 말고 가장 직관적으로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저마다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저는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상대를 생각해서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상대를 배려해서 내 자유를 포기하는, 상대를 생각해서 모른 척하며 기다려주는 그 마음 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다소 도발적입니다. "바알의 이름으로" 한국 그 어느 교회에도 바알의 이름을 내세우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많은 한국 교회가 바알의 이름으로 목회하고 선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가 사랑을 낳고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평화가 진정한 환대를 낳고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진보가 더 깊은 겸손으로 이어지는가? 우리가 말하는 신앙이 정말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혹시 우리에게도 바알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뜻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마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속마음, 상대를 이기고 싶은 욕망이 나도 모르게 작동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보의 목소리가 왜 복음이 되지 못했는지, 진리의 구현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정의의 외침이 정죄에 그치고, 신앙이 왜 너무도 쉽게 우상 숭배가 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 주 야훼가 베푼 회의에 참석하여라. 와서 나를 보아라. 와서 내 앞에 서라. 와서 귀를 기울이고 내 말을 들어라!"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초청에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입을 열어 말하기 전에, 이미 열린 귀로 듣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승리를 맛보려고 남을 이기려 하기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먼저 섬기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바로 그 자리에서만이 바알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입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가 아니라
곁에 서서 손잡아 주는 '너'가 되십시오.
앞에 나서는 '나'가 아니라
뒤에서 서로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