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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길에서][13][정말 따듯한 세상]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인생은 참 얄궂다. 정말 만나기 싫고 다시 보기 싫은 사람은 꼭 다시 만난다. 야곱을 보면 우리 인생이 그런가보다 싶다. 그렇게 피하고만 싶던 형, 에서. 얼마나 그 만남이 힘들었으면 천사인지 하나님인지 하고 씨름까지 하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을까? 그런데 그 재회는 야곱의 걱정대로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화해였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승에서 쌓아둔 그런 불화를 다 털어 버리고, 서로 화해하고 용서한 후에 천국으로 오라고 우리를 이렇게 재회하게 만드시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한 바퀴 다 돌고 다시 귀환하는 그 기사를 다시 만났고 버스에 오르면서 “어디 한번 또 해봐라”하는 심산으로 웃으며 “어이쿠, 안녕하시오, 또 뵙네?”라고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의외로 머쓱해서 “네~”한다. 아까와 달리 대꾸해주는 이 기사에게 고마워해야 정말 착한 사람인데 내 마음 속엔 “이 녀석이 아까 분명 의도적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스치니 나는 분명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버스는 나를 다시 장성 터미널로 데려다 주었다. 이미 날은 늦은 오후로 접어들었고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지라 배가 출출해졌다. 마침 터미널 바로 앞에 수타짜장면집이 있기에 얼른 들어가서 짜장 한 그릇을 시켰다. 한 그릇에 무려 3,500원, 그 양은 곱빼기보다 많다. 수도권 어디에서고 이런 양과 가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해서인지 허겁지겁 맛나게 짜장면을 먹는데 홀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온다. 내용인 즉, 무더위에 국도순례에 나섰던 한 대학생이 경주 근방을 걷다 일사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한 손으로 부채를 부쳐가며 또 한 손으로는 파리채로 파리를 때려잡던 주인아저씨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러신다. “오메, 어제 오늘 무쟈게 덥네요, 시방 장성이 33.3도라네요” 뉴스 기사와 아저씨 말씀에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나는 터미널로 들어가 정읍행 버스표를 다시 끊었다. 이 더위에 장성에서 쾌적한 잠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버스 시간이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터미널 안은 이미 찜통이었다. 곰곰이 궁리를 하다가 나는 다시 아까 오디냉차를 마셨던 다방으로 올라갔다. 다방 할머니께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자리에 잠시 앉아 땀 좀 식히고 가게 해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얼른 들어오란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원한 냉차 한 잔을 주시더니 곧 방울토마토 한 그릇을 주시면서 자기네 밭에서 경작하는 것이라며 먹어보라신다. 이게 웬 떡이냐, 아니 이게 웬 디저트냐 싶어 하나를 입에 넣어봤는데 설탕물에 담가둔 것처럼 달고 맛이 있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러자 할머니는 또 한 그릇을 더 주신다. 아차, 싶었다. 괜히 맛있게 먹어서 저 분에게 또 신세를 지는구나 싶었다. 버스 시간까지 더위도 식히고, 티브이도 보고, 맛있는 방울토마토까지 배터지게 먹은 나는 도저히 그냥 나올 수가 없어서 천 원짜리 한 장을 테이블에 슬쩍 놓고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다방을 나왔다. 다방 문을 닫고 계단을 반쯤 내려서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그러더니 이러시면 안 된다고 내가 테이블에 슬쩍 놓은 천 원을 내게 주신다. 그러면서 내게 건강하게 서울 올라가시라고 인사를 하신다. 나는 민망했다. 달랑 돈 천 원을 놓고 나온 것도 민망한데 다시 되돌려 주시기 위해 내려오신 할머니 뵙기도 민망했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세상은 따듯한 사람들이 많아서 살 만하다”고. 그리고 여전히 세상엔 믿을 사람들이 많다고.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도, 확신도, 믿음도 없다. 그저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고, 아니 그러길 바라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을 대할 땐 늘 눈치보고, 밀고 당기고, 의심하면서 사는 게 우리들이다. 그런데 난 이 여행을 통해서 정말 체험하고 확인했다. 이 세상엔 정말 따듯하고 마음씨 좋은 분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분들을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수없이 만났다. 그 분들은 나그네를 따듯하게 대접했고, 발품을 팔며 도와주었고, 자신의 것을 내주었으며, 마음으로 안전한 여행을 기원해줬다. 이들 모두 기독교인인지, 타종교인인지, 아니면 종교를 갖지 않은 분들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기독교인이자 신학자로서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분들 모두 그리스도의 작은 가르침들을 몸소 행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엔 참으로 많은 작은 그리스도들이 있는듯 했다.

정읍행 버스에 몸을 싣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채 즐기기도 전에 아랫배가 아파왔다. 아마도 조금 전에 먹은 짜장면에 배가 놀란 듯하다. 하기야 점심도 찬 냉면이었고 저녁도 기름진 짜장면을 먹었으니 배가 불편할 만도 했다. 자주 이런 현상이 있어 와서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 했지만 뱃속의 전쟁은 쉬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긴급신호가 왔다. 에어컨은 시원하게 나오는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배를 움켜잡고 정읍에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내게 버스 앞문이 열리는 소리는 구원의 선포와도 같았다. 배를 움켜잡고 터미널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화장지가 없다. 아니, 화장실 모습이 정기적으로 화장지를 채워 놓을 것 같이 생기지 않았다. 다시 나와 화장지를 사서 볼일을 보고 나니 온 몸이 다시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대형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합실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빌딩들이 가득하다. 그 중엔 무슨 장, 무슨 모텔이라는 불빛이 환하게 보인다. 하루 종일 여러 번 버스를 탔고, 땀을 흘렸고, 게다가 속까지 불편해서 설사를 한 후라서 그런지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기진맥진했다고나 할까?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불빛을 좇아 가릴 것 없이 숙소를 잡아 들어갔다.

별로 상쾌하지 않은 밤을 보낸 뒤 이른 아침부터 길을 서둘렀다. 이곳에 와서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였다. 그곳은 바로 정읍시 입암면에 있는 보천교의 근거지 대흥리였다. 강증산의 제자로서 일제 때 보천교를 창시한 차경석이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과 동일한 규모의 성전을 지어 스스로 천자로 즉위하였다는 전설적인 곳이 바로 입암면 대흥리이다. 다시 말하면 대흥리는 자연부락이 아니라 원근각처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이룩한 종교도시였다. 급하게 잡은 택시는 다시 거꾸로 남쪽으로 향했다. 피곤함과 더위와 싸워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 찾아간 대흥리와 보천교 본부는 실망 그 자체였다. 하기야 실망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천교 자체의 과장으로 육백만, 조선총독부 집계로만 170만 명 신도를 갖고 있었다는 보천교의 본부건물은 전국 각지에서 가장 좋은 목재들을 수송하여 대규모로 건축되었지만 보천교를 민족종교로 여겨 해체하려 했던 일제에 의하여 경매당하여 해체된 후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천교 본부 해체 시 나온 목재들은 전주역사 등 주변 공공건물을 건축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은 모든 부속건물들조차 흔적도 없고 그저 초라한 한옥들만이 남아 있다. 그래도 이곳에 온 나의 이유는 충분하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에 신흥종교가 창궐하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신흥종교 대부분은 매우 강한 민족주의와 종말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민족주의와 종말론이 위세를 떨치는 시기는 민족의 가장 암울한 시기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바로 이 곳 주변이 이러한 용트림의 현장이었는지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동학의 발원지인 고부, 강증산이 태어난 두승산, 녹두장군의 황토현 전투현장 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말 민족주의와 신흥종교의 총 본산이었던 이곳에 보천교 차천자는 동북아를 지배하려는 이상을 꿈꾸며 종교도시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때 위세를 떨쳤던 종교왕국의 본산 대흥리의 보천교 유적지는 아직도 복원되지 않은 채 쓸쓸하게 과거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듯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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