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20)

사. 제 3세대

2. 여성 독립운동의 횃불 김마리아(1892~1944)

▲김마리아.

소래 마을 출신으로서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의 정화(精華)로서 김마리아의 존재처럼 선명하고 비장(悲壯)한 존재는 없다. 다른 분들도 다 우리나라의 교회사와 애국운동에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귀중한 자취를 남겼지만 김마리아의 행적은 마치 한 토막 드라마와 같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을 준다. 김마리아는 소래 마을 김 판서 댁의 삼대 김윤방(金允邦)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보통 이 가정을 [좌수 댁]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그 집안은 하인과 소작인들만도 백여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착취와 억압을 받는 계급이 아니라  김 좌수의 그늘을 떠나지 않고 자진하여 섬기는 서민들이었다. 
 
그리고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이 마을에 서상륜, 경조 형제가 복음을 들고 들어와 솔래교회를 설립하고 또한 교회 안에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마을에 서당이 있어 한학을 가르쳤다. 김마리아는 언니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에 늘 따라다녔는데 어느 틈에 귀동냥으로 들은 훈장의 가르침을 통하여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사학(史學)에 이르기까지 언니들보다 앞선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한양에서 언더우드와 에비슨 선교사가 수시로 찾아와 신앙 지도를 하고, 교회 제도를 잘 인도하여준 까닭으로 그 미개하던 시절에 이 소래 마을은 아주 진보된 문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자연히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으로 훈련을 받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그의 태도가 어린 아이 답지 않게 근엄하고 정숙하였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남자의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하며 성장하였다. 훗날 고모가 되는 김필례는 조카 김마리아의 포부를 기억하고 있다. “고모, 저는 장군이 될래요. 신라 시대 김유신 장군처럼,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처럼, 그리고 임진왜란대의 이순신 장군처럼 요.”
   
김마리아에게 일찍이 시련이 닥아 왔다. 그녀가 겨우 다섯 살 때에 아버지 김윤방이 학교 일과 마을을 개척하는 일에 과로하더니 감자기 병석에 누워 두달 만에 세상을 떠나더니 얼마 아니하여 어머니마저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큰삼춘 김윤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김윤오는 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근거지를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고조할아버지 김판서가 낙향하여 이룩했던 소래마을을 슬픔과 아쉬움으로 떠나게 되었다.  김윤방, 필순 형제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옆에 [김형제상회]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래서 하와이, 홍콩 등지로 인삼 무역도 하고 목재상도 경영하였다.
 
1905년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를 강점하였다. 그러자 애국투사들의 항일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작은 삼촌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형제의 의를 맺고 김규식, 노백린 서병호 등과 함께 조국의 광복운동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작은삼촌 김필순의 방에서 이들 우국지사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에 김마리아는 차를 나르고 심부름을 하며 그들의 회의를 지켜보면서 어느 듯 정의감과 애국심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 무렵 이들 지사들 사회에 경사가 생겼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김혜련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삼촌 김필순은 의형(義兄)인 안창호를 위하여 결혼비용을 다 부담하고 방까지 내어주며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다.
  
고모 김필례는 이미 정신여학교의 전신인 연동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언니 김함라, 김미렴도 입학하고 드디어 김마리아도 16세 때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배달민족의 상징인 검정 통치마, 흰 저고리를 입고 수업을 하였으며, 전원 기숙사에 들어와야 했다. 그리고 매일 첫 시간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시간표에 따라 수업에 임하고는 하였다. 선생님으로서는 거의가 다 미국의 선교사들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 신마리아, 김원근 두 분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의 애국자로서도 큰일을 한 분들이다. 김마리아는 이 두 분을 지극히 존경하며 따랐다. 그리고 작은 고모 김필례는 처음에는 학교 선배로서, 그리고 졸업 후 선생님으로서, 엄마처럼 마리아를 이끌어 준 지도자였다.
 
선교사 선생님들은 엄격한 규칙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은 숙녀로 양육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부활절, 성탄절 때면 아름답고 뜻 깊은 행사를 통하여 꿈 많은 소녀들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마리아는 1910년 6월 16일에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에 같이 졸업한 동창생들은 거의가 후에 [애국부인회]라는 조직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우리나라의 공로자들이다.
 
김마리아는 그 후 얼마간 언니 김함라가 가 있는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모교의 절실한 요청에 의하여 3년 후에 정신여학교 교사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언니 김미렴이 기숙사의 사감으로 있었으므로 그들은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이 때 김마리아는 22세의 가장 어린 교사로서, 어느 학생은 그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조용하고 근엄한 김마리아는 모든 학생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모든 면에서 저들에게 압박을 받고 착취를 당하는 현상이 날로날로 더 해가는 시기였다. 김마리아는 제자 여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고귀함과, 삼천리 금수강산의 아름다움, 여성 교육과 각성이 절실함을 성심성의껏 교육하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독립을 되찾는 일에 여성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여야 하겠다는 뜻을 소녀들의 가슴에 확실하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정신여학교의 루이스 교장의 권유에 의하여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에는 이미 고모 김필례가 유학을 와 있었다. 그녀의 지도를 받으며 먼저 일본어를 익히기 위하여 금성학원(金星學院)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영어와 일어의 훈련을 마치고 동경여자학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월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에 각성한 우리나라의 청년 학도들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여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마리아도 백관수(白寬洙), 송계백(宋繼白) 등과 협의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화학당의 황애시덕(黃愛施德)도 만나게 되었다. 훗날 황애덕(黃愛德)으로 고쳐 부르게 된 그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혁혁한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에 드디어 일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침착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대응하는 그녀에게 일경은 일단 위협을 하면서 8시간 만에 석방하였다. 이 때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다. 경성에서는 3월 3일을 임금의 장례인 인산(因山)날로 잡았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때를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기로 하고 문안을 작성하여 수천 장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리고 YMCA회관에 모여 선포식을 거행하고 결의문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과 일본 국회에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 독립선언서를 조국으로 보내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여 그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김마리아는 자신이 그 임무를 담당하기로 자원하였다. 그리고 일본 여인의 의상인 [기모노]를 준비하였다. 이 일은 생명을 내 건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얇은 미농지에 잔 글씨로 써서 기모노의 허리띠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 두르고 일본을 떠났다. 시모노세끼(下關)에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귀국하였다. 다행히 경찰은 일본 여인으로 변장한 김마리아를 검색하지 않았다.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는 독립운동자들이 이미 마련한 거래소였다. 그곳으로 살며시 숨어들어간 마리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그녀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고모부 서병호와 고모 김순애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끌어안고 반가워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자기의 귀국 임무를 자세히 말씀 드렸다. 여기서 그들은 다시 각자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국내의 각지로 밀행하였다. 김마리아는 독립선언서를 각계각층에 있는 우국지사들에게 전달하며 국제정세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진척상황을 알려주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드디어 조선의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질서 있게 진행되었건만 일제는 총칼로 이 귀중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학살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지사들이 체포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정신여학교로 와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마리아는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세 밀려서 쫓겨 들어온 학생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며 안타까워 하였다. 그러다가 학교 안에까지 침입한 일경들은 마리아를 체포하여 포승줄에 묶어서 종로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거기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들의 악랄한 수법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이 때로부터 시작하여 경무총감부로 이송되어 심문당하는 동안 마리아는 너무나 많이 맞고 모욕을 당하여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경찰의 제복을 입었으나 마치짐승같고 야만인과 같은 저질의 무리들인지라 이 순결하고 고귀한 조선의 여인을 발가벗겨서 쑤시고 때리고 심지어는 성기의 털을 와드득 뽑아내는 잔인성을 자랑하며 몇달에 걸쳐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뚜들겨 맞고 욕설을 들으며 심문하는 저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의연한 자세로 버텨내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저들을 대항하겠습니다.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나라가 저들의 마수를 벗어나서 독립을 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마리아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저들은 너무나도 혹심하게 고문하여 마리아의 신병을 검사국으로 송치하여 재판을 받을 수도 없을 정도로 쇠진하였다. 저들은 마리아가 이미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5개월 만에 가석방하였다. 고모와 언니들은 마리아를 데려다가 온갖 정성을 다 하여 간호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필사적인 치료와 보호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건강한 몸이 아닌데도 마리아는 정신여학교 교단에 다시 섰다. 그리하여 어린 학생들을 믿음과 애국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 하여 가르쳤다. 그러던 중에 우리나라 이곳 저곳에서 나름대로 독립지사들을 돕기 위하여 활동하던 여성 단체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마리아는 그 일을 또한 잘 감당하여 비밀리에 모금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이 모임의 한 사람이 생겨서 이 비밀결사와 그 활동사항을 일경에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전 임원들과 함께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모진 고문과 심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제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한 김마리아를 6개월 만에 다시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마리아는 완전히 혼수상태에서 헛소리를 지르며 신음하였다. 이 모습을 보는 고모들과 언니들은 일본 경찰의 만행에 치를 떨며 분노하였다. 경찰은 마리아의 석방 후에도 감시를 계속하며 가족을 괴롭혔다.
 
그러자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선교사 윤산온은 마리아의 국외 탈출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마리아를 일본 옷으로 갈아입히고 인력거에 실어서 인천까지 무사히 호송하였다. 거기서 몇몇 애국지사들의 비밀 작전으로 소금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고모부 서병호, 김규식을 만나게 되었다. 그 뒤로는 그들의 보호와 안내를 받으며 상해 임시정부까지 이송되었다. 상해에 이르자 안창호, 이시영, 이승만 등이 반갑게 맞아주어 그들과 합세하여 생활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장래를 생각한 소래마을 출신의 가족들은 마리아같은 신앙이 독실하고 애국심이 강한 인물을 미국으로 건너가서 더 공부하게 하여 독립된 대한민국의 교육사업의 일군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고 있던 형부 남궁혁 박사와 언니 김함라의 주선으로 수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시카고 대학에서 MA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선의 정신여학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또 미국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재미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모금하여 정신여학교로 보내기까지 하였다. 오늘날도 정신여자중고등학교에 가 보면 김마리아를 기념관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김마리아는 다시 귀국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마리아를 서울에서 추방하였다. 그러자 전부터 연고가 있는 원산의 [마르타 월슨 신학교]의 학장 월슨 부인이 그를 초빙하여 그 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또한 그 학교 밖으로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고 교내 연금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에게 주어지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 하여 임무를 감당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때때로 악형을 받던 후유증이 발작하여 몸과 마음의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4년 3월 13일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5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이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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