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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 자전거 유랑자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내가 그 낯선 풍경을 처음 접한 것은 캘리포니아 해변을 따라 구불거리며 뻗은 1번 도로에서였다.

그때 나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족들과 2박 3일간 캘리포니아 남쪽으로 자동차 여행 중이었다. 마침 햇살 좋은 오후 시간 운전하면서 우편으로 눈부시게 펼쳐진 태평양의 풍광을 흘깃거리며 간간이 해변의 깎아지를 듯한 단애를 살피고 있었다. 한 고개를 넘어서니 멀찌감치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오르막길에 매달린 남자가 보였다. 차로 그를 스친 것은 불과 1,2초간의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짧게 스친 그의 인상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쯤 보이는 나이에 거무스름한 피부와 역시 검정머리를 한 그는 분명 백인이었지만 여느 말쑥한 백인의 인상과 판연히 달라 보였다.

그의 자전거에는 앞뒤로 잔뜩 묵직한 짐들이 걸려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까지 실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페달은 다소 위태롭게 보였다. 더구나 오르막길이어서 그가 페달을 밟는 동작마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맞춰 그의 이마와 볼에는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조금 뒤로 떨어져 그의 동무로 보이는 또 한 명의 사내가 비슷한 차림새로 두 바퀴를 굴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 2인 동행으로 자전거 여행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거쳐온 여정을 되짚어보니 그들이 그런 속도로 이 차도를 오르내려 다다를 저녁시간에 마땅한 여관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전거에 건 짐 꾸러미에는 비상용 천막과 음식, 간단한 살림도구가 들어 있을 터였다. 그들의 면상에 수염이 무질서하게 자라난 걸 보면 갖가지 세면도구도 없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그들의 목적지와 차림새, 그들의 짐 꾸러미 안에 든 내용물을 차근차근 추리해나가면서 왜, 라는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누구이며, 왜 이런 식으로 짜임새 있는 여행도 못되는 자전거 유랑을 시도한 것일까. 저들의 차림새만 봐도 단기간에 끝날 정처 있는 여행 같지 않았다. 그 여정은 비록 동무가 있어 그리 외롭지는 않겠지만 일종의 모험과 유랑의 형식에 더 가까워 보였다. 저들은 혹 경기파동으로 직장을 잃은 실업자가 아닐까. 더 이상 직장 구하길 단념한 채 조직체의 일원으로 감내해야 하는 반복과 속박의 라이프스타일을 떨쳐내고자 이렇게 가난한 몸을 자전거에 의탁하여 홀가분한 유랑 길에 오른 건 아니었을까. 자전거 헬멧조차 쓰지 않은 그들의 머리칼은 태양 빛 아래 흠뻑 젖었고 해풍에 휘날려 자주 시야를 가릴 게 분명했다.

태평양 해변도로의 그 짧은 마주침에서 비롯된 사색을 좀더 깊이 심화하게 된 계기는 이틀 후 내륙의 황막한 광야를 달리면서 본 또 다른 자전거 유랑자의 인상에 대한 충격적인 기억이 덧보태진 때문이었다. 내가 그때 달린 길은 캘리포니아 동부 내륙의 꽤 후미진 지방도로여서 20분 넘도록 자동차 한 대 지나가는 걸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방으로 트인 광야 지형이 둥글게 굴곡을 이루면서 마침내 지평선 끝에 가 닿은 까마득한 건조 지대였다.

오르막길을 향해 오르면서 한 굽이 커브를 틀었을 때 나는 마치 광야에서 튀어나온 동물처럼 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또 다른 사내를 스치게 되었다. 그는 해변도로에서 본 젊은이보다 수염도 더 덥수룩하고 얼굴도 태양빛에 더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이도 지긋하여 족히 40대 중반쯤으로 가늠되었다. 구릿빛 면상 위로 검은 빛의 낡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고, 자전거에 좌우 앞뒤로 매단 짐도 이틀 전에 본 젊은이들 것보다 무겁고 많아 보였다. 더 뜨악하게 비친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 이 역시 1,2초 사이에 잠깐 스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면상은 더없이 무심해 보였다. 이에 걸맞게 그의 행색은 몇 달간 세면이나 세탁 한 번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은 허름한 남루 그 자체였다. 먼 허공을 쳐다보면서 그는 필시 집시의 유랑을 방불케 하는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상으로 아무리 달려도 그처럼 느린 속도의 자전거 두 바퀴로 다다를 수 있는 도시도, 여관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홀로 이 적막한 광야에 무슨 인연으로 그토록 쓸쓸한 여정에 들어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가족도 없었을까.

두 건의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이 자전거 유랑자들이 단순히 겉멋이나 재미를 위해 이런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추론에 다다랐다. 이들의 여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가삼아 하는 스포츠 운동이나 낭만적 포즈의 산수 여행과 무관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동선에는 무슨 경기를 앞두고 감행하는 극기 훈련의 긴장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이후 더욱 각광을 받으면서 국내에서 유행을 타고 있는 자전거 타기 풍조는 복장부터 가볍다. 물병이나 가벼운 백팩 외에 별도의 짐이 없는 게 특징이다. 특히 산악자전거의 품질을 좌우하는 조건은 가벼운 몸체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을 생각했는지 옷차림이 가볍지 않고 짐도 주렁주렁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자전거에는 ‘생활’이 매달려 있었던 게다. 장기간 위장의 아우성에 대한 대응책과 과 함께 추운 밤을 견뎌야 할 도구들이 거기 담겨져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을 단순히 걸인(乞人)으로 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그들이 걸인이었다면 사람 많은 도심지를 택하지 않았겠는가. 굳이 그러한 해변도로나 적막한 광야에 들어가 짐 무거운 자전거를 탈 리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21세기 문명에 시달리며 살아오다가 절망한 자기 해체적 구도자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도적 저항의 몸짓을 이러한 고행의 자전거 유랑을 통해 표출해 보이는 것은 아닐까 다소 지나친 상상도 해보았다.

그 상상의 언저리에서 나는 다소 비약을 무릅쓰면서 제 몸의 에너지만큼 나가는 자전거로 막막하게 유랑하는 일의 신학적 의미를 반추해본다. 도착할 목적지와 안식할 정처가 있는 여유로운 여행은 길게 제 과거를 에둘러 회귀함으로써 삶의 재구성에 기여한다. 돌아가야 할 고향과 아비가 있는 탕자의 운명은 따라서 아무리 처절해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이 땅에 도무지 정처를 둘 수 없는 자들의 여행은 물결이 파랑 치는 것처럼 막막한 유랑이나 방랑의 스타일에 근접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이 너무 낯설어서 고향을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딴에는 이 땅의 모든 공간이 다들 너무 친밀한 장소여서 어딜 가도 무던하게 고향처럼 살아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자전거 유랑자들이 내게 심어준 강렬한 이미지는 고향과 타향의 경계가 애당초 불가능한 영혼의 무던한 탈주 그 자체였다. 그것은 유랑 자체가 생존의 유일한 조건이 되는 삶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다시, 새롭게, 떠나지 않으면, 그렇게 끊임없이 현재의 시간을 새로운 장소 가운데 해체하지 않으면 문명사회가 얹어놓은 짐 아래 눌려 그 존재의 무거움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갈릴리의 유랑자 예수는 이 땅에 안온히 거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정처 없음에 대해 탄식하듯 말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눅 9:58). 그는 여우나 새와는 종자가 다른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삶의 기본적 향유인 ‘거주’에 못 미치는 차림새로 동서사방을 떠돌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유랑동선에는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이 세상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있었고, 치유와 생명 회복의 은총이 선물로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 문명의 첨단에 선 소수의 자전거 유랑자들에게는 말이 타락한 시대에 몸뚱이 하나의 움직임으로 뭔가를 체현하려는 꿈을 품고 느린 바퀴를 굴리는 두 발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몸과 일심동체로 굴러가는 무거운 자전거의 두 바퀴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이 삶이 깃들만한 천연의 장소라고 시위하는 듯하다. 아니면 정반대로 이 세상에는 아무 곳도 삶의 정처를 둘 거주의 장소가 못되며 예외 없이 소멸해가는 추상적 공간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21세기에 재림한 ‘씨닉’(Cynics)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의 둥근 발걸음은 그토록 하염없고 마냥 정처 없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예수와 제자들은 이제 익명의 광야 공간에서 말을 잊은 듯, 이 시대의 변방에서 자전거 유랑자들로 변신하여 묵묵히 고행의 길을 간다. 더 이상 머리 둘 곳 없는 무주(無住)의 현실이 탄식거리가 아니라 운명의 지표라도 되는 양, 그들의 그 자전거 유랑은 객기 없이 담담하다. 오로지 신체의 주체성에 의탁하여 그들의 시선은 체제의 변두리에서 중뿔난 행복의 목표 없이도 평정심으로 사는 틈새의 길을 지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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