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학생은 부모에게 해결 맡기고 방관자로…
피해학생 마음고생한 얘기 듣고서야 눈물 쏟으며 “잘못했다”
“처벌은 가해학생에게 면죄부 줄 뿐”
“자기 잘못 직시하고 죄책감 느끼도록 해야”
서울 영등포의 H고등학교 1학년 박○○군은 같은 반 최○○군으로부터 지난 2010년 5월부터 12월까지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최군은 방과 후 박군과 단둘이 있을 때 구타하고, 돈을 가져오게 했다. 최군이 다른 이유로 전학을 간 이후에도 괴롭힘은 계속되어 결국에는 인터넷에서 본 동영상을 본떠서 성추행과 고문을 일삼기까지 했다. 6개월 이상 계속되던 괴롭힘은 박군의 친구가 박군을 억지로 경찰서로 끌고 가 신고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가해자는 방관, 피해자는 분노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박군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남들도 알게 된다는 생각에 창피했고 최군이 보복할까 두려웠다. 경찰에서 상담소를 소개해주어 어느 정도 도움은 받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당해왔던 일을 생각하면 분노와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렇게 그럭저럭 지내오던 박군은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최군의 부모와 합의를 해서 최군의 성추행 혐의가 삭제됐다는 얘기를 듣고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아무에게나 욕설과 폭력이 나왔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자고 있던 자신을 야단치는 교사에게 대들었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징계를 받자 화가 폭발해 학교기물을 의자로 부숴버리기까지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한편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 최군은 이제 자신의 잘못이 밝혀진 이상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최군의 부모는 자식의 미래가 걱정돼 피해자 측을 찾아 사죄의 뜻을 전하고 법적으로 자식의 벌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군은 박군이 지금 어떤 상황인가는 알 수도 없었고 그저 부모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화해권고제도에 참여한 당사자들
2011년 9월 서울가정법원으로 송치된 박군과 최군의 사건은 이제 담당판사의 판결만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의한 일방적인 합의 때문에 최군의 혐의가 최소화된 상황에서 박군은 판결의 결과가 어찌됐든 쉽게 승복할 수 없었다. 사건은 화해권고를 이끌 전문조정위원들에게 의뢰됐다. 위원들은 양측 당사자와 보호자를 만나 각자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듣고, 본인들이 원하는 최선의 해결책이 뭔지도 물었다. 결국 양측의 자발적인 동의 하에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화해권고제도에의 참여가 이뤄졌다.
드디어 법원 화해권고실에서 박군과 최군이 만났다. 보호자와 친구들, 담임교사까지 자리를 같이 했다. 전문위원의 진행에 따라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은 박군은 준비해온 세 장의 종이를 꺼내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분노를 담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어내려 갔다. 최군에게 그토록 따지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억울함을 눈물과 함께 쏟아놓고 보니 모임자리는 벌써 연민의 눈물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는 무거움이 자리했다. 최군과 보호자들은 박군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풀려고만 했던 모습을 후회하며 예의를 다해 사죄를 표했고, 이전에 아버지와 합의를 했지만 가장 큰 위로를 받아야 하는 박군과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여 새로운 변상금을 지급하기로 기꺼이 합의했다. 문제아로만 박군을 바라봤던 담임교사도 제자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사과했고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모임을 정리하면서 박군이 최군에게 한 말은 “원래 네가 가장 심한 벌을 받게 해달라고 했는데, 다 이야기를 하고 네가 반성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네가 더 좋은 애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그게 나에게도 좋은 거니까. 그리고 나에게 했던 일을 다시는 누구한테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였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최군이 눈물을 흘리며 했던 말은 “그래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게…”였다.
‘표면적 해결’로는 한계 많아
서울가정법원 화해권고위원으로 활동중인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간사이자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으로 있는 이재영씨(41)는, “이같이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이 만나서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피해자-화해자 조정/화해모임이라고 한다”며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회복적 정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회복적 정의’는 ‘응보적 정의’와 대비된다. 피해자를 대신하여 제3자인 학교나 사법부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의 일반적인 형태 즉 ‘응보적 정의’라면, ‘회복적 정의’는 처벌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회복’에 역점을 두고, 이를 위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도록 한다.
‘응보적 정의’는 처벌을 강화하여 폭력을 없앨 수 있다는 엄벌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엄벌주의는 “몇 가지 심각한 왜곡현상을 가져온다”고 이재영 원장은 설명했다. 먼저, 처벌의 목적은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로 하여금 문제해결의 초점을 자신에게 닥칠 처벌을 최소화하는 데 두게 만든다.
또 피해자의 소외현상이 나타난다. 피해자가 범죄로 인해 빼앗겨버린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상태를 회복하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처벌의 강화는 결과적으로 처벌의 대상인 가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가해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있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필요는 무시되고 만다. 또 처벌(통제)권한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의 편의에 인해, 결국 어떤 해결책이 나오더라도 피해자의 실익은 거의 없고 피해자 혼자 떠안아야 하는 고통과 책임이 그대로 남게 된다.
처벌 이후의 문제도 심각하다. 처벌을 받고 나면 범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처벌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처벌 이후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더 심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이 경범죄에서 중범죄로 발전하는 경우들이다. 이재영 원장은 “이들에게 처벌은 그것을 받음으로써 면죄가 되는 수단이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편리한 장치’”라며 “한 번도 제대로 자신의 행동이 미친 실제적인 영향에 대해 보고 듣지 못한 채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면, 이들의 선택은 오히려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을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할 수 없다면 책임 있는 사회구성원이 될 기회를 주어야 하지만, ‘응보적 정의’는 오히려 그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그로 인한 피해를 사회가 또다시 떠안게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학교폭력의 하나인 ‘왕따 폭력’과 관련, 이달 중 발표될 것으로 알려진 ‘왕따 폭력 방지법’ 법안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고 있다. 학부모 동의 없어도 가해학생을 교육당국이 지명한 학교로 전학시키는 ‘강제 전학제’,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 사실을 적을 수 있는 ‘학생부 폭력 기록제’ 등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영 원장은 “제3자로부터 받는 처벌보다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직접 듣고 인정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것만큼 힘든 처벌은 사실 없다”며,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기보다는 “당사자들에게 문제해결에 참여할 기회를 줌으로써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게 하고 그 책임을 무한히 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범죄가 개인의 선택과 비행의 문제라는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공동체가 연대적 책임을 가지고 풀어나가야 할 공동의 이슈라는 생각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