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격랑 속에 담긴 복음

2012년 1월 29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51:9-10,15-16
고린도후서 1:8-11
마태복음서 4:35-41  
   
설교문
  
오늘 본문말씀에 특별히 마가복음 그리고 마태복음 말씀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루 종일 전도를 하시고, 말씀을 전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같이 저녁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다른 쪽으로 가시는 길에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은 위기 가운데 배 저 뒤편에 누워 계시고, 제자들은 죽을 위험 앞에서 떨며 예수님을 깨우는 장면입니다. 배를 타고 세상을 항해할 때, 그 배가 우리나라 일수 있고, 우리 교회 일 수 있고, 그리고 우리 각자 자신 일 수도 있습니다. 배타고 지금 가는 길인데,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가 뒤집혀서 죽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그것도 모르고,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를 깨웁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나는 이미 배를 타기 전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너희들과 같이 먹이지 않았느냐? 기적을 보지 않았느냐?” 배고픔만큼 풍랑이 없습니다. 제일 큰 풍랑이란 것은 오천 명이 굶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먹여 주지 않느냐? 바람이 불어서 배 안에 있는 우리를 보고 왜 이렇게 염려 하느냐? 아마 기적이 없었으면 염려가 당연할지 모르지만, 기적을 막 보고, 경험하고 온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조금 전에 있었던 믿음을 이 바다에서는 지킬 수 없느냐? 믿음이 없구나? 그러면서 예수께서 바다보고 명령합니다. “바다야 잠잠해라. 바람아 멈춰라. 그랬더니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잠잠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아마 주무셨겠죠.

여러분 이 이야기를 오늘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시고, 어떤 복음의 메시지가 이 속에 담겨 있습니까? 폭풍은요? 항해하다가 배한테 위험신호 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을 보면 폭풍이 반드시 나쁜 것만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폭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홍해가 갈라지고, 갈라진 홍해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폭풍을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한테 이집트 당시의 폭풍은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이었습니다. 아마 이집트백성한테는 뒤에 따라 오는 군대가 몰살되어 죽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백성한테는 폭풍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서 갖는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폭풍이 저줍니까? 축복의 신호입니까? 여러분이 살다가 위험에 부딪히면, 어려움에 부딪히면, 격랑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으면 그걸 여러분은 저주로 받으시겠습니까? 축복의 신호로 받으시겠습니까? 병에 걸리면, 재산이 탕진되면, 신상에 어려움이 닥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그걸 무엇으로 보는 게 좋습니까? 오늘 예수 말씀은 이런 것 같습니다. 폭풍은 분명히 위기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위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험이고, 또 하나는 기회 입니다. 위험만 있는 위기는 없습니다. 또한 기회만 있는 위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둘 다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느 쪽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이 폭풍을 극복할 것이냐. 오늘 예수님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믿음의 강조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폭풍이 지난 다음에 잔잔해 질것이고, 다른 곳으로 건널 수도 있을 겁니다. 폭풍 다음에 우리가 갈 목표인 희망이 있다. 여러분 희망의 인사 하셨죠? 폭풍 만난 제자들, 바다에서 우왕좌왕 고민하는 제자들. 지금 이 장면의 주제가 무엇이냐? 폭풍, 위기 이게 아닙니다. 지금 주제는 숨어계시는, 주무시는 예수와 함께 찬양할 수 있는 희망찬가!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죠? 푹풍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랍니다. 폭풍 속에서 보이는 것은 절망이지만, 주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면 희망입니다. 두 개를 동시에 차지 할 수 있습니까? 폭풍 속에서 이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가능합니까? 쭉 읽어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경의 모든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예수는 기적의 창시자이시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기적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걸 보여 주려고 기적 일으키신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한테는 기적은 당연한 이야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한테도 기적은 당연한 이야기, 오직 우리 인간들한테만 기적일 뿐입니다. 왜 보여 주셨습니까? 하나님 잘 났다고 광고하려고요? 이것저것 하나님 스펙 만드시려고요? 하나님 홍보 하시려고? 하나님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유권자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기적의 목적은 자기가 만든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라고, 어려움에 닥쳐도 하나님이 궁극적 해결자임을 믿어서 인간사회가 복되게 살라고, 사람이 살면서 보람 있게 살라고,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되라고, 하늘의 기적을 땅에서 이루어서 땅이 복 받으라고.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은 하늘 이야기를 통해서 땅이 복 받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시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된 인간이 복되게 하시려고 하나님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요, 저는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여러분도 평신도 신학 공부하시죠. 신학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이야기가 신학입니까? 뒤집어 보면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신학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복되게 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 돼서 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어려움 속에 풍랑을 이기고, 풍랑 속에 보이지 않지만 잠겨 있는 희망을 노래하라.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취하라.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땅을 살아가자. 하늘 이야기는 땅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이 말씀을 보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한테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한테만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와 같은 사람한테도 과거에 보면 이 나라에 엄청난 기적 같은 것을 만들어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오늘 몇 가지말씀 드리면서 정치적인 견해나, 정당이나, 어느 특정 지도자에게 경도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경부고속도로가 60년대 만들어 질 때 저도 기억합니다만 난리가 났었죠. 반대가 많았고,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 무슨 고속도로냐. 그 고속도로를 통해서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왕래합니까. 얼마나 많은 물품들이 왔다 갔다 합니까. 사람이 소통하고, 만나고, 사업하고, 도로가 아니라, 사람이 만나는 길입니다. 저는 고속도로 하나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누가 뭐라 했던지 기적과 같은 사건의 단초다. 철 만들자고 포항제철 만들었죠. 제가 보니까 전문가들이 정말 반대 했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 없었더라면 기관 사업이 생겼을까? 배 만드는 공업 꿈도 꿀 수 없을 때 만들어서 오늘 엄청난 조선공업이 되었습니다. 반도체 산업 한다고 하니까. 그 반대되는 회사가 삼성 망했다고 해서 축배 들었다고 합니다. 엉터리 같은 일 한다고. 제가 오늘 지어서 말하는 거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만 드립니다. 우리가 현실에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미래를 제시하면 제시한 미래가 사람이 소통하고,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먼저 모이고, 감사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노력과 감동을 결집 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최근에 저희 사회 이런 상황에서도 참 어려운 이야기. (장로님이 기도하셨지만) 양극화가 빚어 낸 비극.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헤매야 되는 오늘의 현실. 그렇다고 그래서 공장을 많이 세우고, 자동화 하면 일자리가 생기느냐 하면 갈수록 일자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다 기계가 하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보건데 4대강 사업 같은 걸 그 논란이 많고,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차라리 하나만 잘 세우고, 나머지 돈으로는 일자리 창출에 썼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중국과 일본에서 막 몰려오는데 관광 사업이 발전해야 하는데, 서비스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썼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도 자꾸 하게 됩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쉬워서. 사람의 결정과 모든 것은 중요하지만 훌륭한 사업일수록 사람이 만나게 해야 한다. 사람이 만든 물건도 나눌 수 있게 해야 한다. 감동을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닌 쇼케이스는 안 된다.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으면 그 속에 저는 하늘도 담긴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잘 나가야 되겠는데,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죠. 이 작은 나라 하나님이 축복했다고 믿는 나라. 비록 땅 덩어리는 작지만 열심히 일해서 정신력도 기르고, 물질도 기르고, 내로라한 나라가 됐는데. 이제 앞으로 21세기는 너무나 큰 경쟁 속에서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면 갈수록 우리한테 고민이 많습니다. 제가 이러면서 네덜란드 이야기를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아시는 대로 유럽에 가시면 불란서와 독일과 같은 강대국, 영국과 같은 바다 넘어 강대국 틈에 끼어서 작은 나라들이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작은 나라. 바다보다 육지가 낮은 나라. 그런데 이 나라가 강인한 성품을 가지고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몇 가지 이야기 중에 두 가지 이야기만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학에서 종교개혁 이후에 칼뱅이라는 장로교 신학자가 나와서 “열심히 일합시다, 자유를 누립시다, 민주주의 합시다, 그리고 정의를 이룹시다” 하고 기독교 신앙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회 참여, 자본주의도 심었고, 노력도 심었고 했습니다. 그런 칼뱅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칼뱅의 정신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전 유럽에서 네덜란드입니다. 그 네덜란드는 칼뱅 장로교 전통 하나 가지고 잘 되었느냐 그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 평가 속에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지만, 모든 유럽 중에서 가장 포용주의를 취한 나라입니다. 얼마나 넓은 지요, 다 끌어안았습니다. 예를 들면 불란서에서 왕정파와 공화파가 싸울 때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망명지를 화란으로 갔습니다. 영국의 존로크도 망명객이었습니다. 영국이 심각하게 핍박할 때 화란이 망명지였습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는데, 유대인 소피노자도 그랬고요. 네덜란드 사람들을 볼 때 신앙으로는 칼뱅주의 신앙으로 메여 있었고, 거기에 또 하나는 소위 우리가 똘레랑스라고 말하는 관용과 포용이 화란처럼 많은 나라가 없다고 다들 인정합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하면, 이 나라는 다문화도 꽃피고, 다양한 걸 갔다가 칼뱅주의적 철저한 결단으로 뭉쳐서 다문화를 꽃피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마약 퇴치를 위해서 약방에서 소량의 마약을 공개적으로 팔게 했습니다. 그 마약이 그늘 대신 햇빛에 나와서 공개경쟁하고 양심적으로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마약 팔자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중국이라는 거대 강국과 일본 강국 사이에 놓여 있고, 멀리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또 우리 주변에 있고, 러시아라는 나라가 우리 주변에 있고,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헤쳐 나가야겠는데, 오늘 갈릴리 풍랑을 만나 배에 탄 사람처럼 혹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대한민국 배 속에 경제 풍랑이 나고, 정치 풍랑이 날 때 대한민국의 뱃속에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 예수 깨워라. 절망의 한 가운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지금 잠자고 계신다. 이 분을 깨우자. 깨워서 이렇게 힘을 얻자. 이 땅에 살아가는 백성들아 이 풍랑에 좌절하지 말라. 풍랑을 이기면 내가 약속한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을 만들어 가자. 저는 이런걸 보면서 우리는 일본 배척하고, 중국 배척하고, 미국 배척하고, 러시아 배척하고 못 살아 갑니다. 옛날 아주 힘들 때 우리나라가 발판이 되었습니다.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그리고 러시아가 우리를 침략하고. 둘이 싸워서 우리가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러일전쟁! 중국과 일본이 싸울 때, 우리는 희생타가 되었습니다. 청일전쟁. 6.25전쟁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발판이 되어서 분단이 되었습니다. 역사적 격랑입니다. 풍랑입니다. 오늘 시점에서 우리는 배제하며 살려고 합니까. 우리는 러시아를 끌어 드리고,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끌어 들여서 이 땅이 발판이 되데, 전쟁의 발판이 아니라 승리하는 평화의 발판이 됐으면 좋겠다. 동아시아가 행복하려면 한반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는 먹힐 수 있는 나라가, 여기를 통과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하다. 그 만큼 자부심과 능력과 결단을 오늘 우리에게 지금까지 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는 발판삼아 나아가자. 그렇다고 하면 땅덩이 넓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경제력 높이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땅 이 나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하늘의 사람,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를 깨워라. 정신력을 갖자. 신앙을 회복하자. 그래서 어떤 폭풍이 와도 이분의 말씀대로 함께 나가자. 저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다시 보면서 오늘 우리의 주제는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이 아니라 절망 속에 담긴 희망입니다. 희망에 주인이신 그리스도라는 분을 깨웁시다. 우리나라와 저한테도 참 유명한 장군이 한분 계십니다. 저는 전쟁의 영웅인줄만 알았습니다. 맥아더 장군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느 글에 쓴 기도문 하나를 보고 제가 꼭 여러분과 나눠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마지막 해임당하고,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고 말하기 전 어느 때 쓴 기도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제가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내 자녀로 하여금 정직하게 패배하더라도 자부심 갖고 꿋꿋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승리하게 되면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십시오.
안위하고 평탄한 길을 가기보다 고난과 도전과 긴장의 잔혹 속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풍폭 속에서도 부지런히 일어 날 줄 알고, 넘어진 사람들을 끌어안고 연민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아이로 키워 주옵소서.
마음도 맑고, 높은 목표 갖으며, 대신 남을 다스리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소리 내어 웃기 전에 먼저 울 줄 알고, 미래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데 과거도 잊지 않는 그런 아이를 만들어 주옵소서.

저는 맥아더 장군이 군인인줄만 알았더니 자상한 아버지 이었습니다. 제가 이 기도를 읽으면서 내 자식이 절망 속에서 정당하게 살다가 패배하면 그래도 자부심 가지고 꿋꿋하게 서라 이렇게 할 부모가 몇 사람입니까. 승리하면 신나서 웃어라 할 부모 대신 승리하면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라. 많이 벌었으면 겸손해라, 그리고 나눠라. 많은 힘이 있으면 누르지 말고 겸손하게 섬겨라. 이렇게 자식을 기를 수 있으면, 이렇게 이 나라를 우리함께 끌고 갈 수 있으면 맥아더뿐이 아니고요, 우리 모두가 이 나라는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고, 우리의 사람은 작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힘센 사람이 되어서 위기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라고 오늘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폭풍 언제나 있다. 더구나다 폭풍우가 지금 저녁에 있는 게 아니라, 유대교 절기처럼 저녁이 되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새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위험이 닥쳤다. 고난과 고초를, 질곡을 위험함으로 어려움으로 볼껀지.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는 기회로 볼껀지 그것은 우리 믿음의 결단에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주무시고 계시는 희망의 주인 그리스도를 깨웁시다. 그 그리스도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 희망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현실화 시키는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종교지도자로 예수 믿지 마십시다. 모든 인간의 주인으로 희망의 주인으로 믿는 예수를 만민에게 전합시다. 그리고 이 믿음을 우리 혼자만 지키는 게 아니라 이웃과 동아시아 전 세계에 나눕시다. 그리스도 이 분은 죽으셨지만, 깨어나서 만민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가 고맙습니다. 이 예수가 여러분의 예수가 되고, 만민의 예수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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