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남교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2012년 2월 5일 주일예배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로마서 4:13~25

설교문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의 국방장관은 뉴턴 베이커였습니다. 그는 전쟁이 한창일 때 유럽 어느 야전병원에서 한 병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두 다리와 한 팔과 두 눈마저 잃은 불쌍한 청년이었습니다. 베이커 장관이 두 번째 그 병원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원장에게 그 불행한 청년이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원장은 웃으면서 “그 병사는 이 병원에서 자기를 간호해 준 간호사와 결혼했으니 살아 있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베이커 국방장관은 사임을 하고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의 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대학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 가운데 그 야전병원에서 본 거의 희망이 없어 보인 그 청년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베이커는 그 청년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이 오히려 베이커 장관을 위로했습니다. “베이커 장관님, 장관님께서 은퇴를 하셨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보람 있는 일이 많으니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더 힘차게 일하십시오” 이렇게 미래에 대해서 꿈을 꾸고 도전하면 그 꿈이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삶입니다.

2,500년 전 바벨론 땅에서 울부짖던 유다 백성들처럼 오늘날에도 똑같은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죠? 하나님은 왜 제 사정을 돌봐주시지 않죠? 아마도 하나님은 저를 잊어버리셨는가 봐요.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는가 봐요”라고 말입니다.

런던의 한 길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그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을 합해서 선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스가 손님들의 반짝거리는 구두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사는 복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꿈과 희망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확실히 이루어집니다. 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꿈과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러한 영적인 진리를 확실히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에야 아들을 얻고 그로 인해 세계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사라가 90세인데 어떻게 아이를 임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진실하다고 믿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18절). 이 말의 헬라어 원문은 “소망을 거슬려서 소망 중에 믿었으니”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소망은 육적이며 세상적인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 언급된 소망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 영적인 하늘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을 초월하고 극복하여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신령한 소망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실상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고 아내는 65세였습니다. 그들은 그 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팔레스타인에 와서 환난과 고통을 이겨내면서 19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아내 사라는 전혀 태기가 없었습니다.

더 나이가 들이 이제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인데 어떻게 사라가 임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면서 네 몸에서 날 자손이 저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이 말씀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몸으로 어떻게 후손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늙었고, 아내는 경수가 끊어진지 이미 오래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 맘 때에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상식으로나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절대 바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소망을 물리치고 오직 믿음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인간적으로 회의하는 모습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다 물리쳤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만 믿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요셉 또한 그와 같이 믿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총리에 오르기 전에 노예 생활로 처참한 생활과 감옥살이로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놓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물론 요셉도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준 뒤 석방될 때 왕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하였으나 그가 요셉을 잊었는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여간 실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40:23).

요셉은 큰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셨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해몽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때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계속 일하십니다.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인데도 그들은 믿음으로 자식을 보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사라의 태에서 언약의 아들 이삭을 탄생시킨 것처럼, 이미 죽어 무덤에 장사된 지 삼 일이나 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사망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의 피흘려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며,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인지 우리는 매일 감격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죄를 용서하는 사건이요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라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납득할 수 없고 헛된 소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도무지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믿기지 않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죽은 몸 같은 그의 아내에게서 믿음의 위대한 후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며 소망할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불가능한 조건이 많아도 위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한 사람이 와서 꿇어 엎드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17:14-16)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17:17)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엎드러지고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그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소”(막9:22)라고 간청하자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는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의사들이 그저 왔다갔다 하고 1차 검진, 2차 검진을 하며 필름을 가지고 심각한 얼굴로 수군대고 하는데 “아, 내 병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의사가 자기에게 그 정확한 병명을 말해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암과 같이 죽을 병을 선고받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려움에서 자신의 병세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질려 하나님께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붙들어 주시겠지요, 고쳐 주시겠지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고 있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에 질려 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무서움과 두려움에 질려 현실을 외면한 채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을 직면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암이면 암이라는 사실을 듣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의학적으로는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도 사실 그대로 알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상태가 절망적이면 절망적인 그대로, 내 상태가 참으로 불가능하면 불가능한 그대로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 형편이 이렇습니다. 내 병이 이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이 원하시면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키이츠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두움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죄가 가득한 쾌락을 피하여 가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다.”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다.’ 그렇습니다. 내 앞에 집채 같은 파도가 밀려 올 때에 그것을 눈으로 가려버리고 한쪽 입으로 '주여 믿습니다'가 아니라 집채 같은 파도가 밀려 올 때에 두 눈으로 똑바로 뜨고 그것을 바로 바라보면서 비록 저 파도와 풍랑이 무섭지만 그러나 내 주님은 그 파도를 딛고 서서 그 위에서 걸어오시는 분이신 것을 믿고, 주님이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고, 그 집채 같은 파도를 향하여 내 몸을 과감히 던져 맡길 수 있는 장렬한 모험,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눈을 가리고 “주여, 믿습니다”라고 백 날 해보십시오. 제법 잘 믿는 것 같지만 진실이 알려질 때에 이 날까지 믿노라고 고백했던 수많은 고백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먼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직면하고 그것을 붙들고 믿음 가운데 씨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실을 직면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분께 내 모든 것을 믿고 앞으로 나갑시다. 새해에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고 나갑시다. 그 때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바랄만 하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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