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산에서 내려오라

2012년 2월 12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34:29-33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아멘.

베드로후서 1:16-19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7:1-8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모일 때 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 위에만 계시지 마시고, 오늘 여기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시옵소서입니다. 그 희망이 여러분 모두의 희망이고, 간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높이 계셔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동경하고, 희망하면서 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만나고 싶은 기다리는 강렬한 희망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제가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옷자락을 잡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바로 내 믿음의 고백이고, 하나님의 은총이구나”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종교와 신앙은 내 앞에 모시고, 희망 그리고 갈망으로 신앙을 표출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하는 갈망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런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지금도 남아 있는 굉장히 깊은 체험입니다. 바로 기아체험입니다. 아프리카에는 가난히 심각한데, 가난을 말로 듣고, 통계표로만 따지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신학교 다닐 때 굶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아마 어느 기독교 단체에 기아체험 학습프로그램을 가지고 왔고, 저는 세끼 밥을 굶으면서 느낌점이 있었습니다. “배고프구나, 배고프면 좋다,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요, 배고프고 참기 어렵다. 배고프니까 눈이 뒤집히는데요, 배고픔은 극복해야 한다. 나의 배고픔도, 목마름도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 배고픔은 극복의 대상이지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살아가면서 체험을 하고 싶으면 그리고 체험을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것을 훨씬 더 가까이 진실로 받아 드리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말씀 읽으시면, 또는 읽고 나서 말씀의 배후에 있는 생각, 말씀의 문헌적인 배경, 역사적인 배경 등을 다 꼬치꼬치 들쳐 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 읽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성경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쓰여 있는 것을 읽지만 마시고, 쓰여 있는 데로 한 번 먹는 것입니다. 또 마셔보고 살아 보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어느 스님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유명한 스님 중에 성철스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한 말씀 중에 아주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한 분이 “불경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하고 물어보니, 이 분 말씀이 “경전이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경전의 본뜻은 달을 이야기 한 것인데, 여러분들은 경전을 읽으면서 왜 손가락만을 보고 달을 보지 않느냐?” 우리 성경으로 한 번 가봅시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기록한 말씀이고, 하나님 나라를 느끼고, 경험하라고 쓰인 말씀인데, 하나님 나라는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손가락만 보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작 하나님 말씀이 말하는 목적은 보고 있지 않느냐? 한 번 곱씹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하나님의 뜻, 모든 것은 기록되고, 말씀 된 말씀이지만 살아야 먹고, 마시고 살아야 합니다. 만지고, 느껴야 그래야 저한테 귀한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역사적 과제를 가리킵니다. 모세를 통해서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나올 때 광야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살 때, 광야가 낮에는 태양이 장렬합니다. 그 때 기도하면 하나님 구름 기둥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구름이 작렬한 태양을 막아 주었습니다. 밤에는 춥습니다. 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니 불기둥을 주웠습니다. 사막에 살면서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천막을 쳐놓고, 모래사장에서 사십년을 살았습니다. 그 동안 배고프고, 목마르고, 힘들고, 고갈 당했습니다. 해방은 받아서 기쁜데 가나안 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천막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고, 그 후 예수님 당시까지도 일곱째달 보름이 되면 일주일 동안 천막치고 살기, 기아체험, 광야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천막 경험하기, 그 말은 성서에서 초막절 그리고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언제 올라가셨느냐하면 6일이 지난 다음 날, 즉 그 말은 6일 동안 초막절 행사를 마무리 하고, 마지막 날 산에 가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는 이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더니 올라가자마자 예수의 몸이 환한 빛으로 변했고, 예수와 함께 (생각하지도 못한)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를 나눕니다.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도대체 이 일이 꿈이냐, 생시냐? 이것이야 말로 요즘 말로 말하면 환상입니다. 엄청난 환상이 산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너무 흥분해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초막(텐트) 셋을 지을 텐데, 하나는 선생님이 사시고, 하나는 모세 선생님이 사시고, 또 하는 엘리야 선생님이 사십시오. 이렇게 산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지막 결론이 무엇이냐면 여기서 살지 말고, 내려가자. 산이 아름답고 좋지만, 빛으로 광채로 가득하지만, 여기는 살 곳이 아니다. 그냥 보이는 곳일 뿐이다. 살 곳은 어디냐 하면 산을 내려가서 아름답지 않지만, 힘들지만, 그리고 괴롭지만 우리가 사는 현장이 우리가 일할 곳이고, 내가 가야 할 곳이다.

이 말씀 중간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한참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에 보면 구름이 산을 확 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하늘에서 들려지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오늘 베드로서 구절에 쓰여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쓰여 있는 산상의 말씀하고 똑같이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이 아들을 좋아한다. 이 아들이 하는 말을 들어라.” 이 세 마디 이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이죠? 예수께서 처음 공생에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자기보다 앞서 간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 안에 앉으면서 하늘에서 하는 말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세상 사람들아 이 사람의 말을 들어라.” 세례 받을 때 하는 이야기가 오늘 똑같이 변화산상에서 하늘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예수가 왜 모세, 엘리야와 함께 있겠습니까? 무슨 환상입니까? 장막절 그리고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의 말씀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신학적인 말로 복음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변자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고, 율법서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변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예언자들을 대변합니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는 율법의 주인인 모세와 예언의 대변인인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 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복음, 율법, 그리고 예언이 대화합니다. 또 모세는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건져낸 지도자, 과거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해방의 역사입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야는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 희망의 상징입니다. 과거 구원의 역사에 있는 모세와 미래 희망의 상징인 엘리야가 오늘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함께 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대화합니다. 옛날과 내일이 대화합니다. 어제와 내일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제 바로 오늘, 어디서 산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이것이 오늘 변화산상에 있는 꿈의 전체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말합니다. “내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마치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잘 꾸며진 어느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모세를 보았습니다. 예수를 보았습니다. 노래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엘리야도 보았습니다. 세 사람이 모여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같이 있더군요, 신구약이 같이 있더군요, 복음과 율법이 같이 있더군요, 하늘과 땅이 같이 만났더군요, 그리고 속과 겉이 같이 만났더군요, 내가 보았습니다.”

오늘 베드로서 말씀에 이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가 아니 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말씀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신화로 되어 있어서 신화의 껍질을 벗겨야 인간 역사의 진면목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신화이야기 나와서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사람한테는 우리가 살아가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자기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기 속에 숨겨진 자신의 또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을 프로이드는 사람의 무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무의식이 무엇입니까? 무의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성적본능(리비도)입니다. 프로이드와 함께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한 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 이름은 칼 융이라는 정신병리학자입니다. 정신병리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융이라는 사람이 동료였는데, 둘이 갈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인 프로이드가 너무 성적본능만 무의식이라고 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융은 그것 이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융의 기록을 보면 아버님이 목사님이셨습니다. 융은 스위스에 계신 아버지 목사님은 신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같기도 하는 너무 흐리몽롱하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진짜 목사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학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심리학, 정신병리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속에는 성서가 있었지만, 이 분은 정신병리학자가 되어서 나중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의식, 내가 생각하는 의식세계가 아니고, 전혀 관여 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가 있는데, 모든 사람을 보니까, 모두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의식이 존재하는데, 그 무의식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집단적 무의식의 나이가 백만 년은 넘은 것 같은데, 이 무의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면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화를 읽어 보니까, 무의식은 신화를 만든 무의식이었습니다. 융은 이 무의식의 이름을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신화 속에는 영혼이 있고, 모든 인간들의 영혼이 하나가 돼서 집단적인 영혼이 되고, 우리 역사와 삶을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할께요. 이 분한테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무의식이 영혼인데, 영혼은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그러면 아까 변화산상의 이야기처럼 이 땅의 마귀와 귀신이 있습니까? 제 대답이 아니고, 제가 융의 대답을 하겠습니다.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한테는 귀신이 있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한테는 귀신이 없습니다. 무슨 답이 그렇습니까?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제어 할 수 없는 집단적인 무의식이 영혼인데, 집단적 무의식을 가지고 귀신을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가상현실이고, 직접경험하지 않는 현실이고, 이 땅에 오면 그런 가상현실이 아니라 나는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울고, 웃고 하는 오늘 현실 속에서 신을 만나고 싶지, 그런 가상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융은 성서 이야기는 않았습니다만 오늘 우리 생각에 신비스러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신 이야기의 신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하신 역사적 하나님, 이 하나님이 오늘 예수한테 와서 예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사람이 만든 신화의 하나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례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 오늘 변화산상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요? 저희들이 2주후면 수난절이 시작됩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비슷한 역사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 이야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경험한 장면입니다. 세례 받는 예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한다.” 홀연히 드러난 예수보고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한다. 너는 신화에 나오는 신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 속으로 가야 한다.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존재고, 사회적 존재다.” 무엇하러 갈까요? 옛날 신화의 신은 땅에 내려온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신의 아들은 땅에 내려와서 우리처럼 육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좋아하는 아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은 죽어야 합니다. 신화의 신과 우리가 믿는 신의 차이는 바로 ‘죽는 신’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지만 대신 죽는 신, 죽어가는 신을 이야기 하는 신화는 없습니다. 죽는 신은 신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바울이 그런 신화를 꾸민 그런 신이 아닌, 자기가 직접 본 신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예수야, 아들 예수야 난 널 사랑해.” 어디에서요?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갈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난 널 사랑해, 난 널 좋아해, 세상은 네 말을 들어야해.” 예수께서 마지막 고백하셨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나님 왜 버리십니까? 왜 죽게 놔두십니까?” 할 때 하나님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그랬을까요? 제가 성경에 기록 된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하소연 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세례 받을 때, 변화산에 있을 때, 구름 속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말하지 않았느냐?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보고, 난 널 사랑해, 배신하지 않아, 난 널 좋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와 똑같이 십자가 지자. 세상은 네가 십자가에서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다.” 그 이야기를 예수께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고백합니다. 나는 귀신을 본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 죽어가는 신 아십니까? 이 신은 하늘에 있는 신이 아니고,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옷 입고, 똑같이 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며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 예수를 저는 신으로 고백하고, 여러분도 신으로 고백합니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 갈 때 오늘과 똑같이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면서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아론, 나답, 그리고 아비후를 데리고 산에 올라갑니다. 똑같지요? 모세는 율법을 가지고 내려와서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했지만, 예수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두고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우리 대신 십자가 지고 죽으십니다. 귀신과 참신의 차이점은 십자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신만이 참신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등장해서 모세가 말한 구원을 예수께서 완성해 주십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지만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오셔서 십자에 죽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죽음을 건너 뛴 부활은 예수에게는 없습니다. 엘리야는 와서 내 승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당신 승천과 부활에 내가 동참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 같이 이 산에 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는 죽음도, 부활도 없다. 내려가야 죽는다, 내려가서 죽어야 산다. 십자가 죽음을 건너 뛴 죽음이 없는 부활은 허상이라고 하여라. 신화를 만들려면 만들어라. 죽어야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삶이 있다. 이것을 진실로 기적이라고 하여라. 허상의 기적이 아니고, 사이버 세계의 기적이 아니고, 진실로 역사서에 나타난 것을 기적이라고 하여라. 진실로 구원 받으려면 내려가자.”

배고픔 좋아하지 마십시오. 배고픔은 목적이 아닙니다. 배부름을 위한 혹독한 과정입니다. 목마름,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서 배우는 과정입니다. 아프세요, 아픈 걸 칭찬하지 마세요. 아프면 나아야 합니다. 힘들면 기쁨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간난고초 있지만 간난고초는 피할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서 기쁨을 창출하는 그릇이요, 계기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십자가 지고, 죄를 사함 받아야 십자가가 만들어 내는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산을 나와서 내려가자. 세상으로 가자. 직장으로 가자. 내 마음 속으로 가자. 가정으로 가자. 가서 불안 속에서 확신을 심자. 배고픔 속에 풍요함을 만들어 내자. 하나님이 같이 하시고, 성령이 같이 하신다. 산에 머물지 마라. 허상을 꿈꾸지 마라. 하나님의 미래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우리 땅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위에 임하도록 기도하자. 하나님 나라는 온다. 십자가 있고, 부활이 있지 않느냐. 십자가와 부활이 있는 종교를 저는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인이 기꺼이 되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말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그런 가상세계를 제가 신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셔서 예수와 함께 우는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웃는 얼굴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산 위에서가 아니라 산 아래에서 예수가 변했듯이, 인간이 변했듯이, 역사가 변했듯이 우리 모두는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삶 속에 신비요, 신앙이 갖는 신앙의 신비요,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역사를 바꿉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작지만 아름답게, 착실하게 기쁜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등장 할 겁니다. 우리의 꿈이죠! 우리의 기도죠! 하나님의 축복 풍성히 임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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