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6:1-11절
설교문
어떤 부인이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그만 길가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먹을 것도 없고 변변히 입을 것도 없어서 거지 같은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도둑놈이라며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아이가 연필 살 돈이 없어서 문방구에서 연필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가져온 자식의 탈선은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살 가치도 의미도 없다 .....!”
그녀는 마침내 자식들과 더불어 동반자살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들을 잠재운 다음 문을 잠그고 가스 밸브를 돌렸습니다. 한창 가스가 새어나와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그 순간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337장).
이웃집 라디오에서 나오는 찬송은 이미 가스로 몽롱한 그녀의 영혼을 뒤흔드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녀는 차츰 정신을 차리고 “왜 기도를 할 생각을 못했을까?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기도하면 될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그 즉시 벌떡 일어나 가스 밸브를 잠근 후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집안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 날로 짐을 싸 들고 시골로 내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가 짐을 풀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녀들을 위대하게 키운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에 나오는 매리 큐스 자네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근심으로 쓰러졌을 때 이 부인은 모든 근심을 맡으시는 주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고 기도함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근심이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질병 때문에 근심하며 때로는 사업 실패로 낙심합니다.
자녀 교육이 뜻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고 기도 응답이 되지 않아 답답합니다.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혈육조차도 자신을 외면할 때 인생의 회의를 느낍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삶의 위기와 근심, 걱정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걱정과 근심 때문에 삶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합니다. 이렇게 삶에 방황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하십니다.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수도자가 애정문제로 살인을 하고 자기 죄책감을 지우려고 큰 짐을 목에 지고 산과 들을 돌며 학대와 고통으로 자기의 양심을 조금이나마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짐은 고해나 학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무거운 짐을 벗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짐과 수고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 각종 취미활동도 하고, 사교활동도 하고, 여행 등산도 하고, 에어로빅 혹은 다양한 운동도 합니다. 또한 웰빙 음식을 찾고, 좋은 약을 찾고, 몸에 좋다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 먹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필요한 것이고, 우리의 삶을 여유롭게 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기에 어느 정도는 짐과 수고를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만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무거운 짐과 수고에서 온전하게 해방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처럼 주님 앞에 나와야만 온전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께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고 은혜 받은 사람만이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신 주님 앞에 영생과 안식을 얻기 위해서 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교인으로서의 출발입니다만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례는 1)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며, 2)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며, 3)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사건이며, 4)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의식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세례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옛사람이 장사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어 새 생명에 참여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옛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여기 ‘죽어’란 말은 헬라어로 보면 ‘부정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단번에 죽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즉 이미 오래 전에 사망 진단이 내려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죄는 이미 정복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죄악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죄악된 몸을 벗어 버리고 의의 몸을 새롭게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다’는 말은 ‘울타리를 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와 죄악된 세상 사이에 영원한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둘러서 더 이상 우리들이 죄의 지배하여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와 세상 사이에 튼튼한 울타리를 쳐서 죄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어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와 사망은 이미 그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가 바로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지 죄와 사망의 종이 절대 아닙니다. 죄와 사망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와 가진 우리의 관계는 세례를 받음으로 청산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주님을 알기 이전의 모든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었기에, 다시 말해 이전의 세상 근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우리는 또다시 세상 근심으로 인해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삶의 실패 때문에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좌절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우리가 아직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 또한 십자가에 못을 박고 영적인 소망으로 충만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하고 또 다시 그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에 매이기 때문에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예수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의 옛 사람은 다시 살아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영적인 생명을 온전하게 따라가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자의 대표요 머리이며 뿌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족이고 지체이며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죄의 종 노릇에서 영원히 해방되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사망의 쇠사슬에서 영원히 벗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으심과 사심은 ‘한번에, 영원히’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한 승리의 팡파레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연합된 자는 더 이상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노예가 주인이 시킨 일을 다하지 못해서 살갗에 피가 서리도록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백인이 그 노예를 불쌍히 여겨 그를 사기로 마음을 먹고 노예의 주인이 그 노예를 살 때 준 돈의 두 배를 주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정성껏 간호하여 건강을 회복시켰습니다. 백인은 그 노예에게 “당신의 몸값은 이미 다 치루었소.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요. 그러니 이제는 자유인으로 사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흑인 노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저를 포악한 주인의 채찍에서 구해 주시고 자유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로 하여금 자유인으로서 당신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 흑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백인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자청하여 종이 된 흑인 노예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물학자인 백인이 그 종과 함께 식물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남양군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종은 무성한 밀림을 헤치면서 앞서 갔습니다. 그런데 뒤를 따르던 주인이 독사에 물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물린 곳이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두면 독이 온 몸에 퍼져 절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순간 종은 자기 살을 칼로 베어 주인의 상처에 붙여서 독을 빨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거듭한 끝에 종은 결국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고 잠시 후에 주인은 깨어났습니다.
주인은 곁에 쓰러져 죽은 종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죽은 종을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주인은 그의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비문을 이렇게 적었습니다.“자유인이 되었으나 자유를 포기하고 종이 되어 사랑으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러운 사람이 여기 묻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예수의 부활로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노예인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종이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이 될 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종이 되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사실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탐심이나 위험이나 칼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참 자유인이지만 자원하여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주신 주님의 뜻에 맞게 성결하게 사는 것이 바로 참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조만식 선생은 젊어서 사업가로서 성공하였으나 술을 많이 마셨고 바람둥이였습니다.그런데 그가 23세에 주님을 만난 후 술을 하루 아침에 끊고 공부하여 위대한 선각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옛날의 바람둥이는 죽고 훌륭한 인격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성결합니다.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새 생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새 사람이 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참 자유를 얻은 우리 모두 주님의 새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생명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