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6:12-23절
설교문
국가의 흥망성쇠는 보통 경제력과 국방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런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정신적인 요소에 있습니다. 그 나라나 민족의 민족정기와 민족적 사기와 도덕적 수준이 중요하고, 또 그 민족이 얼마나 깨끗하게 사느냐, 얼마나 옳게 살며, 그 나라와 민족이 얼마만한 공의를 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며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를 교묘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역사하여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사이의 중간에 서 있는 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은 그 두 세력 사이에 서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나 이렇게 두 세력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것은 병균이 침입한 우리의 육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람의 육체에 병균이 들어온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단 균이 들어오면 우리 몸은 그 병균과 싸웁니다. 이 싸움에 우리 몸 속에 있는 백혈구가 동원됩니다. 백혈구가 병균과 싸우기 때문에 몸에 열이 오릅니다.
균은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우리 몸을 지키려는 백혈구는 우리 몸을 파괴하는 병균과 싸우기 때문에 전쟁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납니다. 병균은 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백혈구는 몸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 두 세력이 싸우다가 마지막에 어느 편이 이기느냐가 중요합니다.
균이 이기면 마침내 우리 몸은 병에 걸려 결국에는 심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새롭게 하는 백혈구 편이 이기면 우리는 병마를 이겨내고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의 국가와 민족도 그렇습니다. 국가에도 두 세력이 싸웁니다. 하나는 국가를 망하게 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를 살리는 세력입니다.
이 국가를 살리는 세력 속에 바로 의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에는 반드시 의인이 필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부패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의인들이 필요합니다. 선한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보다는 죄의 도구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사용한 위대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세례 요한, 베드로 등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용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도 사람을 시켜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직접 하시지 않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하고, 강하게 하고, 돕기를 원하신다면 사람을 시켜 그런 일들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디서나 당신의 뜻을 행할 선한 도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사용합니다.
사단은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범죄로 유혹하여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무기가 되든지 아니면 사단의 손 안에 있는 무기가 되든지 양자택일의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두 사단의 종,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모두 사단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종이나 노예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시대는 로마의 클라우디우스(AD 41-54)와 네로(AD 54-68)의 통치 기간으로 로마 제국의 최번성기였습니다. 그 때 문명은 고도로 발달하였고, 사치와 향락과 방종 등이 난무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그런 사치와 향락과 방종을 밑에서 떠받치고 있던 것이 바로 노예제도였습니다.
노예는 포로나 채무나 범법이나 파산 등의 이유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여 귀족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자신의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그의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주인의 독점 소유였습니다. 바울 시대의 노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했습니다. 노예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한 명의 주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은 그 노예의 문서를 파기하고 자유인으로 놓아 주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주인도 노예에게 해방을 주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주인으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주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값을 온전히 다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단의 종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에는 너희가 죄의 노예여서 죄가 너희를 독점했었다. 그 때에 너희는 죄짓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너희의 주인이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죄를 짓지 말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일부는 하나님께, 또 다른 일부는 세상에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지 일부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의 한 부분을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한, 그리고 자기 생의 조금이라도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한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 두고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는 온전한 자로 사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자기 몸을 죄에 내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회에 한 번 참석하고 은혜 받아 헌신을 약속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감정적인 헌신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일평생을 주께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의 감정적인 헌신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 일상의 삶 속에서 매일 영적인 삶을 살아야 주님께 일평생을 헌신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무섭습니다. 조그만 조심하지 않으면 죄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옛 생활과 새 생활 사이에서 뚜렷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옛 생활은 부정과 불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당시는 너무나 세상이 불의가 판을 쳤습니다. 그 당시 세상에 정절이란 없었습니다.
로마 세계에서는 원치 않는 아이, 특히 여자아이는 문자 그대로 내 던져졌습니다. 매일 밤 많은 수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광장에 내버려졌습니다. 그 아이들은 매음굴을 경영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음굴의 창녀로 키워졌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그 어린아이들을 버린 부모들이 그의 딸들과 동침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이방 세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방 세계는 불법적인 세계였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죄에 빠질 때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겁이 나고 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죄를 지을 때는 조금 쉽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힘이 안 들고 죄는 그 공포를 잃고 맙니다.
죄는 죄로 인도합니다. 불법은 불법을 낳습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험합니다. 죄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속량하고 우리를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아 죄로 찌들대로 짜든 병든 노예인 우리 인간을 하나님은 그처럼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옛 주인인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종, 의의 종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자발적으로 우리의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죄의 종처럼 억지로 섬기거나 두려움에서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은 율법의 쇠사슬에 매인 자가 아니요 주인의 은혜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인 우리에게 단순한 임금만 주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넘치게 해 주십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주인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의를 주인으로 섬기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열매는 각각 다릅니다. 죄의 종의 열매는 온갖 부끄러운 것이지만 의의 종의 열매는 거룩함입니다. 성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의 습성이 아직도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도의 온전한 성결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다만 이 땅에서는 부단히 성결을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거룩함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 때문에 잠시 멈칫거릴지라도, 죄의 돌부리에 넘어질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결의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해야합니다.
언젠가 관광지에서 아주 인상 깊은 광경을 보았습니다. 가족 단위로 오는 여행객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여러 사람들 속에 묻혀 있어도 유독 눈에 띄는 두 가족이 있었습니다. 한 쪽은 아이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부모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고, 또 다른 한 쪽은 제 맘대로 뛰어다니는 두 아이들을 부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다니고 있어서 시선이 끌렸습니다.
아이들을 이끌어 많은 것들을 보여 주며 가르치던 부모의 모습과, 지친 채 짜증 섞인 얼굴로 아이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또 다른 부모의 모습은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자와 마음의 관계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통제하며 사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의 삶에 비해 후자의 삶은 경건의 진보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야생동물과 같습니다. 잘 길들여지거나 가두어져 있을 때는 안전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야수의 본성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순간도 마음에 대해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 안에 살면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동안에는 부패한 욕구에 굴복하지 않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언제든지 야수와 방불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거룩한 삶을 일상의 삶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상의 삶, 매일의 삶 즉,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옳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참된 거룩입니다.
옛날에 경건한 사람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길을 걸어 다니다가 나무에 이마를 부딪쳐 피를 흘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마에 피가 흐르는 사람을 보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말을 듣고 싶어하던 바리새인들이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자신의 이마를 벽에 찧어 피를 흘리며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건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 왓슨이 말한 대로 거짓 경건은 이중 죄악입니다. 경건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정적이며 고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에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동적이고 활기찬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참된 경건은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세상 속에서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더 잘 살면서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원적으로 분리해서 사는 것은 바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은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해야 경건한 그리스도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인해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당연히 하나님의 종인 우리 또한 거룩한 성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