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나서 4:6-7, 10-11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로마서 5:1-5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12:38-42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아멘.
설교문
오늘 아침 여러분은 잠에서 깨어 무슨 생각과 말을 제일 먼저 하셨습니까? 매일 매일 똑같이 사는 생활 이지만 하루가 새롭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새로움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실 걸로 압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창가를 열어봤는데, 날씨는 밝지 않았지만 공기가 아주 신선하고, 또 풀잎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무엇 이길래 이렇게 당신께 하루를 먼저 감사할 수 있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제가 태어난 것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아기가 태어나면 할머니, 아주머니가 모두 모여 아기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아기 탯줄을 잘라 밖에 버리는 것까지 분만의 모든 과정을 처리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임신 때부터 태어날 때까지 저는 한 가족에서 살며 가족과 유대를 같이했습니다. 최근에는 핵가족이 되어 삶의 방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임신까지는 엄마가 하지만, 조산원에서는 아이를 낳은 후에 태를 자르고, 처리해 줍니다. 할머니와 엄마는 조산부가 깨끗이 씻기고 담요를 싸준 아이를 안고 좋아서 "우리 손자손녀라고, 우리 자식"이라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 엄마 품에 안길 때 까지 조사원이 했던 수고에 대해서는 돈을 지불한 걸로 대신합니다. 비록 아이는 태어났을 때 말을 할 수 없지만, 감사를 우는 걸로 표현합니다.
저는 장례식을 하러 자주 갔고, 위로하러 다녔습니다. 여러분도 장례식 많이 다녀 보셨죠? 사람이 마지막 갈 때 어떻게 하시나요? 과거에는 집에서 돌아 가셨고, 돌아가시면 같이 염도 했고, 깨끗이 닦아 주었고, 무덤에 묻힐 때 까지 직접 우리 손으로 했습니다. 지금은 영안실로 모십니다. 가족들이 보는 것은 입관실에서 닦아 주고, 옷 입혀 주고, 다 처리한 다음 마지막으로 시신을 보여주는 그때입니다. 시신도 처리해주고, 닦아 주고, 옷 입혀 주고 하는 이러한 봉사를 가족이 아닌 전문화된 장의사가 다합니다. 과거에는 없던 일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내가 가는 마지막 길에 나를 정성껏 잘 대해줘서 고맙다."고 할 거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날에는 대가족이어서 주로 가족끼리 소통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소가족 제도가 되어 우리가 태어나 죽기까지 접촉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 졌습니다. 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많은 곳에 가서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접촉의 범위와 사람은 넓어지고 많아 졌는데 더 외롭습니다. 만나기는 하는데 소통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나는 걸로 족하는 게 아니고, 만나면 말을 해야 하고, 마음을 주고 받아야 하고, 서로 교통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게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시골에 살 때 밖에 나가서 외식한 일이 없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다 집에서 먹었습니다. 지금은 외식을 많이 합니다. 한 번 식당에 가보시지요. 가시면 여러분은 주방에서 다 차려나온 밥상에서 숟가락 들 때, 그때가 식사 시작입니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 수고는 돈을 지불한 걸로 족합니다. 수고는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먹고 그냥 나옵니다. 식사가 끝나면 종업원들이 가져다가 쓰레기도 치우고, 청소도 합니다. 우리의 식사 문화는 밥숟가락을 뜨고 상을 물리는 걸로 족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족끼리만 밥을 먹는 게 아니고 누구와든 만나면 먹을 수 있습니다. 먹으면서 갖는 우리의 친교나 사귐은 많아진 대신 식사가 의례화 됐고, 따뜻한 감정을 교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저는 이렇게 태어나는 것, 죽는 것, 또 먹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 부모 품에 잘 안길 수 있게 해주신 조산원, 당신께 감사합니다. 비록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먹지만, 나를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 당신 고맙습니다. 이렇게 감사 한 번 해 보실 의향 없으십니까?
남편과 아내 서로가 "내가 당신 때문에 결혼했고, 당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 고맙소"라 고백해보시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간에 엄마는 아들 때문에, 아들은 엄마 때문에 라고 고백합시다. 우리의 현실은 가족끼리만 사는 게 아니라 이웃과도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감사하는 마음은 저를 지으시고, 만드신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닌 전혀 모르는 또는 잘 아는 이웃의 형제자매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께도 덩달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감사 속에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과 함께, 이웃을 향한, 이웃과 함께 갖는 온갖 소통이 서로 연결되고 엮어져 아름다운 감사가 될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일상 이야기 인지라 특별히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 왔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아침과 밤에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면 참 복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사도바울이 이 말을 받아 로마서에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 드려서 이제 구원을 받게 됐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이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 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걸 보니 감사를 넘어서 자랑하게 됩니다. 자랑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저한테 구원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희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감사하고, 자랑하십시오. 또 다른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도 환란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을 겪으면 고통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이 사람을 참고, 인내하게 만들어 줍니다. 참고 인내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숙련되고 고양된 인격이 형성 됩니다. 인격이 형성 되고, 품격이 좋아지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신앙을 갖습니다. 그걸 자랑하시지요." 살펴보니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결과가 같습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 희망으로 갖습니다. 그 과정은 환란과 핍박이지만 그걸 이겨내면 희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랑은 환란 속에서도 하십시오. 오늘 성경 말씀에 전체 테마는 이렇습니다. "환란 속에서도 자랑하세요." 그런 말 아시죠. 고통 없이 기쁨이 없습니다. 눈물 없이 얻어지는 것 없습니다. 제가 영어 한마디 하겠습니다. "No pains, no gains" 우리말과 영어가 같은 표현을 담습니다. 무엇인가 얻고 싶으시면 눈물을, 피땀을, 노력을 드려야합니다.
오늘 사순절의 환란 이야기는 예수님 생애의 핵심 입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바리새파 사람과 서기관이 찾아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나님인 것을 증명해 달라고,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바리새파 사람하고, 서기관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 타락한 세대다. 악한세대다. 음란한 세대다.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징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잘 아는 요나의 이야기 밖에 보여줄게 없다"며, 요나 이야기를 하십니다. 요나 이야기 다 아시죠. 짤막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나는 북방이스라엘의 전성기때 선지자였습니다. 이 나라는 작은 나라라는 이유로 옆에 있는 강대국들의 잦은 침략을 받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침략해온 나라가 앗시리아입니다. 앗시리아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니느웨는 지금 지도를 보면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는 싸움이 많습니다. 쿠르드는 소수 민족이 사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지금은 사라진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 이름이 오늘 성경에 나온 니느웨 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니느웨의 수도가 있던 땅하고 섬유 탐사 계약을 맺었다가 헛방이 났습니다. 석유가 측량한 대로 잘 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옛날 전체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고, 사람도 많이 살았습니다. 당시 기록인 요나서 제일 마지막에 보면 수도 니느웨 인구가 12만 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도시였습니다. 지금 수준으로 치면 아마도 열배 이상이 될 겁니다. 이 도시에 염병이 들었습니다. 페스트가 왔습니다. 지금 12만 명이 몰살당할 처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랬을 겁니다. "잘 됐다. 우리를 침략하는 적국 망했으면 좋겠다!"고. 요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부릅니다. "요나야, 페스트로 몰살당할 위기에 있는 니느웨로 가서 백성들을 살려라. 회개하면 산다고 전해라." 보냅니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 나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야 니느웨를 가는데, 서쪽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요나는 배안에서 선원들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합니다.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요나를 바다에 풍덩 집어넣는 걸로 화를 모면합니다. 그렇게 요나는 고래 뱃속에 빠져 들고, 배는 풍랑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나라 고전인 심청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삼일동안 있다가 살아나서 다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선포했고,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은 회개하고 살아납니다. 여기서 마지막에 니느웨서 요나가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이 백성이 살아나는 꼴을 보니, 제가 못 견디겠습니다. 분통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하나님이 분통이 난 채 바닷가에 햇빛을 쬐고 있던 요나에게 박넝쿨을 내려 주시고, 햇빛을 가리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벌레가 박넝쿨을 다 쪼아 먹었습니다. 시들었습니다. 햇빛이 비치니 뜨거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왜 그렇게 귀한 박넝쿨을 말리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기 위해서 박넝쿨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나도 12만 명의 백성이 페스트로 죽고, 굶어 죽고, 쓸어져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내용이 그렇습니다. 혹시 우리도 살아가면서 우리를 침략하는 나라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까, 아니 망했으면 좋겠습니까. 저하고 원수 된 사람이 사업에 성공했으면 좋겠습니까. 인지상정 입니다. 망했으면 좋겠습니까. 넘어졌으면 좋겠습니까 일어섰으면 좋겠습니까. 속 시원하게는 앙갚음이 좋을 것입니다. 요나도 똑같이 제발 니느웨 성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는 살아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당신이 왜 오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을 구원하겠지만, 너희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로마 제국도, 이방민족도 구원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생각은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의 하나님인데, 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핍박하는 이방민족을 구원해야 합니까" 입니다. 요나의 고백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예언자이지, 적국을 구원하라고 보냄을 받은 예언자는 아닙니다. 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적국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왜 나를 그들에게 보내십니까." 요나를 욕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요나 근처도 못갈 정도로 저는 악한 사람이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목적은 요나와 똑같다.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고래 뱃속에 들어가 삼일 밤낮을 있어야 했듯이. 나도 3일 동안 땅속에 들어갔다 살아나야 한다. 그래서 만민을 구원해야 한다." 제가 이 말씀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땅속에 들어가서" 라는 말은 예수님이 죽으셔서 땅속에 묻히신 것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 땅속에 들어갑니다.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의 땅속에 들어갔습니다. 땅속에 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원어를 잘 분석해 보면 "땅의 심장 속에" 입니다. 그냥 땅속이 아니고 "땅의 가슴 속에"입니다. 땅은 숨을 쉬는 그래서 살아있는 땅입니다. 살아있는 땅에의 심장 속에 죽은 나 예수가 묻힌다고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장례식 마치고 하관예식을 드릴 때 할 때 저는 이렇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땅에 묻히지만, 뼈가 돼서, 가루가 돼서 시신 그대로 땅의 심장 속에, 가슴 속에 하관 합니다"라고. 이제 신앙 고백서를 다시 읽게 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다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 문장이 빠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들에게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나라 번역에는 "죽은 자 들에게 내려가셨다가"라는 이 문장이 빠져있습니다. 말하자면 "지옥까지 내려가셔서"입니다. 왜 빠져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지옥가게 했다고 해서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 가셨습니다. 지옥에 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죽은 자들에게 가셔서 두 가지 일을 했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 이야기는 신앙고백에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죽은 자들에게 내려 가셨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들 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두 번째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가서 죽음보고 하는 말 "내가 너를 이겼노라"고 하시려고요. 죽은 세계 보고 하는 말 "죽은 세계에는 구원이 없고, 생명의 세계가 죽은 세계를 삼켜 부활을 선포하노라. 내가 죽음을 이기었노라"고. 이 두 가지를 선포하러 죽은 자 들에게 내려가셨습니다.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걸 복원하고 싶은데, 한국 교회 전체가 사도신경에서 똑같이 빼고 쓰기 때문에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빼고 쓰고 있을 뿐입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가듯이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에게 가셔서 복음 선포하시고, 죽음에게 "너는 졌다. 생명이 이겼다"고 선언하시러 가셨다가 오늘 나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 하나님 아들 예수는 여러분도 구해야 하겠고, 여러분의 원수도 구원하는 구세주이다. 나는 온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 하나님 믿고 감사하는 나라인 이스라엘은 축복받는 나라로 감사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 받았다." 저는 예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성공하셨더라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우리 위대한 예수"라고 유대 민족사에 기록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이 이스라엘의 민족 신, 이스라엘 백성의 신으로만 오셨으면 오늘의 경동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일수 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 된 이야기지만 "당신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사람 구원시키려고, 우리 한국 사람을 택한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의 복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민족의 신이 아니고, 온 세계의 신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신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보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당신 때문에 저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 민족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오셨고, 우리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당신 때문에, 당신과 함께, 당신 안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진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의 나됨을, 우리의 우리 됨을 정말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배려, 함께 사는 것, 동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인정하십시다. 같이, 함께, 모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모두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먹을 성만찬의 떡, 모두의 떡입니다. 우리가 마실 성만찬의 잔, 모두의 잔입니다. 이 모두 속에 우리 함께 오늘 참여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그대들 위해서, 그대들 안에서 나는 구세주"가 되마고. 이 약속을 축복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