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7장1-6절
설교문
제가 잘 아는 초등학교 여교사 한 분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의 애인은 너무 가난하였지만 머리는 좋았습니다.
그녀는 결혼 전에는 애인의 등록금을 대 주었으며,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으며 그 유학 경비를 다 대주었습니다. 남편은 마침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유명한 사립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좋았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명문 사립대학의 교수가 된 남편을 바라만 보아도 흐뭇했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로 임용된 후 남편은 밤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술에 취하여 들어와서는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은 사회적으로 유명인이 되어 TV에 나올 정도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를 사정없이 때리는데 얼마나 포악한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어떤 여교수와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을 들은 후, 그녀는 그런 배은망덕한 남편과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때 남편이 이혼하자고 요청하여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10여년 이상을 뒷바라지 했던 남편과 헤어졌을 때 친정에서는 야단이 났지만 그녀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난 후 오랜 만에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 후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상처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전 남편과는 정반대의 남자였습니다. 언제나 아내를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정말 착한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녀는 천사 같은 새 남편과 살면서 남편이 믿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정말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교회 여신도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섬기며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 남편을 만난 후 그녀의 얼굴은 과거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결혼법은 남자 중심이었습니다. 특히 고대 근동의 혼인법은 남자 중심적이어서 일단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 여자는 모든 면에서 그 남자에게 종속되고 예속된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은 만일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 증서를 써줌으로써 자유롭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율법을 악용하여 여자가 요리를 잘못하는 것 가지고도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써 아내를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남자 중심의 율법 해석을 단호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19:3-12).
사도 바울은 혼인법을 가지고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남편으로 비유했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2절).
여기서 ‘남편 있는’이란 말의 헬라어 원뜻은 ‘남편 휘하에’라는 뜻입니다. 이는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것은 법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완전히 매인바 된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통 남편을 가리켜 ‘주인 양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남편은 집의 주인이고 아내는 그 주인인 남편에게 매인 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가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남편이 죽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을 때 그 아내는 남편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2절에 있는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라는 말씀은 완료수동태 시제로서 이미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휘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이 무효가 되어 이제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렇다면 남편으로 비유된 율법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다음 율법에 종속되었고 율법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율법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던 우리의 남편인 율법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남편을 얻었습니다. 그 남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4절).
옛 남편인 율법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더라도 우리에게는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를 옥죄었던 족쇄가 되었던 옛 남편인 율법이 죽었으니 우리의 모든 족쇄가 풀렸습니다.
과거에 율법을 남편으로 삼고 살았을 때 우리는 그 열매로서 ‘죄’라는 자녀를 낳고 죄와 어울려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죄 속에서 우리는 행복이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 남편으로 삼았으니 앞으로 행복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옛 남편을 섬기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새 남편을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런 섬김이 바로 성결의 삶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좀 이상하게 해석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제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으니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방종과 탈선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이것은 이단적 성경해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4절)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지 않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귀에게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도의 참 자유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까? 첫째,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체포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도 여기 앉아 있으라”(막14:32)고 하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더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통곡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치신 후 세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14:37-38)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위기를 맞아 기도하지 않던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람으로서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집사님들이 모여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기도’가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야”라고 한 집사님이 말하자 “기도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일세”라고 다른 한 집사님이 따라 말했습니다. 참석자들마다 기도에 대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집사님들에게 차를 나르던 한 집사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요, 기도하기가 참 쉽던데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떴을 때는 하나님께 영혼의 눈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옷을 입을 때는 경건과 사랑의 옷도 입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수할 때는 영혼도 정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청소할 때는 마음 구석구석도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식사할 때는 영혼의 양식도 달라고 기도합니다.
지금처럼 차를 나를 때는 사랑도 나르게 해달라고 기도한답니다. 이렇게 종일 기도하면서 보냅니다. 제게 기도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둘째,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주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때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으나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동생의 그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마리아가 음식을 준비하도록 해 달라고 주님께 청했으나 주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더니 후에 예수의 고난을 앞두고 벌어진 바닷가 마을 잔치에서 향유 한 옥합을 아낌없이 드리는, 일류 역사 주님께 한 봉사 중 최고의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이 말씀을 가까이 해야 주님께 최고의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손’이라는 예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를 우리 삶 속에 적용하기 위해 말씀을 균형 있게 섭취하고 기억하여 활용하고 또한 오랫동안 간직하는데 필요한 다섯 가지 단계를 누구나 기억하기 쉽게 사람의 손가락에 비유하여 설명한 예화입니다.
이 예화는 네비게이토 선교회에서 고안한 것으로 가장 첫 단계는 hear, 즉 ‘듣는다’로 새끼손가락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read, 즉 ‘읽는다’로 약지손가락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study, 즉 ‘공부한다’로 가운데손가락, 네 번째 단계는 memorize, 즉 ‘암송한다’로 집게손가락,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meditate, 즉 ‘묵상한다’로 엄지손가락에 해당합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말씀을 더 잘 섭취할 수 있게 되며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예화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든다’는 의미로 성경을 모든 손가락을 동원하여 꽉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성경을 꽉 붙잡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엄지손가락, 즉 ‘묵상’이라는 것입니다. 듣기와 묵상, 읽기와 묵상, 공부와 묵상, 그리고 암송과 묵상, 이렇게 묵상이 함께 있으면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운 환경과 사단의 시험 가운데서도 말씀을 놓칠 수 없이 꽉 붙들 수 있는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붙드는 것처럼 모든 단계를 빠짐없이 균형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매일 아침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강남 DTS과정을 통해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더 나아가 말씀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주님의 활동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어 즉시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어, 그 친구가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사랑하고 있으나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으며, 세 번째 친구도 친구이기는 했지만 별로 큰 관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하여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함께 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먼저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친구에게 함께 가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그 친구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였더니, 궁전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다음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그러지, 내가 함께 가주겠네, 자네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잘 말씀드려 주겠네” 하고 쾌히 응해 주었습니다. 왜 세 명의 친구들은 각기 그렇게 말했을까요?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그대로 남겨두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란 친척을 말하는 것입니다. 친척은 무덤까지도 따라가 주지만 그를 그곳에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행은 평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매월 구제헌금과 하루 백원의 돼지 저금통 헌금으로 북의 어린이를 살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우리는 죄악된 옛 생활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새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늘 기도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