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4:7-10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노아 때에,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내가 약속하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너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은총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평화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너를 가엾게 여기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우리에게 주신 제일 첫 번째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 선물의 이름은 에덴동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을 선물로 받은 우리 인간은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창세기에 보니 너무 짧게 산 것 같습니다. 며칠만 산 것은 아니지만, 첫 번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오래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 걸 보면 에덴동산이 참 짧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첫 번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창조하시고, 첫 번 선물로 에덴동산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마지막 선물은 무엇일까? 마지막 선물도 에덴동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성경을 쭉 읽어보면 여러 군데 이름이 달리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어 쫓겨난 다음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자기들만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이름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도시는 에덴동산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시를 없애 버리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노아 때 홍수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이 도시를 없애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히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 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 노아에게 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는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물로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비가 온 다음 하늘에 무지개가 뜨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찬란한 색깔의 무지개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현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다시 봅니다. 물로는 망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간이 죄를 지어도 물로는 망할 일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하나님은 아닌데요, 살아가면서 화 날 때를 생각해 보면 약속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함부로 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 하신 걸 지키시려고 아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화남이 있더라도 물은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무지개야 떠라, 나도 널 보며 스스로 위로받자."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또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나를 너무 배반하고 오래 살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나는 멸망이라는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 구원을 베풀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이집트 종살이 사백년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만드신, 금송아지 신까지 만들어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분노를 발하십니다.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긴 장대 위에 구리뱀을 묶어가지고 하늘에 둡니다. "땅에서 뱀은 사람을 잡아먹었지만,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산다. 쳐다보지 않으면 뱀에 물려 죽는다." 구리뱀 든 역사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전에 상징화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옛날에는 구리뱀 들어서 사람을 살렸지만 오늘, 지금부터 이천 년 전 예수가 오신 때부터는 구리뱀을 보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뱀이 되어 십자가라 이름하는 장대에 하나님이 들림을 받습니다. 구리뱀 이야기는 십자가 이야기 하고 똑같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는 옛날 옛적 모세가 들었던 구리뱀하고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살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렇고, 모든 나라도, 민족도 그렇다. "십자가를 보고 살아라." 구리뱀 처럼 달린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 예수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나 예수는 한 톨의 밀알이라고 말하여라. 나 예수는 한 톨의 밀알이 되어 땅에 들어가 죽고,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열매를 맺어 그대들에게 훌륭한 생명의 씨앗을 선물로 주고 싶다. 나는 한 알의 밀알이다. 밀알은 죽어야 한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고, 그래야 여러분이 그 열매를 먹을 수가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인격이, 사람이 너무 귀하고 중요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말을 바꾸면, "나는 새로운 에덴동산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려고 왔다.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라 이름하는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다." 더불어 "한 사람, 한 사람만 사는 게 아니고 사람이 모인 가족, 사람이 만든 나라, 사회, 집단도 예수를 믿으면 산다." 에덴동산은 한 사람 한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고, 여럿이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사는 하나님 나라도 선포하러 왔지만, 나 예수는 내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화신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 믿을 때 예수님을 나 개인의 주님으로만 믿지 마십시오. 그 분은 우리가 함께 살아갈 집단적인 공동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한 사람 한 사람도 구원하지만, 한 사람이 사는 모든 나라도, 집단도 구원해야 하겠다. 나는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에덴동산도 구원으로 만들어 줘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으면 될까요? 최근 중국 땅에 북녘의 동포들이 소위 탈북자가 됐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을 불법체류자라고 하며, 중국 국내법에 의해서 불법체류자는 퇴출시키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법체류자가 많습니다. 우리도 필요에 따라 국내법에 의해 퇴출시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중국도 그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걸 보면서 "제발 강제 퇴출시키지 말고, 우리에게 돌려 보내주던지,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지 말고 다른 나라에라도 보내 사람 살리자."고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정치 그리고 국제관계는 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지금 경제성장도 이루고 있습니다. 중국입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중국 전체 인민이 더 중요합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체제와 집단이 중요하다. 탈북자들은 혼란을 초래한다." 북한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기 보다는 한 사람은 전체의 부분일 뿐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개인 생명으로 말하지 않고 사회적 생명이라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북에서는 자기 체제를 비판해서 나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런 상황에다 북한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전체 집단의 생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합니다. 우리 남한은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국가도 중요하지만, 그 국가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도 천하와 바꿀 수 없이 중요합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 한 사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국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둘이 동시에 중요한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문제는 삼만 명쯤 되는 이분들이 이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우리가 도울 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우리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에 땅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가 어떠한 정책을 내놓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남북한이 하나 되어 살아야 될 때도 있고 결단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데, 남의 나라와 관련해서 문제를 해결 할 때는 서로 체통도 지켜주고, 존중하면서 신뢰를 구하는 방식으로 우리도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중국보고 `보내지 마시오.` 한다고 중국이 보내지 않겠습니까. 중국은 알아서 보낼 사람은 보내고, 남겨둘 사람은 남겨 두지 않겠습니까." 통계를 살펴보니, 중국 땅의 약 3만 명의 탈북한 사람 중에 소위 유엔난민규정이 정한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중국이 받지도 않았습니다. 탈북 했다고 해서 모두 다시 돌려보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유엔규정에 따라 난민으로 신청해 자격을 받은 사람만은 보내지 말자. 그러면 우리가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체통 지켜주고, 사람도 살리는 방법이 오늘 우리에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난민은 혼자 난민이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서로 인정을 해야 난민이 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람의 생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언가 서로 합의 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지켜보면서 과거 독일이 했던 일을 잠깐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동·서독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동·서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인 63년부터는 양쪽이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반체제 인사교환인데, 사고파는 겁니다. 첫해에 양독 정부가 파송한 변호사가 나서 사람을 상호교환 했습니다. 첫해에 8명을 서독으로 사왔습니다. 그 가격은 한 사람에 독일 화폐로 34만 마르크 정도 됐고요, 미국 달러로 4만 불정도 주고 사온 겁니다. 사왔다는 말은 조금 어패가 있는 말이지만, 어찌되어 건 그런 협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현금을 가지고 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겨 양쪽이 서로 합의에 도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현금 대신 필요한 에너지 자원주고, 우리가 만든 물건으로 대신 주겠다. 상품으로 주겠다." 이렇게 합의 한 후 부터는 서독에 있는 교회 본부와 동독에 교회 본부가 맡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지원아래 교회가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업으로 양쪽이 진행했으며, 독일이 통일 될 때까지 18년 동안 전체 29만 766명, 약 30만 명이 서독으로 왔습니다. 그 때 서독이 동독에게 준 물건을 현금으로 따져보니 약 30억 마르크 정도에 상응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온 탈북자가 2만 명이 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왔든지 정착을 시켜야 하고, 들어오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지불합니다. 이상론 같지만, "차라리 난민으로 신고해 서로 합의하고 떳떳하게 받아 드릴 수는 없을까? 그래서 이번기회로 사람생명을 떳떳하게 살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누가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남북이 같이 살아야 하는데...그러면서 생각이 오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면 무엇일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 있는 탈북자나, 남북의 백성이나, 중국의 사람이나, 모든 사회를 구하기 위해 내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내가 죽을 테니 내 죽음을 얻고 한국의 백성들이여, 세상의 백성들이여, 당신들이 살아라. 내가 대신 죽으마. 대신 그대들은 살아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강력한 결단을 오늘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분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각 자 욕심만 부리지 말고 서로의 살길을 구해라. 그래서 오늘 나 예수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죽고자 한다. 나를 딛고 백성들아 살아라. 내 죽음을 딛고 부활에 동참해라."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스케피스트(Escapist)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결단하셔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으면 됩니까? 우리가 죽는 게 아니고, 자기가 대신 죽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분의 명령을 따라 나도 살고, 우리도 살고, 이웃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언제가 설교 때 두 번 정도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아랍사람들이 전해 준 지혜 하나를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랍은 이슬람교가 번창하는 나라입니다. 이슬람은 한 가정이, 사회가, 나라가 이슬람이 되면 그에 속한 개인은 개인의 이유와 상관없이 이슬람 신자가 됩니다. 신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벗어 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족이 아무리 믿어도 내가 안 믿으면 그 뿐입니다. 다 믿어도 내가 안 믿으면 되고, 다 안 믿어도 저 혼자 결단해 하나님 믿으면 그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문제와 이슬람 신앙의 문제는 그렇게 다른 것 같습니다. 이슬람의 아랍사고 방식은 전체가 개인을 규정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전체와 개인이 상호인정 하면서 전체도 살고, 개인도 살아야 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신앙과 삶에 있어 이 하나의 예화를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랍 유목민인 아버지에게 열일곱 마리 양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세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분배를 합니다. 첫째 아들은 전체의 절반을, 둘째는 삼분의 일을, 셋째 아이는 구분의 일을 상속하라고 유언을 합니다. 아버지 유언대로 나누면 되는데, 짝수가 아니니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옆에 한 마리 양만을 상속 받은 가난한 친구가 이 세 아들들에게 자기의 양을 넘겨줍니다. 열여덟 마리에 양을 가진 세 아들이 나눴습니다. 아버지 유언에 따라 절반을 나눴더니 아홉 마리가 됩니다. 삼분의 일을 나눴더니 6마리가 됩니다. 구분의 일을 나눴더니 2마리가 됩니다. 아홉 마리, 여섯 마리, 두 마리를 합쳤더니 열일곱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한 마리는 그 가난한 친구에게 돌려주며 "감사하다."고 전합니다. 아랍사람들은 이 예화를 이렇게 해석 하더군요. 한 마리를 희생한 대가로 열일곱이 사는 것이 알라의 뜻이다. 아마 그래서 좋은 일도 많고, 또 반대로 자폭과 같은 나쁜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일곱을 살리기 위해 하나는 희생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는 그 희생을 자발적으로 하셨다. 열일곱은, 온 세계는 한 마리 없이는 나눠질 수 없다. 그런 진실을 아십니까? 열일곱 세계가 중요하고 많은 것이 중요하지만, 단 하나가 없이는 열일곱은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 하나를 누가 자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네가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라, 그러나 나눈 다음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다시 산다." 하나의 희생은 열일곱이 바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희생을 치루고, 그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됐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한 마리이고자 한다. 열일곱 인생들아, 열일곱 세계야, 우주야 살아라. 내가 항상 밀알이 되마. 한 사람도, 가정도, 나라도 살자. 그렇게 도와 살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런 사랑 베풀었다는 것만 기억해다오."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 한 마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습니다. 저 대신, 우리 대신, 여러분 대신 전혀 다른 분인 하나님이 오셔서 거대한 우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개인적인 삶속에 오셔서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과 범죄와 모든 문제를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일을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돈은 지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믿음만 주면 이 분이 오셔서 해법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한 번 모셔 보시지요? 지불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모셔서 이분과 한번 씨름해 보십시다. 사순절 내내 씨름해 보시고, 부활절 아침 이 분도 살아나시고, 우리도 살고 하는 그런 감격의 경험을 한 번 나눠 보십시다. 민족도, 사회도, 가정도, 우리도 이 분이 필요한 시절입니다. 한 번 모셔 보시죠.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