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7장15-25절
설교문
로마 시대의 폭군 네로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악한 황제였습니다. 그는 많은 신하와 친구와 여인 그리고 스승을 죽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일은 그의 어머니를 죽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로마 시민들은 그 소문을 전국에 퍼뜨렸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입에서 입으로 ‘네로 황제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고 숨죽여 전했습니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이 소문이 전국적으로 펴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제일 존경을 받던 자기의 스승 세네카를 불렀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에 대해 이렇게 많은 원성과 비난이 들리니 이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어머니를 죽여야 했는가와 또한 그것은 악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의 훌륭한 문장으로 말하면 로마인들은 당신을 존경하니까 들을 것이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많은 선물을 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세네카는 어렵지 않게 승낙하고 화려한 문장을 만들어 네로의 입장을 옹호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사람의 본성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도덕 스승인 세네카도 돈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리 돈과 권력과 명예가 좋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어머니를 죽인 것을 합리화 시킬 수 있습니까? 세네카 같이 학문에 통달한 사람도 죄를 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남편된 율법은 죽었습니다. 남편된 율법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롬7:1-6). 그렇다면 율법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율법이 죄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고 또한 죄일 수도 없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12절). 이런 의미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시19:7)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다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24절)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율법에서 해방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온 누리에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해도 곤고할 뿐입니다.
만남에는 성공적인 만남이 있고 그렇지 못한 만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죄인의 상징이었던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오늘 이 집에도 구원이 이르렀다”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는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만나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최대의 박해자였던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참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만, 그 중에는 성공적인 만남도 있고 실패한 만남도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실패했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재력과 사회적인 지위를 겸비한 엘리트였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실패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보면 한 청년이 주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어떤 계명인지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그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랑했습니다. 자신을 도덕가로 자처하면서 이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구전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 구전된 율법은 총 613개 조항에 달했는데, 그 중 248개 조항은 ‘하라’는 조항이었고 나머지 365개는 ‘하지 말라’는 조항이었습니다. 아마 청년은 이 613개 조항도 다 지킬 정도로 대단한 도덕군자였습니다. 이런 도덕론자들은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도덕론자들의 특징은 도덕이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 줄로 착각합니다. 나보다 더 선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아라, 나는 법 없이도 살고, 자선사업도 많이 하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보다 내가 더 의롭고 천국도 먼저 간다며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도덕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문의 부자청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실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도덕적인 삶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결한 도덕적인 삶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은 개인적인 성화의 단계이지, 결코 구원이나 영생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지켰다고 하는 계명을 우리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아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왔다가 오히려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픈 기색으로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신 예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하셨습니다.
2. 인간은 훌륭하게 살아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서 곤고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열심 있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5-6)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외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실제 바울의 내면적인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내면 세계는 선과 악이 투쟁하는 격전장이었고, 원하는 선은 간 곳 없고 원치 아니하는 악만이 활개 치는 죄의 장터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을 행하는 자아이며,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는 자아였는데, 그 둘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악의 기로에 선 인간의 내면적인 갈등을 진지하게, 또 생생하게 토로하였습니다. 그의 토로는 고민하는 한 영혼의 구체적인 경험을 설파한 열정적인 간증이었습니다. 그의 간증은 성실하게 율법을 추구하는 바리새인의 내적인 경험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 예루살렘에 올라와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을 죽이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지킨다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이란 본래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도리어 그 율법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사도 바울은 원치 아니하게 율법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고 신령한 것임에도 사도 바울은 그 선한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악한 일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죄악의 덩어리만 잔뜩 짊어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이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깊이 탄식했습니다. 율법의 종국은 곤고와 탄식 그리고 비탄만이 있을 뿐입니다.
3. 인간은 죄 때문에 곤고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 진영이 마주보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한 진영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우리의 ‘속사람’이 진을 치고 있고, 다른 한 진영은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의 사람’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 두 진영이 벌이는 싸움은 세계 어느 싸움보다 치열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속사람의 편인 사도 바울은 숨죽이며 이 지켜보고 싸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창 두 진영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의 진영, 즉 속사람의 진영이 패하여 죄의 법 진영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속사람은 죄의 포로가 되어, 결국 족쇄에 매어져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너무 비참한 모습입니다. 결국 속사람은 사망의 골짜기로 끌려갈 처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죄의 법에 매어 영원한 지옥에 빠져 울부짖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사도 바울의 절규에서 우리는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처지에서 그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바라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은 사도 바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곧 우리의 비참한 모습이며, 곧 ‘나’의 탄식 소리입니다.
일본의 성자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남의 신앙과 교회의 신앙과 인류의 신앙도 자신의 신앙이 아니면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참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너’가 아니라 ‘나’이어야 하며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죄와 싸워 본 사람만이 그 죄로 인한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중생한 사람도 아직 성화의 과정에서는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자기를 발견하고 괴로워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죄와 싸워 죄에 져서 스스로 한탄하는 때가 있습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어찌하여 이렇게 죄를 이길 수 없을까!”라고 하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죄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 사망의 골짜기로 끌려가고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권세를 가진 사단의 군대인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고마우신 주님께 무슨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대장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생활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난 후에는 결코 다시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대장 예수를 따라 주님이 좋아하시는 선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여 매사에 주님이 원하시는 성결한 생활을 하여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