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주님의 내일 맞이하기

2012년 3월 25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0:7, 10-13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 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 아멘.

베드로전서 1:13-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아멘.

누가복음서 9:57-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아멘.
 
설교문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만 고통을 당하신게 아니고,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서도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한 예가 오늘 성경말씀에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복병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는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동네를 지나야만 합니다. 그 동네 이름은 ‘사마리아’입니다. 우리나라 지도로 바꿔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북쪽 땅에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고 남쪽 땅에 있는 서울로 오십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3.8선을 지나야만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나온 사마리아 땅이 위치로 보면 3.8선 주변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리가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머물기도 해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 먹을 것을 먹어야 하고, 마실 것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친절합니다. 예수를 거부합니다. 아마 그 당시 예수께서는 영화(榮華)를 얻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잠 잘 곳도 얻지 못하셨고, 식당에서 환영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와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옛날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두 동강이 났습니다. 그 때 북 이스라엘에 속했던 북방의 제일 남쪽이 사마리아 지역이었습니다.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식민지 통치할 때,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혼’을 뺏고자 이 지역에서 두 가지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하나는 북 이스라엘의 중심이었던 사마리아에 살 던 모든 지도층을 강제로 앗시리아 제국에 있는 모든 땅에 흩뜨려 내보냄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앗시리아 제국이 지배했던 여러 나라의 민족들을 강제로 모집해 강제이주 시킵니다. 이 강제이주가 제국주의 통치 수단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제국주의 방식은 똑같습니다. 이로 인해 순수한 유대인 피가 없어지고, 혼혈 현상이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순수한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부심을 무너뜨립니다. 다문화시대의 한 인종 섞임이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로 이주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그냥 몸만 이주해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 문화, 종교, 언어 등 모든 것을 같이 가져왔습니다. 특별히 당시에는 민족마다 섬기는 신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민족이 들어올 때 자신들이 믿던 신과 함께 왔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싫어했던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는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해 우상이 득실거렸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추후에 앗시리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 받은 후에도 사마리아는 완전히 이방 나라 취급을 받았었습니다. 이방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는 잡신, 혈연적으로는 잡혼, 이뿐만 아니라 언어도, 문화도 모든 것이 잡종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마리아 백성을 차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남쪽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더러운 손으로 성전재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이라 이름하는 산에 자기들 만의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해묵은 갈등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사마리아 지역은 팔레스틴에, 유다지역은 이스라엘에 속해 있습니다. 예루살렘도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해묵은 갈등이 얼마나 강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오신 경험 있으시지요?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고 텔아비브(Tel Aviv) 공항에 바로 도착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이 이집트의 카이로나 또는 터키 이스탄불을 지나 이스라엘에 들어가셨다면 상황은 복잡합니다. 공항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하고 짐 검사부터 심합니다. 아랍을 통해 왔다고 하는 그것 때문입니다. 공항 입국심사에서는 “왜 카이로를 거쳐 오셨습니까?”부터 시작해 온갖 세세한 질문을 합니다. 처음에 저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에 올 때는 아랍 거치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오세요.” 라고 귀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변치않고 있습니다.

다시 무대를 2천 년 전으로 옮깁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간다고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미워하는데 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에 가십니까?” 하며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예수는 사마리아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모든 것을 거부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사마리아를 벗어났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왔습니다. “예수님, 고통 많으셨겠네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선생님이 가는 그 길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정중하게 제안을 합니다. “저의 결단입니다.” 제가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잘생기고,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직업이 율법교사입니다. 마태복음서에 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유대백성들이 나를 배척할 줄 알았는데, 유대백성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율법교사가 나를 찾아와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자청을 하니, 제가 예수라도 너무 고마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 고맙소, 같이 갑시다", 그렇게 말했겠죠. 그런데, 여러분, 예수의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죠? 열 두 제자 중에 제일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가롯유다입니다. 그는 재정에 밝았고, 학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예수를 배반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미리부터 아셨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보다 뛰어났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기관 또는 율법교사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선은 좋은일 아닙니까? 요즘 용어로 하면 ‘인재영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세리, 노동운동자, 어부, 평민이 아닌 유대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 학식 있는 사람이 찾아와 자청을 합니다. 만약 그 제자를 영입했다면 예수님 제자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예수의 운명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단 미리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예수는 가롯유다와 똑같은 배신자를 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백성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 받을 수가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승리해서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침 뱉음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고, 조소를 당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롯유다도 나쁜 마음이 아닌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럴 수 없다. 예수는 가짜다. 그리고 그를 팔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찾아 온 율법교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예수님이 승리자가 될것임을 믿고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했지만, 그에게 예수의 길은 그가 생각했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식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 하나님의 아들은 승리자가 아니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고, 비참한 꼴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나는 승리해 부활의 영광을 차지 할 수 있다. 너 율법교사는 내가 가는 부활의 길은 가려할지 모르겠으나, 삽지가의 길을 갈 수 가 없을것이다.”고 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 하나님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사마리아도, 유대 땅도 그렇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 길을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연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나의 십자가 길을 따라 오지 말고, 부활한 다음에 나를 믿어라. 인간적인 호소다. 그게 낫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겠죠.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도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율법 교사처럼 고난이 없는 기쁨을 찿는 사람이 예수의 수난절에 동참하겠다고 하면 말려야지요. 십자가 없이 부활을 믿기로 한 사람한테 십자가 진실을 알려주면 배반할 것 아닙니까? 왜 십자가입니까? 차라리 나의 길을 따라오지 마세요.”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인간적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아무리 지성으로, 율법으로, 인간관계로 인하여 따라오되 십자가 고통없는 부활을 믿더라도, 제발 나를 배반하는 데는 참여하지 말아달라. 나 인자는 가장 높은 사람이지만, 가장 낮은 인간이 되어 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요.

지금 우리는 사순절 수난의 길 위에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에 보면 예레미야도 이런 운명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 백성 유다 땅은 망한다.”고 선포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보호해야 할 제사장 바스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불러놓고서 “왜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다고 거짓 예언 하느냐?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사장은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매질하고, 포승줄로 묶어 문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예레미야가 호소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셨기에 이 종교지도자가 예언하는 저를 결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속이셨나요?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도와주세요!” 이 구절이 여러분이 조금 전에 읽어서 들은 예레미야서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 아버지, 저 보고 죽음의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지요?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호소할 때 그 하나님과 예수께서 호소할 때 그 하나님은 모두 똑같은 분이신데 말씀이 없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의 경우 “다 이루었다”고 말씀만 하시는 걸로 하나님은 답변을 대신 하십니다. 우리가 제자 되는 방법과 길을 찾는 중에 혹시 수난 없이 부활을 원하시면, 고통 없이 기쁨을 원하시면, 십자가를 져야할 고통의 길로는 들어가지 마시죠. 거기서 배반할 것 같으면 차라리 가지 마시고, 마음에만 담고 살다가, 나중에 기쁨에라도 동참해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것이 좋을것입니다. “가겠습니다”하고 약속하고, 배반하면 예수님은 아주 우울해 하십니다. 그럴바엔 “차라리 약속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정확히 누군 인지는 모르지만 성서를 연구해 보니 두 번째 제가가 되겠다고 온 사람은 그간의 전후 맥락으로 보건데 우울증이 심하고, 의심이 많고, 인간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도마일 것으로 성서학자들이 추측합니다. 그는 부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따라 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단 조건을 붙입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장례는 치르고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천천병력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례를 맡기고, 너는 와서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장례식이 핑계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장례만큼은 효도의 최고봉입니다. 정말 극진히 잘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죽은 사람한테 장례를 맡기라고 하시니,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실 예수님은 장례를 거부하신 적 없습니다. 항상 잘 모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모두에게 장례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간에 장례는 장중하게 잘 치러야 합니다. 한국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들이 치루는 장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믿는 사람으로 장례를 치르실 때 장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는 사람이 죽는 다고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으면 세상이 망합니까? 제가 죽으면 세상이 없어집니까? 우리 선조들이 많이 돌아 가셨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줄어들거나, 없어졌습니까?” "사람이 죽는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다 끝나도 하나님의 역사는 끝날 수 가 없습니다 ". 예수님 말씀은 다시 이어집니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데, 그러한 생명을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죽음으로 끝나는 생명이라면 너희 죽을자들이 장례를 지내거라” . 하나님의 생명창조의 목적과 의도는 몸의 생명이 끝났다고, 죽음이 왔다고 끝나는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시켜서 죽지 않는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 복음’이라고 선포하랍니다. “도마야,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려고 하십니다.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집안의 장례 치르셨죠? 돌아가신 분 어디에 묻어 드리셨습니까? 또 반대로 여러분은 죽어서 어디에 묻히고 싶으십니까? 성경말씀대로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생명의 힘이 강할 때만 가능합니다. 생명이, 생명의 힘이, 죽음을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아버지의 죽음을, 어머니의 죽음을 과거에 묻지 마십시오. 지나간 역사에 묻지 마십시오. 지나간 역사 어느 때에 묻고나서 늘 과거의 죽음을 추모하는 식으로 부모님 섬기지 마십시오. 죽음은 하나님 뜻에 의하면 내일에 묻는 것입니다. 어제에 묻지 않고, 내일에 묻습니다. 과거에 묻는 게 아니고, 미래에 묻습니다. 시신은 땅에 묻지만, 신앙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시신을 하나님 가슴에 묻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시는 하나님이시며, 미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내일에, 모레에, 미래에, 돌아가신 분을 묻으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장례에서도 그렇게 되셨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훌륭한 찬송을 부릅니다. 아까 함께 부른 찬송은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과거의 추억의 찬송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부릅니다. 내일도 부를 것입니다. 10년 후에도 부를 것입니다. 그 찬송은 옛날에 쓰여졌지만, 오늘에 살아있습니다. 사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들어진 찬송은 미래라 이름하는 오선지에 쓰여진 찬송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애창하는 아름다운 음악, 우리가 즐겨 보는 미술작품은 단순히 과거에 쓰이고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작가가 미래라 이름하는 오선지에 작곡을 하면 항상 미래에 까지 살아남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작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작품인 인간도 죽음으로 역사가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 속에 담깁니다. 죽음을 미래에 묻는다, 현재의 죽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미래 속에 묻는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 입니다. 이 복음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심으로 입증된" 생명의 복음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사람이 찾아와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단 한 가지만 양해해 달라고 합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쟁기를 몰다가 뒤를 돌아보면 쟁기 가는 도랑이 빤듯하게 되지 않아 곡식을 심을 수가 없다. 그러니 쟁기를 잡았으면 앞만 보며 가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제가 조금 전에 죽음을 미래에 묻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희망은, 꿈은 어디에 두시렵니까? 과거에 놓고 기념하시렵니까? 미래의 희망으로 대하시렵니까? 우리의 마음과 몸을 미래에 한 번 던져 보지 않으시렵니까? 과거에 놓아두고 버리시겠습니까?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자신이 남겨 두고 온 것들이 너무 아까워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합니다. "롯의 아내는 되지 말자. 불타는 과거는 그냥 뒤에 내버려 둬라, 앞에는 엄청난 새로운 미래의 역사가 있다. 과거의 역사에는 눈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 하신 미래에 눈을 뜨고 기도하자."

오늘 베드로서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기도하세요. 깨어 있으면 열린 미래가 보입니다." 그러면 과거는 어떻게 할까요? 과거는 버리는 게 아니고, 과거는 등에 업고, 행진은 앞을 향해서 합니다. 십자가는 등에 업고, 부활을 향해서 매일 매일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라는 사람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수난을 거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부활의 기쁨을 이야기 하는 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어려운 역사의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깨어 앞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됩니다. 오늘 베드로가 이런 실제를 전해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 분을 믿으면 여러분도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맡겨 보시죠. 사람이 거룩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바꿔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래이심으로 저의 삶도 미래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죽어도, 살아도 하나님의 미래 공간 속에 제가 묻히고 그 곳에서 살며 삶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이 이 미래를 주장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깨어 기도하고, 은총을 받고 일하면서 하나님 나라 위해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에게 옵니다. 지금, 오고 있는 미래를 받아드리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로 역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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